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14)

조회 수 3197 추천 수 0 2013.04.02 16:50:46

371. 장스자오(章士釗, 1881~1973)

 

   1881湖南省 善化縣에서 출생하였다. 민주인사, 학자, 작가, 교육가, 정치활동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일찍이 중앙문사연구관 부관장, 2,3회 전국 정협 상무위원, 3회 전국인민대표 회의 상무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청말 시기 상해에서 蘇報의 주필로 있었으며, 1911년 북경대학 교수, 북경농업학교 교장, 광동 군정부 비서장, 南北강화 남방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372. 장상링(張尚齡, 1873~1932

 

   張尚謙의 동생으로, 1902년 형과 함께 거인(舉人)에 합격하였다. 검소한 관료생활을 추구하였고 사치를 멀리하였다. 신해혁명 성공 이후, 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시를 짓고, 화훼를 가꾸며 20여 년 동안의 은거생활을 하면서 정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였다. 문장을 짓는 데 뛰어날 뿐 아니라 서법 또한 수려하였다. 저작으로는 棠棣聯吟, 詠史詩(2), 尚謙과 함께 지은 時文相助集(2), 養晦堂文集등이 있다.

 

373. 장시진(蔣錫金, 1915~2003

 

   1915江蘇 宜興에서 출생하였다. 54운동 시기, 적극적으로 학생 구망 운동에 참여하였다. 선전단을 조직하여 농촌으로 가서 선전활동을 하기도하였다. 申報·自由談, 人世間등의 매체에 시가를 발표하였으며, 當代詩刊, 中國新詩등의 간행물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1934년 상해 정풍(正風) 문학원 중문과를 조업하였다. 1938漢口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抗戰文藝부간의 주편을 맡기도 하였다. 1939江南유격전쟁에 참여하였으며, 강남 항일 의용군(신사군)에서 강남사(江南社)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47년부터 佳木斯시의 東北대학에서 교수로 강단에 섰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에는 東北사범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중국작가협회회원, 중국작가협회 吉林분회 부주석, 길림성 사회과학학회 부주석, 길림성 노신연구회 회장, 길림성 아동문학 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예이론 및 중외문학 연구를 주로 하였으며, 특히 노신 및 노신의 작품연구에 집중하였다. 그는 魯迅全集의 주 번역과 탈고 작업에 참여하였다. 1932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저작으로는 시집 黃昏星, 극본 橫山鎮등이 있다.  

 

374. 장스산(張石山, 1947~)

 

   1947山西 盂縣에서 출생하였다. 196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찰병이 되었다. 제대 후 太原으로 왔고, 소설 창작을 위하여 1978山西 작가협회에 들어갔다. 1984山西文學의 부주편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주편이 되었다. 1988년에 1급 작가가 되어 山西문학원에 들어갔다. 저작으로는 장편소설 兄弟如手足, 중편소설집 钁柄韓寶山, 單身漢的樂趣, 母系家譜, 神主牌樓, 시집 永遠的三月, 산문집 愛河之源등이 있다. 이밖에 TV 연속극도 다수 창작하였다.

 

375. 장이핑(章衣萍, 1900~1947)

 

   1900安徽 績溪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호적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북경대학에서 청강을 하였다. 1921년 북경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陶行知가 만든 교육개진사(教育改進社)에서 교육잡지의 주편을 맡았다. 또한 상해 大東서국에서 총 편집을 맡기도 하였으며, 노신이 꾸린 월간 語絲에서 원고선별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1928暨南대학 교장 비서 겸 문학과 교수로 지냈으며, 중일전쟁 이후에는 成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또한 南社와 좌익작가연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는 古廟集, 一束情書, 櫻花集를 포함하여 단편소설집, 산문집, 학술저서, 아동물, 번역서, 고적정리서 등 광범위한 장르에 걸쳐 20여 편이 있다.

 

376. 장즈징(張子靜, 1921~1997)

 

   張愛玲의 남동생이다. 아편을 피우는 아버지와 계모 밑에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공내전 이전에 中央은행 行揚분회에서 일을 하였다. 국공내전 이후에는 공산당 측에서 구시대의 노동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상해의 浦東 黃樓중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가 살던 시절의 浦東은 아주 편벽한 시골이었다. 그는 일생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했다. 1995張愛玲이 세상을 떠나자 유언대로 그녀가 남긴 인세를 그녀의 친구인 宋淇 부부에게 넘겼다. 2년 후, 그녀 역시 세상을 떠났다.

