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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동점기(西學東漸期) 서학과 중학 : 지식의 수용-생산-전파”
--조직·인물·활동·매체·개념을 중심으로(3)
1. 서건인(徐建寅: 1845-1901)
자(字) 중호(仲虎). 강소성 무석(無錫) 사람. 부친 서수위(徐壽爲)는 근대 중국의 화학 계몽가이자 조선업(造船業)의 선구자이다. 병공기술(兵工技術) 전문가이자 화학자·과학자·번역가이다.
서건인은 17살 때 부친 서수위를 따라 안경(安慶) 군계소(軍械所) 창립에 참여했고, 동치(同治) 4년(1865)에 첫 번째 중국 증기선을 만들었다. 동치 6년(1867)에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강남제조국에서 7년 동안 부친을 도와 증기선 “염길호(恬吉號)”와 “구원호(馭遠號)” 6척 제작을 도왔고, 창포 탄약(槍炮彈藥)·초산(硝酸)·유산(硫酸) 및 수은 폭약(汞爆炸藥) 제작을 연구했다. 또한 국외 전문가들과 《포여철갑론(炮與鐵甲論)》·《격림포조법(格林炮操法)》·《조유강수법(造硫強水法)》·《기기필이(汽機必以)》 등 군사 및 과학기술 서적을 공동 번역했다.
동치 13년(1874)부터 광서(光緒) 4년(1878)에 이르기까지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과 산동기기국(山東機器局) 건설을 후원했고, 군공산품(軍工產品) 제조에 중요한 공헌을 세웠다. 광서 5년(1879), 독일·영국·프랑스 등으로 가서 각국의 과학기술 상황을 탐방했다. 광서 24년(1898), 유신변법(維新變法) 당시 농공상독판(農工商督辦)을 역임했다. 후에 복건선정국(福建船政局) 마미조선창제조(馬尾造船廠提調)·호북성영무총판(湖北省營務總辦)·보안화약국(保安火藥局)·한양강약창독판(漢陽鋼藥廠督辦) 등을 각각 역임했다.
광서 27년(1901) 3월, 강약창(鋼藥廠)에서 화약을 제조하던 중 순직(殉職)했다. 중국 근대 과학 연구 기지에서 희생한 첫 번째 과학자가 되었다. 저서로 《조선전서(造船全書)》·《병학신서(兵學新書)》·《화학분원(化學分原)》·《수뢰록요(水雷錄要)》·《구유잡록(歐遊雜錄)》 등 40 여종이 있다. 그 가운데 번역 출판한 것은 18종, 전문 서적 4종, 논문 10여 편이 있다.
2. 이봉포(李鳳苞: 1834-1887)
강소(江蘇) 숭명(崇明: 현, 상해 숭명구崇明區) 사람. 자 단애(丹厓). 전통 교육을 받아 수재(秀才), 공생(貢生)이 되었다. 특히 역산(曆算)과 측량(測繪)에 정통했다. 강소 지역 정일창(丁日昌)의 추천으로 도원(道員)이 되었다. 강소여도국(江蘇輿圖局),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 오송포대공정국(吳淞炮台工程局)에서 근무했고, 지도 제작과 서양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동치(同治) 초기, 측량에 정통하고 지리 지식이 풍부하여 강소여도(江蘇輿圖), 숭명여도(崇明輿圖)를 제작했다. 광서(光緒) 원년(1875)에 복건선정대신총고공(福建船政大臣總考工)이 되었다. 그 후 광서 3년, 유학생을 데리고 영국, 프랑스 등으로 건너가 감독관으로 생활했다. 1878년 이홍장의 추천으로 주(駐) 독일 공사(公使)가 되었고, 얼마 후에 마카오,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공사를 겸직했다. 1884년 프랑스 공사로 있다가 청불 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북양영무처총판(北洋營務處總辦)을 맡았고 동시에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을 관리했다. 저서로는 《사예편년표(四裔編年表)》, 《서국정문휘편(西國政聞彙編)》이 있고, 《숭명현현지(崇明縣縣志)》를 편수(編修)했다.
