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당대 문학논쟁의 계보와 문학 지식인*

 

 

목 차

 

 

1. 들어가며

 

2. 문학社團에서 작협(作協문련(文聯)까지

   2.1. 문학사단의 탄생과 발전

   2.2. 30년대 좌익작가연맹

   2.3. 49년 이후 문학사단의 통일-작협과 문련의 탄생

   2.4. 49년 이전 문학사단 상황표

 

3. 주요 문학논쟁과 문학 지식인

 

3.1. 20년대-40년대

  3.1.1. 5·4 신문학운동의 발전과 분열(1917-1927)

  3.1.2. 좌익문예운동과 30년대 문학(1928-1937)

  3.1.3. 항전기 문학 논쟁(1938-1949)

 

3.2. 50년대-70년대

  3.2.1. 1차 전국문학예술공작자 대표회의(文代會)

  3.2.2. 2文代會

  3.2.3. 대약진운동과 문학

  3.2.4. 문화대혁명과 문학

 

3.3. 80년대-2000년대

  3.3.1. 4차 문대회와 신시기 문학논쟁

  3.3.2. 전환기 문학 논쟁

  3.3.3. 신세기 문학 논쟁

 

4. 문학논쟁의 계보와 문학지식인 개관도

 

5. 나오며

 

- 부록: 중국의 문학 지식인(본 연구소 홈피 '연구사업-중국의 지식인' 참조)

- 참고문헌

 

 

* 이 글은 미완의 상태이니 인용을 삼가하기 바라며, 앞으로 내용과 형식면에서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일부 내용은 첨부파일로 제시한다. 

 

 

1. 들어가며

2. 문학社團에서 작협(作協문련(文聯)까지

2.1. 문학사단의 탄생과 발전

2.2. 30년대 좌익작가연맹

2.3. 49년 이후 문학사단의 통일-작협과 문련의 탄생

2.4. 49년 이전 문학사단 상황표

 

1. 들어가며

 

   이 글은 기존의 국내외 중국 현·당대문학사, 문학논쟁사, 사단사, 사조유파사 등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5·4신문화운동 이후부터 2000년대 초까지 중국 문학의 주요 문학논쟁을 살펴봄으로써 중국문학 논쟁의 흐름과 문학 지식인에 대해 소개하고자 정리된 것이다. 주요 내용은 논쟁내용, 인물, 조직(사단) 등을 중심으로 하며, 시대별로 논쟁의 흐름도와 문학 지식인에 대한 소개도 제시할 것이다. 본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문학에서의 지식을 문인이나 문학연구자들이 문학 행위·연구를 통해 생산한 작품, 논쟁 및 연구논문 등을 가리키며 문학 지식인은 이러한 지식을 생산하거나 운용하는 문학단체나 조직 및 유파의 문인으로 상정한다. 논쟁, 담론은 지식을 생성하는 방식이자 재료가 되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체계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문학지식() 계보를 읽어내는 데에 있어 문학논쟁, 담론과 이에 가담하였던 문학사단, 지식인들의 추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시기는 현대문학의 시작점인 1917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를 연구 대상으로 하며 크게 49년 이전, 49년 이후, 80년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내용은 49년 이전까지는 문학논쟁, 문학사단과 인물을 중심으로, 49년 이후는 문예비판, 문예운동과 인물을 중심으로, 80년대 이후로는 문학담론과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시기별로 내용상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대체로 현대문학은, 특히 20-40년대에는 주로 문학사단을 중심으로 문학 논쟁이 이루어지고 50-70년대에는 좌련(左聯)이 작협(作協)과 문련(文聯)으로 통일되어 작가, 작품, 예술문제 등에 대한 논쟁이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며 80년 이후에는 여전히 작협과 문련이 존재하지만 조직 자체가 아닌 개별 연구자(작가, 문학비평가, 대학의 연구자 등)에 의해 문학논쟁, 담론 등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간략히 시대별 논쟁의 특징을 살펴보면, 5·4 신문화운동 직후에는 문제와 주의논쟁, ‘국고정리논쟁, 학형파와 갑인파의 논쟁과 같이 신문학과 복고파 사이의 논쟁 및 문학연구회와 창조사의 논쟁, 문학연구회의 원앙호접파에 대한 비판, 어사파와 현대평론파의 논쟁과 같이 신문학 진영 내부의 문학 경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논쟁 등이 발생하였다. 20년대 후반기 이후 10여 년 간은 혁명문학논쟁, 프로문학과 신월파의 논쟁, ‘문예대중화논쟁, ‘자유인’·‘3종인논쟁, ‘두개의 구호논쟁과 같이 좌익문예의 도입과 관련한 논쟁이 주를 이루었다. 이 외에 루쉰과 논어파와의 논쟁, 경파와 해파의 논쟁과 같이 문학경향의 차이에 기인한 논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40년대 말까지는 좌익문학계 내부의 충돌에서 비롯된 항전무관론논쟁, ‘민족형식문제논쟁, 전국책파에 대한 비판, ‘주관전투정신논쟁 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49년 이전 중국 문예계에는 복잡한 모순적인 상황이 존재하였는데 이는 각 작가 및 사단의 정치 입장 및 이와 관련되는 문학관의 차이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를 논쟁과 작가유형에 따라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친 국민당 정권의 정치 성향을 가진 작가들과 중공이 이끄는 혁명운동에 투신한 작가들 간의 모순(이 두 부류의 작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었으나, 문학이 정치에 복무한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서로 비슷한 문학관을 갖고 있었다)이다. 둘째, 복잡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중립을 유지하거나 3의 노선을 가고자 하는, 즉 예술 활동에서 그 독립된 지위를 보호하려는 작가와 상술한 두 가지 부류의 작가 간의 모순이었다. 셋째, 좌익문예계 내부에서 견해와 종파의 이익이 엇갈림으로써 생겨난 모순이 있었다.