 

377. 장딩황(張定璜, 1895~1985)

 

   1895江西 南昌에서 출생하였다. 작가, 문학사가, 비평가, 번역가, 창조사의 주요 성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創造, 語絲, 現代評論등의 간행물에 실렸다. 路上신변소설(身邊小說)’을 쓴 대표적인 작가이다. 북경대학 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때, ‘문학개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수업이 작가 馮至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馮至의 연작시 歸鄉創造季刊21호에 게재된 데에도 그의 도움이 있었다. 魯迅先生은 그의 초기 노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성과물이다. 노신선생은 기존의 인물분석의 방법을 벗어버리고, 雙枰記등 문언소설과 노신 소설을 비교 분석하였다. 한편 노신과 함께 國民新報부간을 편집하기도 했다. ‘향토문학(鄉土文學)’이라는 개념은 1926년에 장딩황이 노신의 창작물을 평론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이다. 이후 향토문학이라는 단어가 중국 현대문학에서 통용하게 되었다.

 

378. 톈졘(田間, 1916~1985)

 

   본명은 童天鑒이다. 1916安徽省 無爲縣에서 출생하였다. 1933上海 光華대학 외국어과에 입학하였다. 1934년 중국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였고, 文學叢報, 新詩歌등의 편집 작업에 참여하였다. 1935년에 每周詩歌의 주편을 맡았고, 그의 처녀작 未明集을 창작출판하였다. 1936년에 동북지역 사람들의 항일 투쟁 과정을 묘사한 시집 中國牧歌를 출판하였다. 하지만 이 시집은 국민당 정부의 검열에 의해 금서가 되었고, 작가는 구속되었다. 1937년 봄, 그는 東京에 가서 일본어를 배웠다. 77 사변 후, 상해로 돌아와 항일 시가를 창작하였다. 그해 가을 팔로군 지역의 서북전지 복무단에서 전쟁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8, 延安으로 가서 문예계 동인들과 함께 가두시 운동을 펼쳤다. 이 때 지은 시 假使我們不去打仗은 전국으로 출판되어 알려졌고, 聞一多는 그를 두고 북 치는 시인(擂鼓詩人)’, ‘시대의 고수(時代的鼓手)’ 라고 하였다. 그 해 8,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0년대에 名將錄, 太原謠, 宋村紀事등을 창작하였다. 1941晉察冀변구 문협의 부주임이 되었으며, 1949년에 제1차 전국 문대회에 참가하였고, 중국작가협회 당 조직의 구성원, 창작부 부장, 문학연구실 주임, 詩刊편집 위원 등을 맡았다. 1950년에 전국 문련 연구회 주임이 되었다. 田間詩選은 한국어로 번역 되어 있다. 톈졘의 給戰鬥者, 斯大林頌, 鹿등의 시가 일본, 소련, 프랑스, 루마니아, 몽고 등 10여 개 국에 번역되어 있다.

 

379. 톈동자오(田東照)  

 

   山西 興縣에서 출생하였다. 1965山西대학 중문과를 졸업하였다. 山西대학 교지 편집원, 興縣 문화국 국장, 선전부 부부장, 呂梁지역 문련 부주석주석, 山西省 작가협회 상무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부터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였고, 1982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대학시절부터 문학을 창작하였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창작을 중단하였다가 1975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 長虹, 龍山遊擊隊, 異國情緣및 중편소설집 黃河在這兒轉了個彎, 河緣, 跑官, 단편소설28號人物, 秋天的故事, 外公등이 있다.

 

380. 쳰장춘(錢江春, 1900~1927

 

