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량스치우(梁實秋, 1902~1988)

 

   1902년 북경에서 출생이다. 자유주의 경향을 대표하는 중국 현대의 문학 비평가이다. 청화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미국 하버드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동남대학, 청도대학, 북경대학에서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28년에 문학지 신월(新月)을 창간하여 문학의 계급성을 거부하고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을 반대하였다. 후에 중경으로 내려와 중앙일보의 문화면 平明의 주간으로 일하는 한편, 국립편수관에서 초·중등학교 교재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월에 발표한 4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자산계급 정치와 문예 자유를 쟁취하는 입장에서 계급을 초월한 인성론을 제창하고 천재론(天才論)을 고취하였다. 문예와 정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무산계급문예운동을 반대하는 동시에 삼민주의 문학도 반대하였다. 그는 문학무산계급을 주장했으며 문학이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과 사상통일에 반대하고 사상의 자유를 외쳤다. 그의 이러한 문학사상은 좌익작가인 노신과 풍내초(馮乃超) 등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으며 이 기간에 노신 등 좌익작가들과의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노신으로부터 상가 집의 자산계급의 개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모택동에게는 자산계급을 위해 복무하는 대표적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27년에서 1936년까지의 논쟁은 8년이나 지속되었다. 19361019일 노신이 죽자 논쟁은 자연히 끝났지만, 이 논쟁은 후세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 대만으로 가 1988臺北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 평론집 낭만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浪漫的與古典的)(1927)을 비롯해서 문학의 기율(文學的紀律)(1928), 문예비평론(1930), 편견집(偏見集)(1934) 등이 있으며, 1950년대에 대만에서 필생의 대역인 셰익스피어 희곡전집(1967) 외에 비평집 노신에 관하여(關於魯迅), 문학인연, 양실추문학론등을 출간하였다.

 

32. 리추리(李初梨, 1900~1994)

 

   19004월 중경의 강진(江津)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5·4 운동의 영향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1925년 교토대학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전한(田漢), 성방오(成仿吾) 등과 왕래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1927년 귀국하여 좌익문학조직인 창조사에 가입하면서 후기창조사의 주요한 성원이 되었다. 공산당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직후 연안으로 가 신화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항일민족전선 선전공작과 관련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방 후에는 중공 제7·8기 대표대회 대표, 1·2기 전국인민대회 대표, 4·5기 전국정협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후 사회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물을 수집·정리·보호하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다. 문화대혁명 중에 수난을 겪었으나 찬란한 중화유물을 보호하고자 했던 염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1983년 수집해 온 서화, 탁본, 벼루, 청동기 등 568점을 중경시박물관에 기증하였다. 1994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33. 펑나이차오(馮乃超, 1901~1983)

 

   19011012일 일본 요코하마의 화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원적은 광동성 남해(南海)이다. 중국 현대의 혁명활동가, 교육가, 시인, 작가, 문예평론가이자 번역가이다. 도쿄대학 재학 시절 일본공산당에 가입하고 창조월간(創造月刊)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성방오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후기 창조사의 주요 성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창조월간(創造月刊), 문화비판(文化批判)등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그해 9월 반한년(潘漢年)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8년에 시집 홍사등(紅紗燈)을 펴냈는데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사랑을 잃은 아픔과 인생을 고뇌하는 애원이 깔린 시편들이다. 곧이어 노신 등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의 설립을 기획하였고, 193032일 좌련이 성립되자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좌련 기간에 노신과 혁명문학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2년 중공 상해지하당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자 무한으로 피신하였고, 후에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문협)의 서기를 역임하였다. 해방 이후 중앙선전부의 간부를 거쳐 광동성 당무위원, 전국정치협상위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애조를 띤 문학성과 신명을 바친 정치성과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죽음, 겨울 밤, 향수등과 희극 현장(縣長)등이 있다. 1983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34. 쟝광쯔(蔣光慈, 1901~1931)

 

