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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동점기(西學東漸期) 서학과 중학 : 지식의 수용-생산-전파”
: 조직·인물·활동·매체·개념을 중심으로
중국의 근대 학술은 서학을 어떻게 수용·인식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학에 대한 인식은 중국 전통 학문에 대한 재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학동점기(西學東漸期)는 대외적으로 서학을 수용함과 동시에 내부적으로 중국의 전통 지식 체계를 재인식하고 정립하는 시간이었다. 이에 근대 중국의 서학에 대한 인식과 관점은 서학동점기의 양무(洋務) 지식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중국 전통 지식 체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전통 학문이 변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요인은 무엇이며, 어떤 인식을 바탕으로 어떤 조직과 활동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 왔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는 새로운 지식생산의 과도기였던 중국의 근대 지식 수용과 생산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대내외적으로 요구되는 변화의 시기 속에서 전통과 근대는 ‘와해와 생산’이라는 틀 속에서 어떠한 변화 과정을 거쳐왔는가. 여기서는 이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일부 소개하고자 한다. “서학동점기 서학과 중학: 지식의 수용-생산-전파”라는 주제로, 조직·인물·활동·매체·개념 등에 대해 중점적으로 소개할 것이다.
一. 상해격치서원(上海格致書院)
서학동점기에 양무(洋務) 지식을 생산하고 서학을 전파하던 교회학교, 양무학당 및 관련 매체들은 서학의 유입 이후에 생겨난 산물이다. 하지만 서학의 유입으로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것은 중국의 전통 학술 체계와 관련 교육기구일 것이다. 서학을 인식·수용하기에 앞서, 전통적으로 중국 사회를 지배해왔던 ‘화이(華夷)’, ‘용하변이(用夏變夷)’ 등의 문화 관념을 당시 시대 상황에 맞게 먼저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먼저 중학(中學)과 서학(西學)의 연결점을 찾아내어 서학 수용의 근거와 명분을 마련함으로써, 서학을 변용・수용함과 동시에 중국 전통 지식 체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세워진 당시 신식서원은 서학을 수용·전파함으로써 전통 학문 체계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 나갔다.
신식서원 가운데 서학 전파와 양무 인재 양성에 중요한 기능을 한 교육기구 중의 하나가 1874년에 설립한 상하이격치서원(上海格致書院, 이하 격치서원으로 약칭)이다. 격치서원(1874-1908)은 1874년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중국 이름은 麥都思)가 제기하였다. 그 후 서양의 선교사, 사업가와 중국의 대표적인 양무파 관료・사업가・사신(士紳) 및 학자들이 1875년 상하이 조계지 베이하이루(北海路)에 설립한 신식서원이다. 격치서원은 ‘고과(考課)’의 활동을 통해 서학을 생산·전파하였다. 이른바 양무 지식인들이 서학을 수용, 생산하는 학술 플랫폼이 되었다.
격치서원은 1874년 상하이 주재 영국 영사(領事)이자 선교사인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1823-1885 麥都思)가 설립을 제의하였고, 그 후 이사회의 발족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1875년 교사(校舍)가 완공되고 1876년 조계지 베이하이루(北海路)에 정식 개원하였다. 그 후 1879년 학생을 모집하고 1880년 정식 수업에 들어갔다. 격치서원 개원 후, 양무파 지식인 서수(徐壽)가 주관하다가 1884년에 세상을 떠나자, 1885년부터는 왕도(王韜)가 운영하였고 1897년 왕도가 죽자, 1888년부터는 조원익(趙元益)이 그 뒤를 이었다. 격치서원은 1874년 설립하여 무술정변(戊戌政變) 이후 중국의 서원들이 점차 쇠락하던 1910년 전후에 폐원했다.
1874년에 선출된 이사진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양 측 이사진은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1823-1885 麥都思), 프라이어(Fryer 傅蘭雅), 와일리(Wylie, 偉烈亞力, 영국선교사), 포브스(미국사업가, 福弼士, Russell & Co. 旗昌洋行行長), 토드마(Toddma, 敬妥瑪, 영국인), 드러먼드(W.V. Drummond, 丹文, 미국변호사), 맥고완(Daniel J. MacGowan, 瑪高温, 미국선교사) 등이다. 중국 측은 당정추(唐廷樞)·서수(徐壽)·화형방(華蘅芳)·왕영화(王榮和)·서건인(徐建寅)·이봉포(李鳳苞)·서화봉(徐華封)·장환륜(張焕倫)·왕도(王韜)·조원익(趙元益)·이평서(李平書) 등이다. 주로 국내외 관료·선교사·변호사·양무 지식인·학자·사업가들이 설립·운영하였다.