   1900江蘇省 松江縣에서 출생하였다. 1916江蘇 성립 제3중학을 졸업하였고, 杭州 之江대학을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고향 친구 朱叔建의 소개로 南京 江蘇省 의회에서 서기로 일하였다. 이듬해에 중화 기독교청년회전국협회보에서 편역을 담당하였고, 이 협회에서 발행하던 월간 青年進步의 번역 원고 선별작업을 하였다. 동시에 미국인 Wheeler가 펴낸 世界大戰與中國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자비로 출판하였다. 신문학 운동의 영향을 받아, 胡山源, 趙祖康과 함께 신문학 단체인 일미쇄사(一彌灑社, 영어 Muse의 음역)를 조직하였다. “목적없이, 예술관 없이, 토론 없이, 비평 없이, 오직 예술작품을 창조하려는 영감을 따라 발표할 것이라고 표명하며 당시 문학연구회와 창조사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후 일미쇄사는 구성원들의 변천과 함께 해산하였다. 그 역시 상무인서관의 편역인으로 들어갔으며, 沈聯璧 등과 함께 신송강사(新松江社)’를 새롭게 조직하였다. 1924侯紹裘, 趙祖康 등과 함께 江春중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松江 초급중학으로 개명하였고,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530운동 시기에는 上海교직원 구국동지회에 가입하였다.

 

381. 쳰돤셩(錢端升, 1900~1990)

 

   1900上海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北京 清華학교에 입학하였고, 19세에 미국 노스다코타주립대학의 학생으로 선발되었고, 곧 하버드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24세에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24년 귀국한 후, 북경대학 및 청화대학에서 정치학, 헌법학 강의를 하였다. 1927년 남경 中央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잡지 現代評論에 꾸준히 영사재판권 폐지 및 조계지역 반환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30년에 청화대학으로 돌아와 강의를 하였다. 천진의 益世報의 주필을 맡으며 몇 개월 사이에 170여 편의 논설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論華北大勢:兼送黃郛委員長南行이라는 시론을 발표하면서 사직을 강요받고, 다시 남경 中央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북경대학이 昆明으로 이주하는 데 따라 西南연합대학의 법학원 설립에 일조한다. 교학활동 외에도 국제 시국 및 학술연구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1947, 하버드 대학의 객좌교수로 中國政府與政治라는 강의를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설립 이후, 북경대학 법학원장, 북경 정법학원 원장, 외교학회 부회장, 세계 평화이사회 이사, 외교부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7, 우파로 몰리면서 강단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문화대혁명 종결 후에 제6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법률위원회 부주임 위원 등을 맡았다. 198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저작으로는 中國政府與政治, 戰後世界之改造, 政治與政治學등이 있고, 王世傑과 함께 지은 比較憲法, 人合과 함께 지은 資產階級憲法的反動本質》,《民國政制史등이 있다.

 

382. 쳰단후이(錢丹輝, 1919~2007)

 

   1919江蘇 金壇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 혁명 공작에 참여하였다. 晉察冀 군구 1분구 정치부 선전과 간사과장, 新華社 冀察지사 사장, 신화사 차하르(察哈爾)사 분사 부사장, 冀熱察 간행물사 사장, 신화사 冀熱察분사 사장, 冀熱察 군구 선전부 부부장, 皖南군구 선전부장, 皖南일보사 사장, 신화사 皖南분사 사장, 安徽일보사 제1부 사장, 중공 안휘성 위원회 선전부 선전처장비서장, 안휘성 문화국 국장, 안휘성 작가 협회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33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 중국 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저작으로는 시집 給自衛軍, 力量, 丹輝詩選, 시가 紅羊角, 夜過柿樹林, 五月之夜啊, 訪日詩抄, 르포르타주 挺進華北敵後方的楊支隊등이 있다.

 

383. 쳰라이수(錢來蘇, 1884~1968   

 

   1884奉天 奉化(현재의 吉林 梨樹)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갔고, 동북지역에서 輔華중학 및 吉林日報를 설립하였다. 1910년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였다. 신해혁명 시기에 遼陽 立山 마을 봉기에 참여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수감되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출옥되었다. 이수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袁世凱 반대 운동에 가담하였다. 54 운동 시기, 保定育德중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保定 학생연합회 조직을 지도하였다. 1931년 동북 3성 특별행정 장관 공서 참의가 되었다. 918사변 후, 비밀 기금원조 항일 부대원으로 활동하였다. 77사변 후, 山西에서 제2전구 사령장관부 소장 참사관으로 일하였다. 1943년에 延安으로 가서, 陝甘寧 변구 정부 참의가 되었고, 林伯渠 등과 함께 부안 시사(懷安詩社)를 조직하였다. 1947년에 保衛延安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신 중국 설립 이후 중앙 문사관(中央文史館) 관원으로 일하였다. 저서로는 孤憤草初喜集合稿, 十老詩選등이 있다.