   1901년 안휘성 금채(金寨)에서 출생하였다. 1920년 진독수의 소개로 상해에 가 사회청년단에 가입하였고 이듬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1924년 가을 귀국하여 상해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심택민(沈澤民) 등과 함께 춘뢰문학사(春雷文學社)를 조직하였고, 이듬해 2월에 창조사에 가입하였다. 1926년 중편소설 소년표박자(少年飄泊者)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창조사를 떠나 맹초(孟超), 전행촌(錢杏邨) 등과 혁명문학단체인 태양사(太陽社)를 설립하고 태양월간(太陽月刊), 시대문예(時代文藝), 해풍주보(海風周報)등 간행물의 편집을 담당하였다.태양월간창간호에 발표한 논문 <현대중국문학과 사회생활(現代中國文學與社會生活)>, <혁명문학에 대해(關於革命文學)>등은 창조사, 태양사와 노신 간의 일대 혁명문학논쟁에 관한 것이었다. 1929년 요양 차 일본으로 건너가 태양사 도쿄지부를 결성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노신, 유석(柔石), 풍설봉(馮雪峰) 등과 중국좌익작가연맹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303월 좌련이 설립되자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당내 노선투쟁의 결과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였다. 19318월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 포효하는 토지(咆哮了的土地),단고당(短袴黨)등이 있다.

 

35. 쳰싱춘(錢杏邨, 1900~1977)

 

   190026일 안휘성 무호시(蕪湖市)에서 태어났다. 중국 현대 문학이론비평가, 문학사가이자 작가이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 제1차 국내혁명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무한(武漢)을 거쳐 상해로 오게 되었다. 그 해에 상해에서 장광자(藏光慈), 맹초(孟超) 등과 함께 태양사를 조직하고 무산계급 혁명문학을 창도했으며 동시에 노신, 곽말약, 욱달부, 모순, 섭소균(葉紹鈞) 등과 함께 외국 작가에 대해 비평을 하였다. 1928죽은 아큐(Q)시대를 써서 노신을 이미 과거의 사람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이듬 해에는 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였다. 당시 글들은 현대중국문학작가(1, 1928; 2, 1930), 힘의 비평(力的批評)(1929, 1930년에 현대문예연구로 개명), 작품론(1929), 문예비평집(1930), 신흥문학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怎樣硏究新興文學)(1930), 문예와 사회경향(文藝與社會傾向)(1930) 등에 수록되어 있다. 항일전쟁 중에는 연극운동 지도를 하였고, 중국 정부수립 뒤에는 천진의 문화국장 등을 지내면서 계속적인 연구를 하였다. 주요 저작으로 단편소설집 혁명이야기(革命的故事), 의총(義塚), 마로사(瑪露莎)와 시집 배고픈 사람과 배고픈 매(餓人與饑鷹), 황토(荒土)및 서사장편시 폭풍전야(暴風雨的前夜)등이 있다. 문화대혁명 중 비판을 받았으며 1977년 사망하였다.

 

36. 펑캉(彭康, 1901~1968)

 

   1901826일 강서성 평향시(萍鄕市) 상율현(上栗縣)에서 출생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1924년 교토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27년 상해에서 국민당 반동파에 의한 ‘4·12’ 정변이 발생했음을 듣고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하였다. 1928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번역, 소개하였고 이로써 중국공산당 사상문화 전투의 탁월한 전사로 자리매김하였다. 곽말약, 욱달부, 성방오 등과 함께 창조사를 결성하는 한편 1930년에는 좌익작가연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후에 국민당에 체포되어 7년여의 수감생활을 하였다. 항일전쟁에서 해방에 이르는 기간에 화중, 화동, 산동 세 개 지역의 선전부 부장 등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주로 무산계급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핍박을 받아 1968년 사망하였다. 사인방 몰락후인 1978년 복권되었다.