   특히 40년대에 이르러 중국 문예계의 주요 논쟁은 아래와 같은 두 노선 사이에 벌어졌는데, 하나는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기타 혁명 인민을 대표하는 인민을 위한 예술 노선이었다. 그리고 투쟁의 결과, 전자의 문예이론 노선은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문예작품은 이미 군중을 상실하였다.”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궈모뤄가 부르주아의 문예 노선을 대표한다고 지칭한 작가들은 자유주의작가라 지칭되기도 했는데, 이들과 좌익문예계의 충돌은 분명 192030년대 문예계 투쟁의 중심 사안이었다. ‘자유주의작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이들로는 후스, 양실추, 쉬즈모 등의 신월파작가가 있고, 30년대의 3종인작가가 있으며, 린위탕 등의 논어파가 있고, ‘경파 작가의 일부 및 40년대의 쳰중수, 장아이링 등이 있었다. 4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들이 문학계에서 차지하던 영향과 지위는 극도로 쇠약해졌으며, 사실상 발언권을 상실하였다.1)

   19497월 승리가 사실상 확실해진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은 제 1차 중화전국문학예술공작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마오쩌둥의 <옌안 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이 규정한 중국 문예의 새로운 방향을 전국 문예활동의 방향으로 확립하였다. 이 후 문학 외부에서는 일련의 정치 운동을 통하여 문학을 공산당의 선전도구로 활용하고 지식인의 소자산계급적 특성을 개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건국 직후인 1951년 영화 무훈전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교육계와 문예계의 성분이 불량하다고 여겨지는 인사들에 대한 정풍운동을 단행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 당에 의해 후펑, 후스 등의 문예사상이 대대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고, 공산당 지도부는 잇달아 문예창작과 비평의 규범을 제안하고 이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경직된 창작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1956년에 잠시 쌍백방침을 표방하였던 공산당은 1957년 마침내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단행하고 이러한 경직된 창작 분위기는 이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시기를 맞이하여 더욱 심화되어갔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작가가 부당하게 창작 권리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진정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열정을 가진 작가들에 의해 비밀리에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80년 이후, 특히 90년대 시장경제체제의 거대한 충격 속에서 문학의 상업화, 통속화 현상이 극심해지자 시장기제에 대응적응하려는 문학적 시도들이 이어졌다. 90년대 이후 문학은 대중적 전파력을 가진 하나의 문화자본으로서의 지식이 되어가, 80년대를 누려왔던 계몽비판적 지식인의 권위와 문학적 권위가 서서히 실추되는 탈 엘리트 현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문학담론도 거대담론으로부터 벗어나고 문학의 권력 형태도 지식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상황은 인문정신’->‘문학의 위기’->‘문학 영역의 확대등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담론 흐름을 형성하였다. 결국 90년대 이후 문학의 독립성 회복, 문학 영역의 확대, 문학(담론)의 문화영역으로의 탈바꿈 문제 등은 문학지식 생산체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탈 엘리트 문학현상과 그와 관련된 문학담론의 변화는 문학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지속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개혁개방을 전후로 문학의 기능과 문학연구 영역이 이전에는 문학과 정치와의 관계에 치중되었다면, 그 이후는 문학과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 文學社團에서 작협(作協문련(文聯)까지2)

 

2.1. 문학사단의 탄생과 발전

 

   1917년에서부터 1949년까지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개별 작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작가들은 문학社團의 성원이거나 사단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부터 신 중국 성립까지 30년 동안 무수한 사단이 성립하였으며, 이러한 문학사단의 형성과 발전은 중국현대문학사의 주요 현상·특징 중의 하나이다. 1921년 문학연구회를 시작으로 2,30년대 창조사, 태양사, 신월사, 중국좌익작가연맹, 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 등의 문학사단이 출현한다.3) 이중 좌익작가연맹(‘좌련’)과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문협’) 등은 전국 각지에 분회를 조직하는 등 통일된 조직의 성격을 지녔으며 간행물을 창간하거나 작품을 쓰면서 현대문학의 주요내용을 구성해 나갔다. 그 후 1947년 중화전국문학공작자협회(‘전국문협’)가 생기면서 현대문학사단은 해산되며, 전국 문협은 1953년 현재 중국작가협회로 통합·개명된다.4)

   가장 먼저 생긴 중국 현대 순문학사단은 정진탁 외 12인이 19211월 북경에서 발기한 문학연구회이다. 이 단체는 인생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며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제창하였다. 소설월보를 회간으로 하고 후에 문학旬刊, 등의 간행물을 발간하였으며 총서 약 100종을 출간하였다. 회원 수는 170여명에 달했는데 유명인으로 모순, 섭성도, 주작인, 왕통조, 허지산, 빙심, 주자청, 兪平伯 등 수십명이 있다. 문학연구회는 북경, 상해 외에 광주, 영파, 정주 등에 분회를 설립하고 1932소설월보가 정간되기까지 활동하였다. 문학연구회는 중국현대문학사단 가운데 실력, 성취, 영향이 가장 강한 전형적인 사단이었다. 문학연구회의 뒤를 이어 나온 사단 가운데 비교적 활발한 사단은 북경에 중국 신시사, 신월사, 어사사, 淺草-沈鍾, 未名사 등이 있고, 상해에는 민중극사, 희극협사, 彌灑, 狂飇, 南國사가 있고, 항주에는 湖畔시사, 長沙에는 湖光문학사, 무한에는 藝林, 천진에는 綠波, 남경에는 學衡, 일본에는 창조사 등이 있었다.

   모순의 통계에 따르면, 1922년에서 1925년의 4년간 나온 문학사단과 간행물은 백 여 종을 웃돌았다. 1925년 이후 문학사단은 여전히 계속 증가하여 그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은 태양사, 중국좌익작가연맹, 현대파, 논어파, 중국시가회, 칠월파, 중화전국문예계抗敵협회, 戰國, 文聚, 연안신시가회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좌익작가연맹과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는 사단 혹은 분회를 조직하여 한 방면에서의 통일된 조직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의 사단은 제1차 국내혁명, 항일전쟁, 해방전쟁시기를 뛰어넘었으며 성원은 전국 각지에 퍼져있으며 간행물을 창간하여 작품을 쓰면서 현대문학의 주요내용을 구성하였다. 19497전국문련이 탄생하고 문학 등 부문협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현대문학사단은 역사적 사명을 마치고 자동으로 해산되었다. 현대문학은 ·로부터 신 중국 성립까지 30년 동안 전에 없이 무수한 사단이 성립되는 것을 통해 현대문학의 예술의 전당을 형성해왔다. 이는 현대문학의 독특한 현상이자 특징 중의 하나이다.

 

    2.1.1. 문학사단의 탄생과 역할

 

   이렇게 중국의 문인은 사단을 중심으로 문학조직을 만들어 문학 활동과 관련한 문학논쟁을 이끌어 나갔다.