 

384. 정쥔리(鄭君裏, 1911~1969)

 

   1911년 상해에서 출생하였다. 南國 예술학원 연극과 재학 시절부터 그의 예술 인생이 시작되었다. 1929년 여름, 南國社에서 莎東美, 卡門등의 연출을 맡았으며, 陳白塵 등과 함께 연극 반월간 摩登을 창간하였다. 1931년 좌익 연극가 연맹에 가입하였다. 동시에 摩登극사, 大道극사에 들어가 乞丐與國王, 血衣, 亂鍾등의 연극을 연출하였다. 1932년에 聯華 영화사에서 엑스트라로 활동하였고, 火山情血, 奮鬥, 大路, 新女性, 迷途的羔羊20여 편에 달하는 영화에서 주연 또는 중요 인물로 등장하였다. 또한 상해 여가 연극인 협회에서 娜拉, 大雷雨등의 작품을 연출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상해 구망 연극 3대 대장이 되었고, 1940重慶의 중국 영화 제작소에 들어가 뉴스 영화부 주임이 되었다. 이후 서북, 서남 지역에서 여러 민족이 단합하여 중일전쟁에 싸우는 것을 찍은 장편기록영화 民族萬歲를 발표하였다. 1943년 중국예술극사(中國藝術劇社)에 가입하였고, 戲劇春秋, 祖國등의 작품 연출을 맡았다. 중일전쟁 이후, 상해로 가서 곤륜(昆侖) 영화공사 각본연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50년대 이후를 그의 영화 연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魯西 농민봉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宋景詩, 중국 건국 10주년 기념 작품 林則徐, 聶耳등이 모두 그의 연출작이다.

 

385. 정민(鄭敏, 1920~)

 

   1920福建 閩侯에서 출생하였다. 1943西南 연합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2년 미국 브라운 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대학원에서 일하였다. 1960년 이후에는 북경사범대학 외국어과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쳤다. 1949년에 詩集: 1942~1947을 출판하면서 구엽(九葉)’시파의 주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馮至의 지도로 철학과 릴케의 시를 접한 이후로 이것에서 평생토록 영감을 얻었다. 특히 릴케의 시 에 각별한 애정을 표하였다. 건국 초기부터 1979년까지 그녀는 신시 창작을 중단하였다가 ‘3중전대(三中全會)’가 되어서야 다시 신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시집 心象, 尋覓集과 시 연구서 詩與哲學是近鄰, 소네트 연작시 詩人與死가 모두 이 시기에 창작한 시들이다. 詩人與死는 친구 唐祈의 죽음을 마주하고 지은 시로, 생사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고가 담겨 있다.

 

386. 딩시린(丁西林, 1893~1974

 

   본명은 丁燮林이다. 1893江蘇省 泰興縣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에 상해 교통부 공업전문학교(상해 交通대학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1914년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1920년에 귀국한 후 북경대학 물리학과 교수, 국립 중앙연구원 물리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에 처녀작 一只馬蜂을 발표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연구소의 이전을 따라 昆明으로 서천하였다. 1940년에 홍콩으로 갔다. 홍콩이 점령된 후에 홍콩을 빠져나왔지만 廣州에서 汪精衛 정부에 의해 연금되었다. 汪精衛 정부는 그에게 남경에 있는 중산대학의 교수직을 권했지만 거절하였다. 중일전쟁 종결 후 1947년 초, 물리연구소 소장을 사직하였고, 산동대학에서 교수를 맡았다. 19499월에 제1회 중국 인민정치 협상회의에 참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 2,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정치협상회의 제2,3차 전국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정무원 문화 교육 위원회 위원, 문화부 부부장, 중국 인민 대외 문화협회 부회장, 대외 문화 연락 위원회 부주임, 북경 도서관 관장, 중국 문자 개혁 위원회 부주임, 중국 연극가 협회 상무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387. 정이메이(鄭逸梅, 1895~1992)

 