1.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麥都思: 1796-1857)
자호(自號) 묵해노인(墨海老人). 19세기 저명한 영국 선교사이자 한학자이다. 영국 런던 선교회의 Robert Morrison(羅伯特·馬禮遜: 1782-1834), William Milne(米憐: 1785-1822)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활동한 중요한 선교사 중의 한 명이다. 주로 남양(南洋), 상해 등에서 선교·저술·출판 등에 종사했다. 또한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소를 설립하고 자전(字典)을 편찬하고 신문을 창간하였다. 중국에서 복음을 전파함과 동시에 중서 문화 교류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메드허스트는 179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런던에서 인쇄 기술을 배웠다. 유년기에 Cathedral Church of St.Peter and St.Paul(聖保羅座堂學校)에 들어가 14살에 인쇄공 Wood(伍德)의 학도가 되었고, 자립교회(自立教會) 회원이 되었다. 1816년 영국 런던회에 의해 Malacca(馬六甲)로 파견되었다. 말래카에서 말레이시아어, 중국어 및 일부 중국 방언을 배웠고, 중국어 간행물 《Chinese Monthly Magazine(察世俗每月統記傳)》(William Milne이 1815년 8월 5일 창간. 첫 번째 화인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중국어판 근대 간행물)의 편집을 도왔다. 1817년 Jakarta(雅加達)에서 인쇄소를 설립하였고, 이는 런던회의 주요 남양(南洋) 기지가 되었다. 그 후 1819년 말래카에서 목사로 임명받았다. 말래카, Penang(檳城), Batavia(巴達維亞) 등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고, 당시 약 30여 중문 서적을 인쇄하였다.
1843년 런던회를 대표하여 상해로 가서 첫 번째 상해 외국 선교사가 되었다. 1843년 William Charles Milne(美魏茶: 1815-1863), William Muirhead(慕維廉: 1822-1900), Joseph Edkins(艾約瑟: 1823-1905) 등의 선교사들과 묵해서관(墨海書館)을 창건하였고, 중문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묵해서관에서 왕도(王韜)의 도움으로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深文理聖經)하였다. 또한 산동로(山東路) 일대에 런던회 총부를 건립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묵해서관(墨海書館), 천안당(天安堂), 인제의원(仁濟醫院)을 포함하여 이를 “메드허스트 권역(麥家圈)”이라 불렀다.
1848년 3월, William Lockhart(雒魏林), William Muirhead(慕維廉)와 함께 청포(青浦)로 가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선민(船民)과 충돌이 생겼다. 영국 영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중국 근대의 첫 번째 청포교안(青浦教案)이 되었다. 1854년 8월 공부국(工部局) 제1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1857년 1월 24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2. 프라이어(John Fryer/傅兰雅: 1839-1928)
1839년 8월 6일 영국 Kent County(肯特郡) Hythe(海斯)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성공회 교도이자 번역가이다. 단독 혹은 합작한 번역서가 총 120부에 달한다(대부분 과학기술 서적). 청 정부는 그에게 삼품(三品) 관함(官銜)과 훈장을 내렸다. 대표 작품으로 《화학감원(化學鑒原)》, 《미적소원(微積溯源)》 등이 있다.
프라이어는 대학 졸업 후 청 함풍(咸豐) 11년(1861)에 홍콩으로 가서 성바오로서원(聖保羅書院)의 원장이 되었다. 2년 후 북경동문관(北京同文館)으로 초빙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동치(同治) 4년(1865)에 상해영화학당(上海英華學堂) 교장으로 부임되었고, 자림양행(字林洋行)의 중문 신문 《상해신보(上海新報)》의 주편(主編)이 되었다. 동치 7년(1868) 상해강남제조국번역관(上海江南制造局翻譯館)의 번역원으로 초빙되어, 약 28년간 과학기술 서적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광서(光緒) 2년(1876) 격치서원(格致書院)을 창립하였다. 동시에 과학잡지 《격치회편(格致彙編)》을 창간하여 주로 과학상식에 대한 뉴스성 있는 내용을 실었으며, 또한 “묻고 답하기(互相問答)” 코너를 마련하여 창간호부터 정간에 이르기까지 대략 322항목, 500여 문제를 출간했다. 광서 3년(1877) 상해익지서회(上海益智書會) 총편집으로 선출되어 과학기술 보급과 관련 일에 종사했다. 그 후 광서 22년(1896)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대학 동방어문학과(東方文學語言) 교수가 되었고 후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프라이어는 중국에서 선교와 과학기술 전파에 힘써왔다. 그 이유로 선교사들은 그를 “과학 교육을 전파한 선교사(傳科學之教的教士)”라고 불렀다. 프라이어는 자신의 젊음을 중국에게 바쳤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직 반평생 심혈을 기울여, 중국에서 서법(西法)을 더 많이 발전시키고 격치(格致: 일종의 과학기술)를 넓게 보급함으로써, 중국이 자강(自強) 자부(自富)하기를 바랐다.” 1928년 7월 2일 미국 캘리포니아 Auckland(奧克蘭)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학 지식(인): 인물, 개념, 서책(1) 부터 향후 계속될 인물 소개 내용과 출처 : 주로 필자의 자료와 바이두(Baidu)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일일이 출처를 표기하지 않는 경우는 바이두의 내용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