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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이래 중국 大學과 歷史學 학문체계의 변화

최 은진(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newsdaybox_top.gif [31호] 2011년 01월 11일 (화) 임권택 기자 lims1125@hanmail.net newsdaybox_dn.gif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역사학은 민국시기까지의 역사학을 비판하고 맑스주의 역사학을중심으로 재정립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개혁개방이래 새로운 도전을 맞게 되었다. 우선 지식생산의 기제로서 大學이 다시 부활되었고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통해 정치적 권위를 지녀왔던 역사학의 권위는 흔들리게 되었고 이는 ‘역사학 위기’로 불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시 문을 연 大學에서도 歷史學科에 지원하는 학생의 수가 적어지면서 역사학과가 死學으로 통칭되는 등 존립자체에 대한 위기의식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역사학은 대학의 역사학과를 중심으로 꾸준히 연구를 진행해 가고 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학 전공의 학생들의 수도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개혁개방 이후 ‘역사학의 위기’는 어떻게 해서 극복되게 되었던 것인가. 역사학자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이러한 위기가 해결된 것인가. 혹은 제도적 차원의 변화나 정책적 지원에 의한 극복인가 등 1990년대 이래의 역사학의 현황을 이끈 배경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중국의 대학은 1990년대 급성장하게 되며 정부의 211공정, 985공정 등 각종 정책들이 나오면서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을 만들기 위한 양적 질적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2010년 8월의 <국가중장기교육개혁과 발전규획강요>(2010-2020)의 대학정책의 핵심에서도 계속 이어졌고 그 내용은 세계일류대학의 수준으로의 향상이다. 이러한 세계일류대학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서 역사학은 대학의 발전 혹 변화와 연동되어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1980년대 역사학의 위기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논의는 기존의 기계적이고 교조적인 맑스주의 방법에 대한 깊은 회의와 반성이었다. 1988년 학술수준의 조잡함에 대한 지식인들의 스스로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된 이래 1990년대 역사학자를 포함한 지식인들은 점차 학문의 독립적 지위와 전문 영역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며 대학의 교수라는 직무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문의 제도화, 규범화에 대한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고 정비해 나갔으며 국제적인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정치적 혹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학문의 규범화, 제도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국가가 대학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하자 대학을 계획적이고 광범위하게 관리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9년 6월 <21세기를 향한 교육진흥행동계획>이라는 科敎興國 전략의 일환인 ‘대학인문사회과학중점연구기지건설계획’이 역사학의 학문연구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중점연구기지는 중점대학의 중점학과와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선정 역시 개혁개방 이전부터의 중요연구소가 근간이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여년 간 진행한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국가교육부 社科司의 설명에 의하면 기존 대학의 우수한 학과를 바탕으로 연구인원을 모아 연구과제를 시행하는 방식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과제 중심으로 학교 간, 학과 간의 자원을 종합한다는 목적, 전통적인 문과연구 방식에서 현대적인 연구방식으로 연구의 방법을 바꾼다는 것, 대학의 기존 연구관리 방식과 체제를 새롭게 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2000년에서 2004년 간 100편 이상의 논문을 낸 대학을 조사한 결과 논문의 산출도 중점대학 중점학과와 일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2000년 이래 중점대학의 중점학과를 중심으로 논문의 양적 증가와 논문을 통한 평가기제라는 대학의 연구기능이 중시되고 이는 중점학과의 지원을 통해 선도되어 나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개혁개방이래 시장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연구자원(연구비)의 분배규모가 확대되면서 연구자원의 분배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된 학술 혹 학문의 규범은 더욱 엄격해지게 되었다. 역사학도 국가가 행정적 관리를 통해 대학차원에서 연구사업의 방식으로 관여하게 되었고 역사학과가 있는 중점대학과 주요대학들의 경우 당서기와 행정관료가 여전히 운영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서 중국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1997년에서 2006년까지 역사학과의 학생수는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역사학자들의 수는 5250명(2004년 현재)까지 증가했던 것이다. 특히 1996년에서 2000년까지 고대사 재해석 작업인 하상주 단대공정,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 국가청사찬수공정 즉 청사공정 세가지가 대표적인 중국정부의 大國化 기획 공정(프로젝트)이라고 볼 때 이를 수행하는 중점연구기지와 중점학과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중점대학, 중점학과, 중점기지의 건립에 따라 역사학도 연구중심의 집단연구체제가 이루어져 갔지만 그 선정기준이 된 것은 학문성과의 우수성 즉 논문의 편수, 논문이 실린 학술지의 비중 등이었다. 실제 1990년대 중반 이후 주석, 인용 등 형식이 체계화되고 이러한 표준은 국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1998년 CSSI가 교육부와 남경대, 홍콩과기대에 의해 구축되면서 핵심간행물과 간행물 발행단위가 등급화되고 계량화된다. 역사학의 경우 26개의 잡지가 핵심간행물로 선정되어 있다. 그런데 잡지의 등급은 국가기관 혹 중점대학의 발간 잡지 등 기관의 권위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역사학의 경우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는 아직도 <歷史硏究>인 것이다.

 

한편 비중점 혹 지방의 역사학과의 경우 대학의 연구환경의 변화 속에서 역시 변화를 맞게 된다. 그것은 역사학이 주로 설립되어 있는 지방의 사범대학을 예로 볼 때 전공수업을 고수하지 못하고 학과의 명칭을 바꾸게 된다.

 

예를 들면 여행, 사회공작, 공공관리 등을 수업하는 旅遊학원, 사회발전학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나름의 자구책을 통해 역사학과가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전문적 연구인력이 확충되지 못하고 교수의 자질도 매우 낮아 전공수업의 진행도 어려워졌고 나아가 과제를 수행할 수 없으므로 역사학과는 소수의 중점대학 위주로 연구자원이 집중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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