홈 > 연구사업> 중국의 지식인 > 문학예술
명말 청초 오중(吳中) 지역의 유민승(遺民僧) 사적
명말 청초 유민승의 형성은 당시 자발적으로 출가하여 선학을 수행하는 선승(禪僧), 문인으로서 출가한 시승(詩僧), 피세적 은일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유형도 있었지만, 도선(逃禪) 방식을 통해 유민승이 되었던 경우도 많다. 도선은 이족(異族)의 만청(滿淸) 정권에 대한 한족 사인으로서의 반항·절개를 보여 주고자 한 저항의 행위이자 일종의 생존방식이었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유민승 군체라는 집단적 형태를 띠었다. 특히 명말 남명 정권의 남하 이동 경로에 따라 오중(吳中)·광동(廣東)·복건(福建)·운남(雲南) 등 지역적으로 유민승 군체가 형성되었다.
명말 청초 오중 지역에 거주한 유민승은 대략 50명 정도이다. 본적이 오중 지역이며 오중 지역에서 출가한 사람이거나 본적은 다른 지역인데, 오중 지역에서 출가하여 오랜 시간 이곳에서 머문 유민승을 말한다. 이 가운데 일부 유민승의 사적을 간략히 살펴본다.
1. 엽소원(葉紹袁: 1589-1648)
자 중소(仲韶), 호 홍진(鴻振), 또는 천료(天廖), 속암(粟庵), 목불(木佛) 등이다. 오강현(吳江縣) 사람. 천계(天啓) 5년(1625)에 진사가 되어 남경무학교수(南京武學教授),국자감조교(國子監助教)로 제수받았다. 숭정(崇禎) 원년(1628)에 공부우형사주사(工部虞衡司主事)에 올랐으나 후에 관직 생활을 견디지 못해 모친의 병을 핑계로 분호(汾湖) 가에 거하며 벼슬자리를 멀리했다. 홍광(弘光) 원년(1644)에 청군이 오강(吳江)을 공격해 오자 자식들을 데리고 항주(杭州) 고정산(皋亭山)으로 들어가 불가에 귀의했다. 명이 멸망한 후 복건으로 내려가 남명 정권의 융무제(隆武帝)를 모셨다. 대표 저작으로 《오몽당집(午夢堂集)》·《갑행일주(甲行日注)》·《자찬연보(自撰年譜)》 및 《능엄경집해(楞嚴經集解)》·《위학변의(緯學辨義)》·《금강경주(金剛經注)》 등이 있다. 당시 정권교체기 고국을 상실한 유민으로서의 울분과 상실감이 《갑행일주(甲行日注)》에 잘 나타나 있다.
2. 귀장(歸莊: 1613-1673)
명말 청초 문학가, 화가. 자 이예(爾禮), 현공(玄恭). 호 항헌(恒軒). 자호 귀장(歸藏), 귀래호(歸來乎). 소주부(蘇州府) 곤산현(昆山縣: 현, 강소) 사람. 특히 고염무(顧炎武)와 두터운 교제를 나누었다. 순치(順治) 2년 곤산(昆山)에서 기병(起兵)하여 항청(抗清)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그 후 승려가 되었다. 저서로 《현궁(玄弓)》·《항헌(恒軒)》·《귀현공문초(歸玄恭文鈔)》·《귀현공유저(歸玄恭遺著)》 등이 전한다.
3. 웅개원(熊開元: 1599-1676)
자 현년(玄年). 호 어산(魚山), 벽암(檗庵). 법명 정지(正志). 호광(湖廣) 가어(嘉魚) 사람. 가계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천계(天啟) 5년(1625)에 진사가 되어 숭명지현(崇明知縣)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오강지현(吳江知縣)으로 옮겨갔다. 숭정 15년(1642)에 수보(首輔) 주연유(周延儒)를 탄핵하려다 하옥되었고, 17년(1644)에 절강(浙江) 항주위(杭州衛)로 폄적되었다. 남명(南明) 복왕(福王)이 등극하면서 오강(吳江)으로 사면되어 그곳에서 머물다가 이과급사중(吏科給事中)에 제수받았으나 사절하였다. 그 후 복건으로 내려가 항청 활동에 참여하였고, 당왕(唐王) 때에 공과좌급사중(工科左給事中), 적태상시경(擢太常寺卿), 좌검도어서(左僉都禦史) 등을 맡았다. 융무(隆武) 2년(1646)에 파직하고 도선(逃禪)하여 승려가 되었다. 순치(順治) 8년(1651)에 소주(蘇州) 화산(華山) 영암사(靈岩寺)에 은거하면서 홍저(弘儲)의 사법(嗣法) 제자가 되었다. 일찍이 오강(吳江) 화엄사(華嚴寺), 주장(周莊) 영녕암(永寧庵)의 주지가 되었다. 저서로 《화산기승집(華山紀勝集)》·《격축여음(擊築餘音)》·《제방어록(諸方語錄)》·《벽암별록(檗庵別錄)》·《어산잉고(魚山剩稿)》·《임계죄상(壬癸罪狀)》·《연보(年譜)》 등이 있다.
4. 오유애(吳有涯: 생졸년 불명)
자 무신(茂申). 오강 사람. 동향의 장부(張溥), 양정추(楊廷樞)와 함께 복사(復社)의 주요 성원이 되었고, 정사(政事)에 관심이 많았다. 남명 정권 시기에 복건으로 내려가 융무제를 모셨다.
5. 강채(薑埰: 1607-1673)
자 여농(如農). 호 향서(鄉墅). 별호 경정산인(敬亭山人). 산동 래양(萊陽) 사람. 숭정 경오(庚午)년에 거인(舉人)이 되었고, 숭정 4년(1631)에 진사가 되었다. 처음으로 운현령(密雲縣令)에 제수되었고 정치적 업적을 쌓아 예부의제사주사(禮部儀制司主事)로 승진되어 예과급사중(禮科給事中)까지 올랐다. 숭정 15년(1642)에 수보(首輔) 주연유(周延儒)를 탄핵하려다 당시 웅개원 등과 하옥되었다가 선성위(宣城衛)로 폄적되었다. 홍광제가 즉위하면서 사면되어 고궁(故宮)에서 기거하게 되었으나 가지 않고 오문(吳門)에 머물렀다. 정해년(丁亥年: 1647)에 출가하여 황산(黃山) 승상원(丞相園)에서 승려 생활을 하면서 호를 경정산인(敬亭山人)이라고 했다. 동생 강해(薑垓)와 오중(吳中: 소주)에서 유민으로 살면서 오중의 사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자성(李自成) 군대와 청군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면서 강남(江南)으로 이주해 왔다. 남명 홍광제(弘光帝), 노왕(魯王)에게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의 벼슬을 받았지만 사절했다. 계축(癸醜: 1673)에 세상을 떠나 선성현(宣城縣) 경정산(敬亭山) 기슭에 안치되었다. 저서로 《경정집(敬亭集)》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