   본명은 鞠願宗이다. 1895년 상해 江灣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江蘇성립 제2중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신문 잡지에 문학역사에 관한 소품을 싣기 시작하였다. 32세에 상해에서 상해 영화 공사에 들어가 원고 및 영화 설명서를 편선하였다. 남사(南社)에 가입하였다. 1913, 華光半月刊, 金剛鑽報등을 편집하였다. 1938, 상해 國華중학에서 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동시에 상해 음악 전수관, 愛群여중에서 수업을 하였다. 이후 大夏대학 부속 중학, 大同대학 부속 중학, 徐彙 중학, 志心학원, 模範중학, 誠明문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수업이 없을 때에는 글쓰기를 계속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晉元중학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부교장이 되었다. 1966년에 퇴직하였다. 1981년부터 매년 50만자의 원고를 남기며 글쓰기에 집중하였다. 주로 간결하지만 의미가 함축적인 문언으로 작문을 하였다. 만년에는 백화를 이용하여 문언을 창작하였는데, 그의 문장에는 지성과 흥미가 혼재해 있고, 아속을 넘나드는 새로운 풍격의 소품문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388. 자오왕윈(趙望雲, 1906~1977

 

   1906河北 束鹿(지금의 河北 辛集)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에 사촌 형 王西渠의 도움으로 사립 京華 미술 전문학교에서 회화를 배웠고, 국립 북경 예술 전문학교에서 중국화를 전공하였다. 1928년에 북경사범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930년 북경의 吼虹社에서 주편을 맡았다. 1932년에 상해 中華서국에서 편집인이 되었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天津大公報에서 여행기자로 활동하였다. 1934년부터 1936까지 山東, 江蘇, 浙江, 河南, 河北 등지의 농촌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난 동안 농민들이 빈곤한 생활을 했던 것을 그림에 담았다. 이러한 그림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평민화가라는 칭호를 얻게 하였다. 1935년에는 馮玉祥의 초청으로 泰山社會寫生詩畫石刻集출판에 참여하였다. 또한 중일전쟁 시기, 老舍와 함께 抗戰畫刊를 창간하였다. 이후 서남, 서북의 각지를 돌며 그림을 그렸고, 서북 지역의 풍토와 사람들의 생활상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그리며 그녀만의 독특한 풍격을 일구어냈다. 1949년 이후, 서북 미술가 협회 부주임, 陝西분회 주석, 西北 문화부 문물처 처장, 중국 미술가 협회 상무이사, 중국 미술가 협회 西安분회 주석, 陝西성 문화국 부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 손은 전통을 향하고, 다른 한 손은 생활을 향한다.”라고 주장하였으며, ‘장안화파(長安畫派)’를 창설하였다. 출판물로는 農村寫生集, 塞上寫生集, 黃河寫生冊, 林區寫生冊, 西北旅行畫集, 埃及寫生畫集, 趙望雲畫集등이 있다.

 

389. 자오신(趙新, 1939~)

 

   1959년에 阜平에서 중학 교사로 재직하였다. 1965년에 阜平 문화관원으로 일하였다. 1970년에 阜平현 위원회 선전부에서 통신간사를 맡았다. 1971년에 保定지구 문화국에서 창작원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에 保定지구 문련 부주석에 부임하였다. 1994년에 保定시 문련 부주석이 되었고, 1999년에 퇴직하였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張王李趙, 婚姻小事가 있고, 중편소설 莊稼觀點, 被開除的村莊, 河東河西, 二八月亂穿衣등이 있다.

 

390. 자오위(曹禺, 1910~1996)

 

   본명은 萬家寶이다. 1910湖北 潛江에서 출생하였다. 1933년에 清華대학 외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36년에 清華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保定중학 및 復旦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1946년 미국으로 가서 강의를 하였고, 상해문화(文華)영화공사에서 연출로 일한 바 있다. 1949년 이후에는 중앙연극학원 부원장, 북경인민예술극원 원장, 북경시 문련 주석, 중국 문련 주석, 중국연극협회 주석, 중국 작가협회 서기처 서기를 역임하였다. 1934년부터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였고, 1952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저작으로는 雷雨, 日出, 北京人, 原野, , 蛻變, , 膽劍篇, 王昭君, 明朗的天을 비롯하여 영화극본雷雨, 日出, 산문집 迎春集, 작품집 曹禺劇本選, 曹禺選集등이 있다.