   문학사단이 형성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적 혼란과 문인의 역할: 중국 현대문학 형성 시기는 내전, 항일전쟁 등 사회변동이 극심하여 당시 문인들은 국가, 민족의 운명, 경제위기 등을 통감하게 된다. 이로써 지식인(문인)은 글을 통해 투쟁하거나 조직을 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문학발전의 길을 탐색하거나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모아 투쟁하는 등의 방식을 취한다. 이 점이 문학사단의 탄생과 활동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둘째, 문학의 사회적 기능: 20년대 문학연구회 성립 초기에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으며, 30년대 중국좌익작가연맹이 출현하면서 무산계급혁명문학이 탄생하고 그 후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가 탄생하면서 문예계의 항일민족통일전선 형성된다. 이로써 당시 대부분의 사단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 강조하게 된다. 셋째, 신문학 건설의 필요: 1917년 발기한 문학혁명의 임무는 신문학을 제창하고 구 문학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1920년 북양정부 교육부가 백화를 국어로 삼는 것을 승인한 이래 신청년, 신조등의 간행물이 출판되었으며 노신, 곽말약, 주작인 등의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대중성과 전문성을 고려한 문학사단 탄생하였고 이는 사회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렇듯 혁명과 항일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문학을 투쟁의 무기로 간주하여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화하고, 집단적인 힘과 활동을 위해 조직(사단)을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문학관련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문학사단은 다음과 같은 조직의 특징과 문학적 기능을 가진다.

   첫째, 중국현대문학은 투쟁 속에서 발전하여 사단이라는 문인조직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구국, 항일운동을 펼침(: 좌련과 국민당의 文網)으로써 집단적·조직적 힘을 발휘한다. 둘째, ‘사단-작가-작품-간행물이라는 사단 문학의 형태를 형성함으로써 각 사단이 추구하는 창작실천의 요구에 맞는 작품과 작가를 배양한다. 셋째, 문학사단은 성립초기에 각각의 사상적 주장과 예술적 추구를 표방함으로 인해 사단 내부 또는 사단간의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는 2-30년대 현대문학의 역정을 관통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문학발전의 촉진제이자 이론적 무기가 되어 논쟁과 사조·유파 및 문예이론의 형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예를 들어, 사단 내부 또는 사단 간 筆戰5): 창조사와 문학연구회의 창작방법 등에 관한 논쟁6)/ 좌련의 자유인’ ‘第三種人논쟁, ‘논어파’ ‘京派이론가의 논쟁/ 좌련의 문학의 대중화에 대한 토론, 문협의 민족형식문제, 현실주의와 주관문제 등에 대한 논쟁 등이 그러하다.

   문학 사단은 논쟁 속에서 발전하였는데, 논쟁이 문학창작에 영향을 미치거나 반대로 창작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문학사단은 성립초기에 각각 일정한 사상과 예술적 이상이 있었다. 서로 다른 주장과 이상을 가진 사단 사이에 왕왕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쟁은 신문학의 첫 번째 10년간 가장 두드러졌다. 사단 내부에도 일부 논쟁이 탄생하였는데 이러한 논쟁과 토론은 전체 현대문학의 역정을 관통하고 있다. 논쟁은 문학발전의 촉진제이자 문학의 길에서 반드시 사용되는 이론적 무기이다. 따라서 사단은 중국현대문학의 일대 공헌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창조사와 문학연구회는 창작방법 등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창조사 성원은 우리 內心의 요구에 따라 문학 활동에 종사한다.”고 하며, 문학연구회는 재료에 있어서 정밀하고 엄정함을 가장 중시하며, 반드시 충실하게 묘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낭만주의와 현실주의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다. 구성원들은 분분히 이 둘의 창작방법의 우열에 대해 문장을 발표하고 나아가 창작방법이론의 깊이와 이 두 방법의 지도하에 문학창작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좌련의 자유인’ ‘第三種人’ ‘논어파’ ‘京派이론가의 논쟁도 이에 속한다. 논쟁을 통해 무산계급 혁명문학의 발전 방향은 더욱 선명해졌고 창작도 추동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단내부의 논쟁 중, 좌련의 문학의 대중화문제에 대한 토론, 문협의 민족형식문제, 가송과 폭로문제, 현실주의와 주관문제 등에 대한 논쟁은 모두 당시 문학문제를 겨냥하여 진행된 것으로 문학창작에 도움이 되었다. 넷째, 결국 문학 사단은 사조·유파 및 간행물과 공생한다. 예를 들어, 중국현대문학사단은 대부분은 간행물, 신문, 총서 등 출판과 공생하며, 현대문학 간행물의 발전, 신문 副刊의 흥성과 문학사단의 발전관계는 서로 공생한다. 또한 사단과 유파는 간행물 편집의 정치경향과 미학관념 및 문학주장이 반영된 자신들만의 풍격과 독특한 유파의 계보를 형성하였다.7) 다섯째, 문학사단의 조직은 분회와 통합을 거듭하면서 일부 사단은 각 지역마다 문학사단의 분회를 둠으로써 작가의 연합과 문학사단의 통일적 추세를 가져온다.8)

   문학사단은 문학작품창작을 그 중심적 임무로 한다. 사단이 이론이 탄탄하고 구성원이 많고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훌륭한 작품이 없다면 그 사단의 앞날은 막막하며 문학사상 이렇다한 자리로 설 수 없다. 문학연구회, 창조사, 신월사, 어사사, 남국사, 중국좌익작가연맹,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 중국시가회, 칠월 등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문학사상에 기술되고 있는 사단은 그 구성원들이 높은 수준의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이며 이로써 중국현대문학사의 기본 골격을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신, 모순, 섭성도, 빙심, 주자청, 심종문, 李廣田 등 저명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사단의 간행물에 발표되었으니, 사단문학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작품창작이 문학사단의 본 업무라면 작가배양은 문학사단의 역할이다. 작가들의 창작실천의 요구와 특수한 성장과정이 문학사단에 부여되었다. 좌련의 기본 구성원은 당시 창조사, 태양사, 및 기타 사단의 구성원이다. 칠월사의 중심인물이었던 호풍은 좌련이 배출한 청년시인이다. 칠월사의 주요 구성원인 魯黎, 綠原, 冀訪, 阿垅, 曾卓, 蘆甸, 孫鈿, 方然, 牛漢, 鄭恩, 社谷 등은 처음 문단에 오른 작가들로서 사단의 도움으로 성장한 시인들이다.

