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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청초 유민승(遺民僧) 사적(3)
1. 대립(戴笠: 1614-1682)
초명(初名) 정립(鼎立). 자 운야(耘野) 또는 칙지(則之). 강소성 오강현(吳江縣) 사람이다. 명이 망한 후 수봉산(秀峰山)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후에 환속하여 오강현 부근 주가빈(朱家浜)에서 은거했다. 생도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명말의 역사에 해박했으며 관련 저술로 저보(邸報)와 주장(章奏) 및 사가(私家)의 기록을 모은 《구사편년(寇事編年)》와 명말 순국한 제신(諸臣)에 대해 기록한 《순국회편(殉國彙編)》이 있다. 이 외에도 《사문기략(思文紀略)》, 《성안서법(聖安書法)》, 《행재춘추(行在春秋)》 등이 있다.
2. 운일초(惲日初)
자 중승(仲升), 호 손암(遜菴). 강소성 무진(武進: 상주常州) 사람이다. 남명(南明) 정권의 의사(義士)였다. 젊었을 때 복사(復社)의 핵심 인물 양정추(楊廷樞) 등과 교유를 하였다. 특히 송대 유서(儒書)에 관심이 많아서 후에 유종주(劉宗周)를 스승으로 모셨고, 상소문을 자주 올려 나라의 국정을 바로 잡고자 노력했다. 숭정(崇禎) 16년(1643)에 천태산(天台山)에서 은거했다. 명조가 망한 이후 남명 정권은 여러 차례 그를 초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광주(廣州)가 함락된 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광주(廣州), 건녕(建寧: 호남성 주주시株洲市), 포성(蒲城: 섬서성陝西省 위남시渭南市) 등에서 항청 활동을 벌였다.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고유효(顧有孝: 1619-1689)
자 무륜(茂倫), 호 설탄조수(雪灘釣叟). 강소성 오강(吳江) 사람. 명말 제생(諸生). 명이 망하자 유가 관련 서적과 의관을 모두 불태웠다. 강희(康熙) 17년(1678), 박학홍유(博學鴻儒)로 천거되었으나 거절했다. 그 후 설탄(雪灘)에서 거하여 낚시를 하면서 시선(詩選) 작업에 몰두했다. 고초(顧樵)·서개백(徐介白)·유무수(俞無殊)·주안절(周安節) 등과 막역한 사이였다. 저서로 《설탄조수집(雪灘釣叟集)》과 시선집(試選集) 《당시영화(唐詩英華)》 등이 있다.
4. 염이매(閻爾梅: 1603-1679)
자 용경(用卿), 호 고고(古古). 또는 백탑산인(白耷山人), 도동화상(蹈東和尚)으로도 불린다. 강소성 패현(沛縣) 사람이다. 16살에 수재(秀才)가 되었고 숭정(崇禎) 3년(1630)에 거인(舉人)이 되었다. 시부(詩賦)에 뛰어났다. 평소 충의(忠義)를 숭상하고 기절(氣節)를 중시했다. 복사(復社) 성원이며, 장부(張溥)·진자룡(陳子龍) 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엄당(閹黨)을 반대하다가 모함을 받아서 폄적되기도 했다.
청군이 침입해 오자 남명(南明) 가사법(史可法)의 막료(幕僚)되었다. 가사법에게 산동(山東), 하남(河南)으로 진군하여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라고 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났다. 후에 양주(揚州), 서주(徐州)가 계속 함락되자 가산(家產)을 모아 항청 활동에 가담했다. 순치(順治) 5년(1648) 체포 구금되었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순치 10년(1653) 틈을 타서 탈출하여 예(豫)·환(皖)·진(晉)·감(甘)·섬(陝)·천(川)·악(鄂)·공(贛)·촉(蜀) 등의 지역으로 도망 다니면서 복명(復明)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강희(康熙) 12년(1673) 복명의 희망이 사라지자, 고향으로 돌아갔고 청 정부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명의 회복이 불가능함을 본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도동화상(蹈東和尚)이라 불렸다. 강희 18년(1679) 겨울, 향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으로 《백탑산입집(白耷山人集)》이 세상에 전한다.
5. 장유예(張有譽: 1589-1669)
자 수예(誰譽), 호 정함(靜涵). 법호(法號) 대원(大圓). 강음(江陰: 현, 강소성) 사람이다. 명 천계(天啓) 2년(1622) 진사가 되어, 남명(南明) 호부상서(戶部尚書), 태자태보(太子太保)의 벼슬에 올랐다. 후에 남경호부주사(南京戶部主事) 등의 관직에 올랐고 성품이 청렴했다. 숭정(崇禎) 연간에 요주지부(饒州知府)로 발탁되었고, 강서독량부사(江西督糧副使), 사천안찰사(四川按察使) 등을 역임하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정삼준(鄭三俊)은 세상에서 가장 청렴하고 능력있는 관료 중에 장유예를 최고로 손꼽았다. 홍광(弘光) 정권이 망한 후 무강산(武康山: 현, 동관산銅官山)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