 

391. 자오주캉(趙祖康, 1900~1995) 

 

   1900년 상해 松江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에 交通대학 唐山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 미국 코넬대학 대학원에서 도로 및 수리 공학을 전공하였으며, 뉴욕 교통국 도로 공정처에서 근무하였다. 1932년부터 전국 경제위원회, 도로교통위원회, 교통부 등에서 일하였다. 1949년부터 상해시 공무국장 겸 건설위원회 부주임,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江蘇浙江安徽 3성과 남경, 상해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 주축이 되었다. 전국 도로기술을 개괄하는 통일된 건설 표준을 만들었고, 성과 시를 잇는 자동차 법규도 새롭게 세웠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전선에서 군용 도로와 교량을 긴급히 수리하기도 하였다. 운남-미얀마, 중국-베트남을 잇는 국제 도로를 건설하는데 몸담기도 하였다. 저작으로는 城市築路征費法之研究, 公路定線之研究등의 논문이 있다.

 

392. 스춘통(施存統, 1898~1970

 

   1898浙江 金華에서 출생하였다. 1919浙江 성립 제1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0년 상해 공산주의 조직에 가입하였고,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최초의 구성원 가운데 한 명이다. 1922년 청년단 중앙서기로 선출되었다. 1924년 상해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中山대학, 黃埔군관학교, 廣州농민운동 강습소에서 정치경제학 강의를 하였다. 1927武昌 중앙 군사 정치학교 교관,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마르크스주의와 혁명 이론 저술 작업을 진행하였다. 일찍이 廣西대학 교수를 맡았다. 중일전쟁 시기, 문화계 구국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黃炎培, 章乃器 등과 함께 민주 건국회를 조직하였다. 1949년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회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제1회 전국 정협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후에 노동부 부부장이 되었다. 저작으로는 現代唯物論, 中國現代經濟史, 역서 資本制度淺說, 世界史綱, 社會進化論등이 있다.

 

393. 총웨이시(從維熙, 1933~)   

 

   1933河北 玉田에서 출생하였다. 18세부터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에 소설산문집 七月雨을 출판하였다. 1956년과 1957년에는 각각 단편소설집 曙光升起的早晨과 장편소설 南河春曉을 발표하였다. ()우파 시절이던 1957년 무렵, 그는 그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해 우파로 구획되어 20년 가까이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979년에야 北京 문단에 다시 복귀하였다. 중편소설 大牆下的紅玉蘭, 遠去的白帆, 風淚眼은 전국 제1, 2, 4회 중편 소설상을 수상하였다. 영화 第十個彈孔는 문화부 전국 제1회 우수 영화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총웨이시는 장편소설 北國草, 斷橋, 酒魂西行, 逃犯, 裸雪, 龜碑를 비롯하여 중편소설집 驛路折花, 雪落黃河靜無聲, 祭紅, 牽駱駝的人, 鼻子備忘錄을 출판하였다. 1995從維熙八卷文集으로 명성을 얻었다. 2000년 작가는 우파 개조 생활을 회고하며 장편기록물 走向混沌3부를 출판하였고, 사회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94. 종톈신(鍾天心, 1902~1987)

 

   1902廣東 五華에서 출생하였다. 南開중학과 북경대학을 졸업하였다. 1923년 국민당 북경 특별시당부 위원 겸 청년부장이 되었다. 黃埔 군관학교 潮州분교 정치교관 및 東路軍 총 정치부 편찬 위원, 廣州시 정부 비서를 지내기도 하였다. 改造月刊의 주편을 맡았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제네바 국제 대학원에서 학술 연구를 하였다. 귀국 후, 中山대학 교수, 입법원 입법위원, 헌법기초위원, 외교부 조약 위원, 국민당 廣東省당부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4 작전구역(戰區) 동원 위원회 비서장, 삼청단(三青團) 중앙 간사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再生, 生力, 民主世界등의 간행물을 창간하였다. 국민당 제6회 중앙 감찰 위원, 입법원 입법 위원, 행정원 정무위원 겸 수리(水利)부장 등을 맡은 바 있다. 1949년 초 국민당 정부의 파견원으로 국공회담의 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홍콩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荃灣대학의 교수를 맡았다. 1958년 대만으로 건너가 고시원 비서장, 총통부 국책 고문, 국민당 중앙당무 고문 등을 지냈다.

 

395. 주오공(左恭, 1905~1976)

 

   1905湖南 湘陰에서 출생하였다. 북경대학을 수료하였다. 193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오랜 기간 중국 공산당의 비서 생활을 하였다. 일찍이 국민당 중앙 선전부 총간사, 中山文化教育季刊의 주편, 廣州 4 작전구역 장관사령부 비서장, 국민당 정부입법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에는 국무원 문교위원회 통계처 처장, 북경도서관 부관장, 전국 제1중심 도서관 위원회 주임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전국 도서관의 시스템을 연계할 수 있도록 앞장섰다. 全國中文期刊聯合目錄, 全國西文期刊聯合目錄등의 주편을 맡은 바 있다.