 

    2.1.2. 유파형성

 

   현대사단과 유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모모 사단을 모모파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어, 어사파, 칠월파 등이다. 따라서 현대문학유파를 연구할 때는 사단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어떤 유파도 사단의 모습으로 출현한 적이 없으며 사단도 유파를 형성한 적이 없다. 그러나 문학적 성취가 비교적 높은 사단은 왕왕 어떤 유파를 형성하였다. 문학연구회는 문학혁명 전기 노신 등의 현실주의를 계승하여 유파를 형성하였고, 창조사는 현대문단의 낭만주의 유파를 열었다.

   20년대 초, 중기의 문학사단은 현실주의에 가까워 문학연구회 쪽에 놓였고, 어떤 사단은 낭만주의에 경도되어 창조사 쪽에 치우치기도 하였다. 현실주의 기치 하에 놓인 사단은 어사사, 미명사 등이 있고, 낭만주의의 기치 하에 놓인 사단으로는 南國, 彌灑사 등이 있다. 이후 창조사의 전향에 따라 낭만주의 문학도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의 태양사, 중국시가회, 칠월 등은 모두 현실주의 유파들이다.

   이 밖에도 현대주의도 중국현대문학사를 관통하고 있는 유파이다. 이 유파는 新月사에서 시작하여 現代사가 계승하고 文聚 등 서남연연대사단이 뒤를 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창작방법으로 모든 유파를 개괄할 수는 없으며 직접적으로 사단명칭 혹은 사단의 특징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어사사, 신격률시파, 호반시파, 논어파, 무산계급혁명문학파, 칠월파 등이 그러하다. 이것이 좀 더 정확하고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사단이 적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은 자연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학사에서 단지 남사시인이라고 불렀지 남사파라고 부르지 않는다.

 

    2.1.3. 간행물

 

   중국현대문학사단은 모두 자신들의 무대가 있다. 대부분은 간행물과 신문을 창간하며 소수는 다른 사람들의 신문과 간행물을 이용하며, 일부 사단은 총서를 편집 출판하였다.9) 근대 외국의 선진적 인쇄술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신문과 간행물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전통적 관념과 편집출판이 곤란한 원인 등으로 인해 근대문학사단 즉 남사는 단지 총서만 편집하였고 신문이나 간행물을 창간하지는 않았다. 현대문학사단은 거의 간행물, 신문과 공생하였다. 어떤 사단은 먼저 신문잡지간행물의 필요에 따라 성립하였고, 어떤 사단은 성립 초기 신문잡지간행물을 만들 계획을 마련해 놓았고 어떤 사단은 성립 후 다시 모 신문잡지 등과 연계를 가졌다. 결국 사단은 신문잡지간행물과 함께 한다. 이로 볼 때 현대문학간행물의 발전, 신문 副刊의 흥성과 문학사단의 발전관계는 아주 중대하다. 사단은 자신들의 무대가 있으며, 간행물 편집의 정치경향과 미학관념의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자신의 말과 표현방식에 따르므로 자신들만의 풍격을 지니며 독특한 유파를 지닌다. 따라서 유파는 문학 간행물이 라는 무대 위에서 성장한 것이다.

   ‘기자 문인및 그들의 창의적이고 독특한 무역항 문학 간행물의 유행은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현상이다. 일찍이 현대 백화문(白話文) 문학이 문학혁명과 함께 등장하기 전에 이미 반()현대화된 대중문학이 신문업을 거쳐 무역항의 문학계로 숨어든 것이다. 신문에 포함되는 혹은 독립적인 문학 부간이 대폭 증가했고, 독자층도 끊임없이 확대되어 ‘54’ 시기에 신문학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위한 시장을 제공하였다. 더욱이 이들 무역항의 기자 문인은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새로운 업종을 만들었다. 그들의 사업적 성공은 문학에 종사하는 것을 하나의 직업으로 삼는 것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익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다시 말해 문인은 이익을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숭고한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으며, 그들을 기다리는 ‘54’ 계승자가 있었다.

   진독수가 새로운 잡지를 지원해 달라고 상해의 출판업자들을 설득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문학 부간은 여전히 기자 문인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민국 건립 후 처음 10년 동안 그들이 쓴, 가장 유행하였던 대중문학은 사회 정치의 개량주의 분위기 속에 훗날 원앙호접(鴛鴦胡蝶)토요일(禮拜六)라 불린 소설로 퇴화되었다.10) 상해의 3대 주요 잡지, 신보, 신문보시보의 문학 부간은 모두 주수견(周瘦鵑), 장한수(張恨水), 엄독학(嚴獨鶴), 서침아(徐枕亞)와 포천소(包天笑) 등의 원앙호접파 문인이 편집을 주관했다. 그들의 재자가인(才子佳人)’식의 스토리는 탐정소설, 가짜 번역 및 기타 기자 문인에게서 나온 애정(哀情) 소설과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다퉈야 했고, 이들 애정(哀情) 소설을 등재하는 잡지로는 월월소설(月月小說), 소설림(小說林), 소설세계(小說世界), 수상소설(繡像小說)소설시보(小說時報)등 반()학잡지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발행량이 매우 많았는데 이들처럼 안정적인 지위를 누리는 간행물과 경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11)

   《신청년신문학을 소리 높여 부르짖음에 따라 작가들은 더욱 다양한 통로를 통해 글을 써야 했다. 주로 세 개의 신문에서 탄탄한 바탕을 찾을 수 있었다. 상해에서 국민당의 국민일보는 다른 문학 부간인 각오(覺悟)를 통해 그들을 지원했다.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중국 현대 시인 유대백(劉大白)이 바로 이 부간에서 처음으로 그의 반백화 애정시를 시도하였다.12) 다른 유명한 투고자로는 채원배(蔡元培), 호적, 주작인(周作人), 노신(魯迅), 곽말약(郭沫若), 존듀이(John Dewey)와 러셀(Bertrand Russell)이 있다.13) 동시에 신문학은 학등(學燈)에서 또 다른 발표 경로를 탐색하였다. 1918년에 창간된 학등시사신보(時事新報)의 문학 부간이자 양계초의 제자로 구성된 연구계의 대변인이었다. 1대 편집장 종백화(宗白華)는 서신 교류를 통해 곽말약과 좋은 벗이 되었고, 또한 곽말약이 보내온 모든 시를 실어 그를 전국적인 유명인이 되게 했다. 욱달부(郁達夫)의 초기 작품인 은회색 죽음(銀灰色的死)이 처음 연재된 곳도 학등이었다. 1921시사신보는 또 다른 문학잡지인 문학순간(文學旬刊)부간을 다시 발행했는데 편집장은 정진탁(鄭振鐸)이었고, 주요 투고자는 새롭게 성립된 문학연구회회원들이었다. 이처럼 문학연구회와 창조사라는 1920년대 가장 중요한 두 문학 조직의 초기 엘리트는 모두 양계초가 세운 이 강대한 출판기관이 키워냈다고 할 수 있겠다.