3. 왕도(王韜: 1828-1897)
원명(原名) 왕리빈(王利賓). 후에 왕도(王韜)로 개명했다. 자 난영(蘭瀛) 또는 왕한(王瀚). 관적(貫籍)은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 보리촌(甫里村: 현, 강소성 소주시 오중구吳中區 록직진甪直鎭)이다. 청대 소설가, 사상가, 교육자, 학자, 저널리스트이며, 중국 근대 조기 유신파(維新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왕도는 1845년 수재(秀才)가 되었고, 1849년 상해 묵해서관(墨海書館)에서 근무했다. 1862년, 황완(黃畹)이라는 필명으로 태평천국(太平天國)에 상서(上書)를 하다가 발각되어, 청 정부의 체포 명령이 내려져서 홍콩으로 도피했다. 1867년 겨울,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전역을 유력(遊歷) 하다가, 1870년 겨울에 홍콩으로 돌아와 《화자일보(華字日報)》의 주필(主筆)로 근무했다. 1879년 일본으로 건너가 체류하다가 1884년 봄에 홍콩을 통해 상해로 돌아왔다.
1886년 가을, 격치서원(格致書院) 산장(山長)을 맡으면서 기존의 교육 방법을 바꾸고 서학(西學)을 전파하면서 신(新) 지식인 양성에 힘썼다. 1890년 《만국공보(萬國公報)》의 주요 필진이 되었다. 중국의 첫 번째 정치 논평(政論) 저널《순환일보(循環日報)》를 창간했다. 그의 정치 논평은 《도원문록외편(弢園文錄外編)》에 일부 수록되었고, 중국에서 가장 이른 정치 논평 문집으로 손꼽힌다. 왕도의 언론매체 운영 사상과 간행물에 담긴 정치 논평은 중국의 언론매체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당시 지식인층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97년 상해에서 병사했다.
4. 이평서(李平書: 1854-1927)
강소성 보산(寶山: 현, 상해시) 사람이다. 원명(原名)은 안증(安曾)이며 후에 종각(鍾玨)으로 개명했다. 호는 슬재(瑟齋) 또는 차완(且頑)이다. 우공(優貢: 청대 과거제도에서 우수한 생원生員을 뽑아 국자감國子監에 입학시키는 제도. 3년마다 성省에서 5-6명, 작은 성省은 1-2명을 선발. 우수한 자는 태학太學으로 올라갈 수 있었음) 출신이다.
용문서원(龍門書院)에서 수학하였고 1883년 상해 《자림호보(字林滬報)》에 시론(時論)을 싣기 시작했다. 1899년 광동성 수계지현(秀溪知縣)으로 재직하던 중, 프랑스의 광저우만 점령에 대한 인민의 반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903년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 제조(提調)로 임명되었다. 이후 중국통상은행(中國通商銀行) 총동(總董), 초상국(招商局) 동사(董事), 강소철로국(江蘇鐵路局) 동사(董事)를 각각 역임했다.
이평서는 1905년 1월 장죽군(張竹君)과 함께 《신보(申報)》에다 ‘여자중서의학원(女子中西醫學院)’ 모집 광고를 게재했다. 여자중서의학원은 두 개 과정으로 나뉜다. 5년제 정규과정생(正科)은 중서 의학 과목과 수신(修身: 윤리)·국문(國文)·산학(算學)·이화(理化: 물리 또는 화학)·외국어·음악 등 8과목을 배웠고, 6년제 예과생(預科)은 중의학과 수신(修身)·국문(國文)·산학(算學)·이화(理化)·외국어·음악 등 7과목을 이수했다. 1년 후 정과(正科)로 들어가 다시 서학을 배웠다. 졸업 후 유명한 중서 의학 전문의를 초빙하여 분야별 시험을 치르게 했다. 시험에 합격한 학생들은 졸업장을 받고 의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05년 2월 상해여자중서의학원(上海女子中西醫學院/女子中西醫學堂)은 파극로(派克路: 前, 상해시 황포구黃浦區 황하로黃河路/광서 30년(1904)에 파극로派克路로 바꿈)에서 정식으로 개교했다. 이평서는 발기인이자 총동(總董)으로서 경비를 마련했고 중의(中醫) 수업을 맡았다. 장죽군은 감원(監院)으로서 서의(西醫)를 맡았다. 기타 수업은 전공 분야별 교수를 초빙하였다. 그 후 1907년 제1회 중의학(中醫學) 예과반(預科班) 졸업생 7명을 배출했다. 상해여자중서의학원(上海女子中西醫學院)의 창립은 상해 화인 의료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1년 10월 무창(武昌) 봉기 이후, 동맹회(同盟會)와 연계하여 상해기의(上海起義)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차완노인칠십세자서(且頑老人七十歲自敘)》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