 

396. 주오밍(左明, 1902~1941)

 

   본명은 廖宗岱이다. 1902陝西 南鄭에서 출생하였다. 중학 시절 팔고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함께 암암리에 新青年, 改造, 努力등의 간행물을 비롯하여 陳獨秀文學革命論등을 읽었다. 1923년 중학 재학 시절, 21개 조항에 반대하고 일본 상품 보이콧을 주장하는 시위를 하였다. 1924何挺穎 등과 상해 浦東중학에서 보충학습을 하고, 大同대학에 진학하였으며, 상해대학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같은 해, 월간 漢鍾의 부편집인으로 발탁되었다. 漢鍾월간에 致弟弟撫民的信, 秋風, 祈雨, 漢中的我, 漢中軍費之攤派등의 글을 실었다. 후에 북경 국립 예술전문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하였으며, 熊佛西의 수제자가 되었다. 1925년 중국 공산당 지하조직에서 활동을 하다가 구속되었다. 이후 상해에 돌아와서 何挺穎이 조직한 新漢社에 들어가 잡지 新漢을 편집하고 거기에 글을 기고하였다. 19261, 田漢 등의 인물들과 함께 南國 예술학원을 세웠다. 같은 해 4, 60명의 교사학생들과 함께 杭州에서 초연을 올렸다.

 

397. 저우지엔런(周建人, 1888~1984)

 

   1888浙江 紹興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두 형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간 사이, 고향에 남아 어머니를 모시고 독학을 하였다. 1905紹興僧立소학에서 교사교장을 지냈다. 이 기간에 스스로 식물생물학 공부를 하여 會稽山采物記등의 저서를 남겼다. 1909년 이후, 그의 형 노신이 조직한 각종 진보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문학단체인 월사(越社)에 들어갔다. 1919년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고, 1920년에 북경대학에서 청강으로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듬해에 상해의 상무인서관에서 편역 및 편집을 하였다. 東方雜志, 婦女雜志, 自周氏兄弟合影然科學雜志에 부녀해방을 주장하는 글을 비롯하여 그의 과학 지식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1923瞿秋白의 요청으로 상해대학에서 진화론에 관한 강의를 하였으며, 그 이후 神州대학, 暨南대학, 安徽대학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54 운동 이후에도 꾸준히 남녀평등에 관한 문제에 천착하였으며, 여성 역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지녀야한다고 주장하며 중국 부녀해방 운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1920년대에 부녀문제에 과한 다량의 글을 발표하며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宋慶齡, 蔡元培, 魯迅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인민 혁명 사업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단체를 조직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중국 공산당의 항일민족 통일전선 주장을 받아들여 항일 구망 운동을 하였다. 진보적인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반()국민당 투항 정책에 서명을 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독서회를 조직하였고, 민족해방 투쟁을 주장하였다. 중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그는 생활(生活)서점, 신지식(新知識) 서점의 편집인이 되었다. 1945馬敘倫, 王紹鏊, 許廣平, 林漢達 등과 함께 상해에서 중국민주촉진회의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이 단체의 초대 이사회 이사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중앙 인민 정부 출판 총서 부처장, 고등 교육부 부부장, 浙江省 인민정부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5412, 3회 민진 중앙 부주석 및 제4, 5회 민진 중앙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667월 대리주석 및 제 6, 7회 민진 중앙 주석을 연임하였다. 1984729일 북경에서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98. 저우겅셩(周鯁生, 1889~1971)

 