   신문학의 세 번째 투사는 북경의 신보(晨報)이다. 신보의 문학 부간은 손복원(孫伏園)의 노력 덕분이다.14) 그는 선교사 같은 열정을 품고 북경의 새로운 작가의 작품, 특히 주씨 형제 즉 노신(주수인 周樹人)과 주작인의 작품을 널리 알렸다. 노신의 Q정전(Q正傳)이 처음으로 연재된 곳이 바로 이 신보이다. 1923, 다른 편집자가 인쇄를 넘기기 전에 손복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노신의 풍자시 나의 실연(我的失戀)을 빼버리자 분노하여 사직을 했다.15) 그 후 서지마(徐志摩)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1925년에는 새로운 정점에 도달하기까지 했다. 신보를 떠난 후 손복원은 북경 경보(京報)의 문학 부간을 주관하고 곧이어 이를 새로운 신문학의 보루로 변모시켰다.

   이 세 신문이 길을 열어준 덕에 다른 간행물은 금세 그 뒤를 이을 수 있었다. 신문학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수많은 문학 부간과 잡지가 창간되었다. 周策縱1915년에서 1923년까지의 587권의 정기 간행물을 포함하는 목록을 편찬했다. 개중 최소 1/3이 문학 혹은 반()문학 간행물이었다.16) 또 다른 목록은 1919~1927년 사이에 출판된 641개 주간(周刊)의 명칭을 나열했다. 개중 1/3 혹은 1/4 정도가 본질적으로는 문학 간행물이다.17) 대략 1927년부터 1927년까지의 세 번째 순수문학 정기 간행물의 목록에는 총 284종 정기 간행물을 기록했다.18) 비교적 후기인 1935년에 편찬된 목록은 상해에만 70종이 넘는 문학 정기 간행물이 있음을 드러낸다.19) 마지막으로 또 다른 연구 방향에서 편찬된 1919년부터 1927년 사이의 문학 정기 간행물의 목록에는 출판된 상세 자료를 포함한 104종을 기록했다.20) 이렇게 이미 세상에 선을 보인 다른 간행물만 해도 토요일파 문인의 손에서 뺏어와 신문학을 위해 기여하도록 전환시킨 것이다. 예컨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된 소설월보(小說月報)는 본래 원앙호접파 소설의 든든한 근거지였으나 1921년에 문학연구회에 의해 관리되면서 가장 유행하는 신문학 잡지가 되었다. 신보의 문학 부간인 자유담(自由談)역시 유사한 변화를 거쳤다.

 

2.2. 30년대 좌익작가연맹

 

    30년대에 형성된 좌익작가연맹은 문학사단의 교량적 역할(49년을 전후로 문련, 작협으로 통일)을 하며, 대략 개혁개방 이전까지의 중국문학의 대 주류인 좌익문학의 혈맥을 제공한 문학조직이다. 192910월 좌익작가연맹준비 모임이 비밀리 열리는데 여기에 潘漢年, 馮雪峰, 夏衍, 陽漢生, 錢行邨, 馮乃超, 彭康, 柔石, 洪靈費, 蔣光慈, 戴平萬 11명이 참가한다. 의제는 좌련발기인 명단 선정과 좌련 강령의 기초를 세운다. 12명 준비위원회위원가 선정(창조사의 鄭伯奇, 馮乃超, 陽漢生, 彭康 4명과 태양사의 錢行邨 蔣光慈, 洪靈費, 戴平萬 4명 및 노신, 馮雪峰, 柔石, 夏衍 4)되면서 좌련 조직에 박차를 가한다. 그 후 정식으로 193032일 상해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이 탄생한다. 종파주의적, 집단주의적이라는 선천적 약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중국문학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문인집단이었다. 분회가 설립되면서 문화계 영역에서도 劇聯, 影聯, 美聯, 사련, 기자련 등의 좌익단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된다.21)

   좌련의 구성과 지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좌련이 구성되면서 혁명문학활동이 전개된다. 이론면에서 맑스문예이론연구회를 조직하여 맑스문예사상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조직으로는 상무집행위원회(위원: 하연, 풍내초, 전행촌, 노신, 전한, 정백기, 홍령비 7(득표순), 후보위원(업무주관): 周全平, 장광자 2) 및 그 하부조직으로 비서처(대중문예위원회, 창작비평위원회, 이론연구위원회, 국제연락위원회, 편집부), 조직부, 선전부가 구성되었다. 1931년에는 행정서기를 두어 행정업무를 총괄하게 하였고 하연, 양한성, 전행촌이 黨團(당원으로 구성된 좌련 내 소조직)을 조직하고 풍내초가 초기 당단 서기를 담당하였다.

   둘째, 좌련의 간행물은 다음과 같다. 맹아월간(노신, 풍설봉 주편), 拓荒子(장광자 주편), 빨치산 巴爾底山, 세계문화, 前哨(이후 문학導報로 개명), 북두(정령 주편, 19319월 창간 19324월 정간), 십자가두(노신주편), 문학, 문학월보(야오펑쯔, 저우치잉 주편) 등이다.

   셋째, 국내외 지부는 다음과 같다.

   - 북방좌련: 193018일 북평대학 법학원 강당에서 성립대회를 열었다. 臺靜農, 李霽野, 范文瀾, 韋叢蕪, 韋素園의 지지 속에 孫席珍, 반막화(상임위원, 이후 당단 서기), 李俊民, 楊剛, 謝冰瑩, 段雪笙, 張璋, 梁冰, 劉尊棋, 鄭吟濤, 張郁棠, 楊子戒, 端木?, 陸萬美 등이 활동하였다.22)

   - 도쿄지부: 2, 30년대 중국 지식인이 일본유학을 하면서 당시 일본내 활발하던 좌익문화의 영향 아래 조직된다. 도쿄지부 결성은 휘상 가문 출신 葉以群이다. 그는 1929년 가을 일본으로 유학 와 일본무산계급과학위원회에 가입하여 나프의 성원인 아키타우자쿠(秋田雨雀), 고바야시 다키지(林多喜二) 등 일본작가들과 접촉하면서 일본 좌익문예이론과 작품 등을 번역한다. 그 후 1931년 사빙영(1931유학), 任鈞(1929 유학), 孟式鈞, 호풍(1929유학), 聶紺弩(1932 초 도피) 등 좌련 도쿄 호의 돛을 올린다. 그 후 줄줄이 귀국하고 맹식균만 남아 정지 상태에 이른다. 918 사변 후 林煥平이 도쿄에 오면서 193312월 재건된다. 회원은 林爲梁, 陳斐琴, 陳一言, 魏晉, 歐陽凡海, 맹식균, 임환평 모두 7인이다. 그 후 회원이 불어나면서 기관지 東流를 발행한다. 총서로는 陳子谷의 시집 宇宙之歌張天虛 장편소설 鐵輪/ 기관지 雜文을 내다가 이론 경시청으로 경고를 받은 후 質文으로 개명하고 新詩歌를 내기도 하는 등 문학활동을 주로 한다. 도쿄지부는 유일한 해외조직이었다.

