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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건국 초기 국방 과학 기술의 발전과 성공 요인 고찰
유정원(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1999년 9월 18일 장쩌민 국가주석은 건국 50주년을 맞이하여 “양탄일성(兩彈一星)” 공훈자 23인을 선정하여 표창하였다. 양탄일성이란 1964년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개발하고, 1970년에는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중국 건국 초기 국방 과학 부문의 성과를 지칭하는 말이다. 건국 초기 중국의 과학·기술 인프라는 매우 척박한 수준이었다. 1949년 사회 과학자를 포함하여 전문 연구 인력이 650여 명에 불과했으며 1955년까지만 해도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자가 9000여 명에 그칠 뿐이었다. 건국 초기 과학·기술 인프라 구축이 매우 미진했던 점을 고려할 때 양탄일성의 성공은 특이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장쩌민은 표창식 자리에서 23인의 공훈자의 각고(刻苦)의 노력과 혁신정신을 특별히 칭송하며 과학·기술 분야 인재 양성에 앞으로 더욱 매진해야 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에 본문에서는 양탄일성 성공을 되짚어 보면서 건국 초기 중국 국방 과학 기술 발전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양탄일성의 성공은 우수한 중국 과학·기술 인재에 의해 수행되었다.
[표] 양탄일성 공훈자 23인
성명 |
출생 |
대학 |
전공 |
학위 대학(국명) |
전공 |
체류 기간 |
학위 |
왕대형(王大珩) |
1915 |
청화대학 |
물리학 |
런던 임페리얼 컬리지(영국) |
응용광자학 |
1936-1948 |
박사 |
왕희계(王希季) |
1921 |
서남연합대학 |
기계공학 |
버지니아 공대(미국) |
동력과 연료 |
1948-1950 |
석사 |
왕감창(王淦昌) |
1907 |
청화대학 |
물리학 |
베를린 대학(독일) |
실험물리학 |
1930-1934 |
박사 |
등가선(邓稼先) |
1924 |
서남연합대학 |
물리학 |
퍼듀대학(미국) |
물리학 |
1948-1950 |
박사 |
주광아(朱光亚) |
1924 |
서남연합대학 |
물리학 |
미시간 대학(미국) |
원자핵물리 |
1946-1950 |
박사 |
오자량(吴自良) |
1917 |
북양대학 |
항공공학 |
피치버그 카네기 공대 (미국) |
금속학 |
1943-1950 |
박사 |
진방윤(陈芳允) |
1916 |
청화대학 |
물리학 |
A.C. Cossor 연구소 근무(영국) |
1945-1948 |
학사 | |
진능관(陈能宽) |
1923 |
당산교통대학 |
채광야금공학과 |
예일대학(미국) |
물리야금학 |
1945-1955 |
박사 |
양가지(杨嘉墀) |
1919 |
상해교통대학 |
전기학과 |
하버드 대학(미국) |
물리학 |
1947-1956 |
박사 |
조구장(赵九章) |
1907 |
청화대학 |
물리학 |
베를린 대학(독일) |
기상학 |
1935-1938 |
박사 |
요동빈(姚桐斌) |
1922 |
상해교통대학 |
금속학 |
버밍햄 대학(영국) |
공업 야금학과 |
1947-1957 |
박사 |
전삼강(钱三强) |
1913 |
청화대학 |
물리학 |
파리대학(프랑스) |
물리학 |
1936-1948 |
박사 |
전학삼(钱学森) |
1911 |
상해교통대학 |
기계공학 |
MIT 공대(미국) |
항공학 |
1935-1955 |
박사 |
곽영회(郭永懷) |
1909 |
북경대학 |
물리학과 |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미국) |
압축 유체 역학 |
1940-1957 |
박사 |
도수악(屠守鄂) |
1917 |
서남연합대학 |
항공학 |
MIT 공대(미국) |
항공공학 |
1941-1945 |
석사 |
황유록(黄维禄) |
1916 |
중앙대학 |
전기학 |
런던대학 임페리얼 컬리지(영국) |
무선전기 |
1943-1947 |
석사 |
정개갑(程开甲) |
1918 |
절강대학 |
물리학 |
에든버러 대학(영국) |
물리학 |
1946-1950 |
박사 |
팽환무(彭桓武) |
1915 |
청화대학 |
물리학 |
에든버러 대학(영국) |
이론물리학 |
1938-1947 |
박사 |
손가동(孫家棟) |
1929 |
소련 주코브스키 공군 대학 |
비행기설계 |
학사 | |||
임신민(任新民) |
1915 |
중경 병공대학 |
미시건 대학(미국) |
기계공학 |
1945-1949 |
박사 | |
주광소(周光召) |
1929 |
청화대학 |
물리학 |
북경대학(중국) |
물리학 |
석사 | |
전기(錢驥) |
1917 |
중앙대학 |
물리학 |
||||
우민(于閔) |
1926 |
북경대학 |
물리학 |
북경대학(중국) |
물리학 |
석사 |
1999년 선정된 23인의 공훈자들은 대부분 1930-50년대 중국에서 초·중등 대학교육을 마치고 선진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해외 유학파이다. 이 시기 해외 유학생들은 수학과 물리 등과 같은 기초적인 학습 훈련을 받지 못하였던 유학 초기와 달리 1920-30년 대 교육제도가 한층 더 성숙되면서 기초이론부터 고급이론, 실습에 이르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을 중국에서 미리 이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양성된 중국 과학·기술 인재들은 단순하게 서양 문물을 견학하는 수준이 아닌,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연구·개발하는데 필요한 고급 지식을 유학을 전문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으며, 그 중 몇 명은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할 정도의 연구업적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전학삼은 로켓 추진체(推進體) 개발에 있어 독보적인 과학기술자였으며 같은 시기 중국에서 수학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났던 양진우(楊振宇)·이정도(李政道)는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과학·기술의 후진성이 국가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19세기 후반과 비교하여 본다면 이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과학·기술 연구 기반이 이와 같은 과학 인재의 등장처럼 드라마틱한 성장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50년대까지도 중국은 절대적인 수에 있어서 과학 기술 연구 인력과 연구자재, 실험실 등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의 등장과 함께 양탄일성의 성공을 이끈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이다.
중국 정부는 당시 냉전 시대에 직면하여 무엇보다도 국방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1954-1958년 간 소련과 기술 협정을 성사한 후, 소련의 과학 기술 전문가를 국내에 초빙하고, 중국 과학 기술 연구원을 소련에 파견하는 형식으로 소련을 통한 과학 기술 지식 습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통해 실험이나 연구를 수행할 일반 과학 기술 연구 인력도 계속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는 과학·기술 분야의 재정을 크게 늘려 국내 설비와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과학기술 예산은 1950년 백 만 위엔(약 4십 만 8천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1960년에는 십 억 위엔(약 4억 달러)까지 증가하였다. 이러한 예산은 원자력 개발과 관련한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 자재를 개발하는데 사용되어 중국 과학 기술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건국 초기 중국 국방 과학 기술 발전은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의 등장과 중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주요한 성공 요인이 되었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과학·기술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가 공조하여 성공시킨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였으며, 마찬가지로 저발전 상태에 있었던 생활환경 개선과 경공업 발전을 포기하면서 수행한 계획이었다. 이 때문에 문화 대혁명 시기 과학·기술자들은 홍위병의 비판을 받았으며 억울한 폭력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임동빈은 1968년 익명의 군중의 폭력에 의해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양탄일성 성공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비단 문화대혁명의 정치 선동적인 측면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충돌은 과학 기술의 발전 또한 사회 과정의 하나이므로 사회 구성원의 이해와 동의가 선행해야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