   본명은 周覽이다. 1889湖南 長沙의 가난한 교사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유학하였으며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신해혁명 시기 중국으로 귀국하여 漢口에서 民國日報를 창간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2년 皮宗石, 楊端六, 任凱南 등과 함께 漢口民國日報를 만들었다. 이듬해에 친구 楊端 6명 과 함께 漢口에서 民國日報를 창간하였다. 이들은 군벌의 횡포와 원세개 독재를 반대하였는데, 신문의 편집인이었던 그는 신문사가 강제 폐쇄됨에 따라 지명수배 인물이 되었다. 상해로 몸을 피하고 이름을 저우겅셩(周鯁生)으로 바꾸었다. 이후 영국 에든버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프랑스 파리대학으로 건너가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1년 귀국 후, 상해 상무인서관 편집소 법제 경제부 주임 및 북경대학, 東南대학 교수 겸 정치과 주임을 맡았다. 국제법 및 외교 법 연구를 진행하며 不平等條約十講과 같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8년 국립 武漢대학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미국에 한 차례 다녀 온 후, 1945년에 무한대학의 교장이 되었다. 신 중국 건립 이후에도 무한대학의 교장을 계속하는 동시에 中南 군정 위원회 위원, 문교 위원회 부주임으로도 활동하였다. 1950년부터는 교육계를 떠나 문교부 고문, 중국 인민 외교학회 부회장, 1~3회 전국인민대표회의 및 인민대표 상무위원회 법안 위원회 부주임 위원 등을 맡았다. 저우겅셩은 중국의 국제법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서 권위 있는 국제법 관련 서적을 다수 저술하였다. 國際法大綱, 現代國際法問題, 國際法新趨勢, 國際法概論, 近代歐洲外交史, 近代國際政治小史, 贏得太平洋上的和平, 現代英美國際法的思想動向, 國際法를 비롯하여 영문판 “WINNING THE PEACE IN THE PACIFIC” 등이 그가 남긴 저작이다.

 

400. 주징워(朱鏡我, 1901~1941)

 

   1901浙江省 鄞縣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형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27년 일본에서 문학 학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같은 해 상해로 돌아와 창조사(創造社)에 가입하였으며, 월간 文化批判의 주편을 맡았다. 엥겔스의 社會主義從空想到科學的發展를 번역하였는데, 이 책이 중국 최초로 출판한 엥겔스의 중문 번역서이다. 1929년 중공 중앙문화 공작위원회가 성립하였고, 문화위원회의 성원이 되었다. 또한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준비과정에 참여하였다. 1930년부터 문화위원회 서기 및 중공 江蘇省 위원회 선전부 부장이 되었다. 1938, 江西 南昌 신사군(新四軍)에서 일했으며, 중공 중앙 東南분국 선전부에서 일하며 劍報부간의 주편이 되었다. 같은 해 皖南 신사군 군부로 이동하여 정치부 선전 교육부 부장 겸 군부 간행물인 抗敵잡지의 주편으로 일하였다. 我們是戰無不勝的鐵軍라는 가사를 지었는데, 이 곡이 신사군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1941皖南사변 중, 군의 철수 과정에서 국민당 부대의 포위를 받아 목숨을 잃었다.

 

401. 저우보(周勃, 1932~)

 

   1956武漢대학 중문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略談形象思維, 論現實主義及其在社會主義時代的發展과 같은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전에 혁명에 참여하였다. 1982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대표작으로 永恒的困擾:文藝與倫理關系論綱, 文學思存集과 논문집 文藝的本源問題, 文藝的歧路100여 편이 있다.

 

402. 저우원(周文, 1907~1952)

 

   본명은 何稻玉이다. 1907四川 滎經에서 출생하였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16세에 西康군벌 부대에서 서기로 일하였다. 1932년에 혁명에 참여하여 安徽 安慶에서 좌익문화 총동맹 安徽분회 조직 부장을 맡았다. 安慶晚報부간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상해에서 좌련에 가입하여 작품을 창작하였다. 1933년에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다. 19339, 잡지 文學에 군벌들의 알력 다툼으로 민생이 피폐해진 상황을 묘사한 작품 雪地를 발표하였다. 이후 창작성과가 다양해졌고, 중단편 소설 在白森鎮, 煙苗季등 풍자의 성격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79, 成都에서 문예계통일 전선 활동을 펼치며 沙汀 등과 함께 문협 成都분회를 조직하였고, 회보 筆陣를 발간하는 데 주축이 되었다. 동시에 四川日報, 新民報부간의 편집을 맡았다. 이 시기 중편소설 救亡者를 썼다. 1940延安으로 가서, 대중독물사(大衆讀物社)를 만들고, 邊區群眾報, 大衆習作를 창간하여 문예보급 작업에 힘썼다. 1941, 陝甘寧변구 교육청장,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6重慶 新華日報의 부사장이 되었다. 1951년부터 있었던 3(三反)운동 중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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