   - 천진지부: 1932년 청련독서회 성원들은 북방 좌련의 영향을 받아 천진 좌련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발기인 王士重(청련독서회 발기인, 남개중학 학생운동 영도자)에 대한 탄압으로 길게 가지 못했다.

   - 청도좌련: 喬天華, 杜宇, 姜宏, 黃敬, 王會非 등이 발족한다. 후에 20여명으로 늘어난다. 청도좌련은 청도에 머물던 작가 沈從文, 왕통조, 臧克家 등을 民報館에 초빙하여 문학좌담회를 열기도 하였으나 활동이 길지 못했다. 1933년 좌련조직이 파괴되고 강굉 등 좌련 성원이 체포되자, 당시 책임자 교천화는 당의 명령을 받고 지부를 철수하고 潍縣 당위원회 서기가 되면서 청도좌련의 활동은 종지부를 찍는다.

   - 광주지부: 19329歐陽山은 광주에서 襲明, 草明 등과 비밀리에 廣州普羅作家同盟(광주프로작가동맹)을 결성한다. 대외적으로는 廣州文藝社로 선포한 뒤 廣州文藝를 출판한다. 1933上海社會科學聯盟 上海文總과 연락하는 데 성공한 지하당원 溫盛剛國民대학 교수 許干之가 당의 명령을 받고 광주로 돌아와 광주문예사사회과학연맹 광주분맹’, ‘좌익작가연맹 광주분맹희극공작가협회 광주분맹등의 조직을 연합하여 광주좌익문화총동맹을 결성한다. 1933년 여름 국민당 당국이 좌익단체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구양산과 교명은 체포령을 피해 상해로 떠난다. 구양산의 뒤를 이은 책임자 습명도 체포되어 희생되고, 1934년 여름 배반자의 밀고로 광주문총은 파괴되고 좌련, 사련, 극련의 일부 책임자들도 잇달아 체포된다.

 

2.3. 49년 이후 문학사단의 통일-작협과 문련의 탄생

 

   周揚19491차 전국문학예술가대표대회(약칭 '문대회')에서 해방구 문예사업의 경험을 종합 정리 할 때 사상지도 이외에 반드시 문예사업에 대한 조직적 지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곽말약은 대회의 종합보고에서 전문적으로 문화예술 부문을 관리하는조직기구를 속히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대 중국에서 문예에 대한 국가의 지도와 통제는 주로 문화와 선전의 지도부를 통해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도와 통제의 구체적인 실행 기구는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전국 문련’)중국작가협회등의 조직으로 형성되었다.

   1949년 이전의 문학단체와 작가들의 조직은 대부분 작가들의 자의에 따른 원칙에 의해 조직된 동인 성격의 단체였다. 이 단체들은 작가 간의 예술 교류를 강화하기 위해 혹은 작가의 권익을 보장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중국좌익작가연맹 같은 조직은 이미 작가의 창작노선(사상과 예술)에 대해 극도로 규범을 가하는 상태였으며, 50년대 중국 문련과 작가 협회의 최초의 모델이 되었다.

   중국 문련은 19497월에 창립되었다. 원래 명칭은 중화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였는데 19539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여기서는 단체 회원제를 채택하여 중국 문예의 각종 협회[: 작가협회, 음악협회, 희곡작가협회, 미술가 협회 등]를 그 회원으로 하였다. 50-60년대 문련의 주석은 곽말약이다.

    중국 작가협회는 19497월 창립 시 중화전국문학공작자협회라는 명칭을 썼으나 19539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23) 이는 기타 협회와 같은 등급에 해당하는 조직이었으나 50-60년대의 작가와 예술가 단체 중에서 사실상 가장 막강한 존재였다. 나중에는 각 성과 자치구, 직할시에 잇달아 분회를 세웠다. 중국작가협회 규정에는 이 기구의 성격을 중국 작가가 자원해서 만들어진 군중 단체라고 명기해 놓았지만 실제상황은 이에 부합되지 않았다. 작가들 간의 예술교류, 창작활동, 생활 등을 협조하고 조직하며 권익을 보장해주는 역할도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이는 중국 작가의 문학 활동을 정치와 예술방면에서 지도, 통제하는 기구였다. 중국 작가협회는 중국 공산당 선전부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창립 때부터 문화혁명이 끝날 때까지 중국 작가협회의 역대 주석은 모순이었고, 부주석은 주양, 파금이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지도권은 중앙 선전부 및 중국 작가 협회의 당 조직’(중국 공산당이 정부의 각 부문과 각 인민단체에 설립해 놓은 조직은 각 부문에서 지도의 핵심이었다)에 있었다. 50-60년대 중국작가협회 당 조직성원으로는 주양, 邵筌麟, 林黙涵, 劉白羽 등이 있었다.

   중국 문련과 중국작가협회는 모택동의 직접적인 개입 아래 일련의 비판투쟁과 문학운동을 일으키고 지도했으며, 각 시기마다 작가가 창작에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사상 예술의 노선을 제시하였다. 중국작협은 문예보, 인민문학, 詩刊, 관찰, 민족문학등의 잡지를 발간했으며, 그 중 문예보1950-60년대에 문예방침과 정책을 발표하는 권위 있는 기간물이었다.

   중국문련과 작협은 50-60년대 관방을 대표하여 작가와 작품 혹은 예술 문제에 대해 결의문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결론적인 판결을 내리곤 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40년대 스탈린-츠다노프가 소련문예계를 제어하던 유산을 계승한 것이다.24) 1954118, 중국 문련과 작협 주석단의 연석회의가 만들어낸 <關於문예보결의>, 19555월에 상술한 기구들이 만들어낸 호풍 문제에 대한 결의, 같은 해 문련과 작협의 당 조직이 정령과 진기하의 反黨소집단문제에 대해 내린 결의(이러한 결의는 당시와 그 후에도 공개된 적이 없음) 등은 모두 유명한 사례들이었다.

 

  작가협회 조직과 인물의 역사적 변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도(차수)

주요 상황

195310(1)

이사회:88. 주석:茅盾 부주석:周揚, 丁玲, 巴金, 柯仲平, 老捨, 馮雪峰, 邵荃麟 書記:周揚 副書記:邵荃麟, 劉白羽(554월 보충) 秘書長:陳白塵/ 中國民主同盟 지부설립/ 58反右투쟁으로 丁玲, 馮雪峰副主席 직무 해제

19607(2)

이사회:118. 주석:茅盾 부주석:劉白羽 비서장:張僖/ 기구개편으로 간행물, 출판사의 운영정지(60)/文藝報, 人民文學만 남음(62~‘文革)/ 書記:劉白羽 副書記:嚴文井, 張光年(65)

1966-1976

주석:茅盾/ 중국작협 및 소속간행물업무 마비/ 中宣部 工作組설립(66.6)/ 노동자, 解放軍 毛澤東 사상 宣傳隊투입(69.1)

197911(3)

 

이사회:142. 주석:茅盾 제일부주석:파금 부주석:丁玲, 馮至, 馮牧, 艾青, 劉白羽, 沙汀, 李季, 張光年, 陳荒煤, 歐陽山, 賀敬之, 鐵衣甫江/ 中央書記處의 비준을 받아 中華全國總工會, 共青團中央, 全國婦聯, 全國文聯과 동급 단위로 회복(82.5)/ 協創作研究室, 中國現代文學館, 小説選刊,民族文學,中國作家, 中外文化出版公司 등 창설창간(1984.9)

198412(4)

 

이사회:236(85.1) 주석:巴金 상무부주석:王蒙 부주석:丁玲, 馮至, 馮牧, 艾青, 劉賓雁(1987년 해직), 沙汀, 陸文夫, 張光年, 陳荒煤, 鐵衣甫江/ 局級기구 19(作協服務中心[85.9], 中華文學基金會[86.6] 창립)

198912(5)

 

주석:파금 당조서기:馬烽 부서기:瑪拉沁夫/ 局級기구:新觀察, 小説選刊, 中外文化出版公司 폐지/ 局級 16개 기구 개편

19949

(6)

주석:파금 당조서기:翟泰豊 부서기:陳昌本, 王巨才(95.7)

200611(7)

주석:鐵凝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혁기간에는 작협 등 소속 간행물들이 중단되었다가 문혁 이후 80년대 다시 회복되었으며, 새로운 조직체계를 재구성하여 작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80년대 중반에 작가체제개혁이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초빙방식을 통한 계약제 방식이다. 기본 월급은 작협이 주고 의료, 주택, 직위 등은 원래 단위(單位)에서 책임지는 방식이이다. 계약 기간 2년이 지나면 재계약이 가능하지만 만약 비준을 얻지 못하면 원래 단위로 귀속한다. 그러나 1992년 이후 국가경제체제개혁이 가속화되면서 계약제의 저임금과 낮은 대우 및 계약만료 후 실직의 위험 등의 문제로 인해 계약제 작가들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시기까지 문학의 지식체계를 담당한 조직기관은 국가기구의 선전부, 교육부, 출판물 심사기관 등이었고 생산자는 관방문학지식인이었다. 이는 기존의 중국 문학은 국가의 제도화된 문학이었고 국가는 문학을 생산하는 조직체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련’, ‘문협을 거쳐 현재 작협’, ‘문련은 문학생산자인 작가들의 조직으로서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통일된 반 관방 문학생산조직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체제는 90년대 이후 민간 형태의 문학사단이 출현하고 또 문련이나 작협의 조직에서 벗어난 작가나 문학종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으며, 현재 기존의 통일적인 관방 조직으로부터 벗어나 문화시장의 형성에 일익을 하고 있다.

  

 

2.4. 49년 이전까지의 문학사단 상황표(첨부파일-엑셀 참고)

 

 

주석:

   

1) 이로 인해 좌익문학계 내부의 모순이 점차 전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화 우쉰전에 대한 비판과 위핑붜, 후스에 대한 비판이 자유주의작가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노력이긴 했어도, 그러나 이 두 차례 투쟁의 초점은 사실 비판받은 대상 자체였다기보다는, 혁명 문예계 내부에서 자산계급으로 투항하려는’ ‘사상 혼란의 경향을 겨누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2) 문학사단은 20-40년대 문학 논쟁의 주요 온상이었다. 배경 설명으로 먼저 전반적인 문학사단의 상황을 살펴본다.

3)《中國現代文學社團流派辭典(范泉 主編, 상해서점, 1993)에 따르면 크게 1,082개 성립되었다고 한다.

4) 중국작가협회(‘중국작협으로 간칭)1947년 설립된 중화전국문학공작자협회의 전신으로 1953중국작가협회로 개명하였다. 중국작협은 중앙 일급 전국성전문위원회로서 최고권력기구는 전국대표대회(‘회원대표위원회’)이며, 5년마다 1차례씩 대회를 개최하여 전국위원회(‘이사회’)를 선출한다. 현재 단체회원(감숙성작가협회) 37, 주관 사단(중국보고문학학회 등) 18, 전공위원회(소설창작위원회 등) 11, 문학상(노신문학상 등) 5, 주관 출판물(문예보) 9, 개인회원 6,128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작협의 주석은 鐵凝이며, 13명의 부주석이 있다.

5) 후기 창조사와 태양사의 무산계급혁명문학에 관한 논쟁이다. 또 좌련 내부에서는 두개의 구호의 논쟁이 그러하다.

6) 창조사 성원은 內心의 요구에 따라 문학 활동에 종사한다.”라고 주장하고, 문학연구회는 재료에 있어서 정밀하고 엄정함을 가장 중시하며, 반드시 충실하게 묘사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문학사조와 유파를 형성하게 되며 결국 낭만주의와 현실주의 분야가 탄생한다.

7) 문학연구회는 대체로 현실주의 유파를 형성하였고 창조사는 낭만주의 유파를 열었다. 20년대 초중기의 문학사단은 현실주의에 가까운 문학연구회 쪽에 놓이거나 낭만주의에 경도되어 창조사 쪽에 치우친 것도 있다. 전자에 가까운 사단은 語絲社, 未名社 등이 있고 후자에 가까운 사단으로는 南國社, 彌灑社 등이 있다. 후기 창조사의 전향에 따라 낭만주의 문학이 끝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의 태양사, 중국시가회, 칠월사 등은 모두 현실주의 유파들이다. 이 밖에도 현대주의도 중국현대문학사를 관통하고 있는 유파 중의 하나로서 新月社에서 시작하여 現代社로 계승하고 文聚 등 서남연대사단이 이를 이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창작방법으로 모든 유파를 개괄할 수는 없으므로 사단 명칭 혹은 사단의 특징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신격률시파, 호반시파, 논어파, 무산계급혁명문학파, 칠월파 등이 그러하다. 이는 유파와 사단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8) 중국현대문학사단이 처음 통일을 이룬 것은 중국좌익작가연맹이다. ‘좌련은 창조사와 태양사의 기본성원들이 연합하여 구성된 것이지만 실제로 상해좌익문예공작자의 공동조직의 작가연맹이다. 그 구성원이 두 사단 외에도 노신, 모순 등 前期 작가 및 柔石, 張天翼 등 일부 청년작가들을 포함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현대문학사단이 2차로 통일한 것은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의 성립이다. ‘문협國統區에서 항일을 펼친 문예공작자 연합체로 서로 다른 당파, 사단, 유파의 문예공작자로 조성된 연합전선이다. 좌련에 비해 범위가 더 광범위하지만 국통구에 한정되어 있다. 19497월 중화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가 북평에서 개최되면서 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 및 그 하부조직인 전국문학공작자협회가 탄생한다. ‘전국문련이 조직됨으로써 국통구와 해방구 양대 지역이 함께 회합하여 중국문예계의 대통일을 이루었으며 이 때 중국현대문학사상의 사단은 전부 자동으로 해산되었다. 좌련의 통일은 단지 地區性 통일이었고 문협의 통일은 地域性 통일로 확대되었으며 전국문련의 통일이야말로 全國性 통일이었다. 이것이 분산에서 통일로 걸어온 현대문학사단의 路程이다.

9) 이구범 <문학계의 등장>을 토대로 정리함(20세기 중국지식인을 말하다, 2011).

10) 이 명칭은 주수견(周瘦鵑)이 창간한 토요일(禮拜六)이라는 잡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잡지는 가벼운 소설과 중요하지 않은 글을 부르짖으며(주책종周策縱 , 오사운동사(五四運動史), 284) 극장과 영화의 유명 여배우, 사교계의 꽃 및 패션모델의 사진을 실어 독자를 끌어들였다. 애정소설의 주제는 통상적으로 창백하고, 폐병을 가진 재자(才子)가 매력적이지만 학대 받는 가희(歌姬) 혹은 곤경에 빠진 가인(佳人)을 사랑하게 되는 감상적인 연인의 시련과 고난을 중심으로 한다. 호적은 이들 이야기의 전형적인 공식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어느 날, 씩씩한 청년이 유원지로 놀러간다. 한 여자를 발견하고 눈여겨 바라보다가 여자가 매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여자는 고의로 손수건을 땅에 떨어뜨리고, 청년은 이를 주워 집으로 돌아온다. 밤이고 낮이고 여자를 그리워하던 청년은 앓아눕고 만다.” 신문학 진영의 평론가는 문언 혹은 반백화문으로 쓰인 소설에 원앙호접파라는 꼬리표를 붙여주었다. 그들의 비판에도 토요일20세기 첫 30년 동안 최대 발행량을 자랑했다. 동일 유파에 속하는 다른 잡지로는 제비꽃(紫羅蘭), 홍잡지(紅雜誌), 반월(半月), 빨간 장미(紅玫瑰)및 여러 신문과 함께 증정된 문예 부간 등이 포함되며, 모두가 상해에서 출판되었다. ‘원앙호접파의 도서 목록은 위소창(魏紹昌) 편집의 鴛鴦胡蝶派硏究資料, 상해, 1962 참조.

11) 阿英, 晚淸文艺報章述略및 그의 다른 작품 晚淸小說史(香港, 重印, 1966, 2) 참조.

12) 曹聚仁, 文坛三忆, 香港, 1954, 25쪽 참조.

13) 周策縱, 五四運動硏究指引, Cambridge, Massachusetts, 1963, 128.

14) 方靑, 現代文壇百象, 香港, 1954, 25.

15) 孫福園, 從晨報副刊到京報副刊, 中國現代出版史科, 1, 223~229쪽 참조.

16) 周策縱, 五四運動硏究指引, 26~124쪽 참조.

17) 《中國現代出版史料, 1, 86~102쪽 참조.

18) 《中國新文學大系, 10, 381~8쪽 참조.

19) 胡道靜, 上海的定期刊物, 上海, 1935, 41~8쪽 참조.

20) 《中國現代文學期刊目錄, 上海, 1961, 1, 6~14쪽 참조.

21) 193032일 오후 2시 상해예술대학 1층에서 풍내초가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였꼬, 정백기는 좌련의 강령을 설명한다. 文委 서기 潘漢年<좌익작가연맹적의의及其임무>라는 논제로 발언한다, 중국자유운동대동맹의 대표자 潘漠華가 축사낭송을 한다. 노신, 팽강, 전한, 양한성이 발언하여 좌련의 강령을 통과시킨다. 오후 44명의 주석단-노신, 풍내초, 전행촌, 하연-13인의 좌련집행위원회가 결성되고 7인의 상무위원이 확정된다. 참석자는 노신, 풍설봉, 유석, 沈端先, 풍내초, 李初梨, 풍강, 장광자, 전행촌, 홍령비, 전한, 양한성 등 49명이었다.

22) 전단 살포, 시위집회조직, 반동문인 비판 등 주로 정치적 활동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북방문예, 북방문학, 문학잡지등 간행물을 편집하였다. 청화대학에서 좌련대표대회를 열어 소련의 문예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北海 五龍亭에서 공개적으로 제 1文藝茶話會를 열었으며, 이대조 영구 운송 때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노신이 북상하여 다섯 차례 강연한 베이징 5등의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23) 49-2010년 동안의 중국작가협회 회원은 분량이 너무 많아 여기에서 제시하지는 못하고, 별도의 문의가 있을 때 제시하도록 함.

24)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6814, 레닌그라드두 문학지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하여, 이 두 잡지가 조시첸코와 아흐마토바의 자산계급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작품을 실었다고 비평하였다. 그 결과 이 두 작가는 소련 작가협회에서 제명되었고, 협회 그 자신도 개조를 진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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