 

37. 취치우바이(瞿秋白, 1899~1935)

 

   1899129일 강소성 상주(常州)에서 출생하였다. 현대 중국의 정치가, 문예평론가이다. 어려서 독학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문학 작품을 다수 번역하였다. 1920년에는 북경신보(北京晨報)의 모스크바 주재 기자로 있었다. 1922년 중국공산당에 들어갔으며 1927년 국공합작 결렬 후에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공산당 중앙 8·7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진독수의 우경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좌경 모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 중앙총서기직을 박탈당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930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당 지도부에서 활동하였으나, ‘調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그 후 19352월 상해로 도주하다 국민당의 군대에 체포되어 그 해 6월에 처형되었다. 저서에 아향기정(餓鄕紀程)(1921), 적도심사(赤都心史)(1924), 다여적화(多餘的話)등이 있다.

 

 

38. 주잉펑(朱應鵬, 1895~?)

 

   1895년 절강성에서 출생하였다. 오랜 기간 상해에서 활동한 중국 현대의 화가로 유화와 예술 이론에 능했다. 서양미술단체인 신광미술회(晨光美術會)1928년 결성된 상해예술협회의 발기인 중 한명이다. 상해예술대학, 중화예술대학, 신화예술전문학교, 복단대학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즈음 신보(申報), 시보(時報)의 편집, 시사신보(時事新報), 대미만보(大美晩報)등의 총 편집, 신부일보(神州日報)의 총 주필, 광화일보(光華日報)의 사장을 겸임하였다. 19296월 관양(關良), 풍강석(馮鋼百), 송지흠(宋志欽) 등과 함께 상해에서 현대작가洋畵展을 개최하였다. 국민당 상해특별시당부 감찰위원등을 역임하였고 국민당을 추종하였는데, 이로 인해 1930년대 상해 문단에서 민족주의문학이 제창된 것과 관련하여 노신 등 좌익문화인사의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39. 판공잔(潘公展, 1894~1975)

 

   1894년 절강성 오흥(吳興)에서 출생하였다. 중국공학교 교장, 신보(晨報)사장, 신보(申報)대표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저서로는 러셀의 철학문제등이 있다. 상해의 성요한대학을 졸업하고 남사(南社)의 성원이 되었다. 19195·4 운동 중에는 전국학생연맹회에 참가하여 각회 회보의 주편을 맡았다. 또한 시사신보(時事新報)부간, 학등(學燈)민국일보부간 각오(覺悟)의 특약기고를 담당하였다. 1926년에는 신보(申報)의 주요뉴스 편집을 하면서 상해대학, 국민대학, 남방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고, 이즈음 진과부(陳果夫)의 추천으로 남창으로 가 장개석을 만났다. ‘4·12’ 정변 후에 국민당 상해특별시당부 상무위원, 상해시 농공상국장, 사회국장, 교육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24월에 상해에서 신보(晨報)를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다. 1935년에는 국민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항일전쟁 기간에는 국민당의 선전 업무를 담당하였다. 1949년 이후 미국으로 가 정착하였다. 미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1975년 사망하였다.

 

40. 황전샤(黃震遐, 1907~1974

 

   1907년 광동성 남해현(南海縣)에서 출생하였다. 상해 대만보(大晩報)의 기자로 1930년 반공정(潘公展) 등과 함께 민족주의문학을 제창하였다. 항일전쟁 기간에는 선서, 감숙, 신강 등지로 옮겨 다니며 신강일보사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49년 홍콩으로 이주하여 홍콩시보의 주필 및 중국평론사의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미국 RAND 연구소의 고문을 담당하였다. 1974년 홍콩에서 사망하였으며 저서로는 용해선상(隴海線上), 황인지혈(黃人之血)대상해적훼멸(大上海的毁滅)등이 있다.

 

41. 천과푸(陳果夫, 1892~1951)·천루푸(陳入夫, 1899~2001) 형제

 

   진과부는 189297일 절강성 오흥(吳興)에서 태어났다. 절강육군소학교를 거쳐 손문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 해 통신과 구매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찍이 원세개 타도 투쟁에 앞장섰다. 1925년 중국국민당 제2차 중앙감찰위원과 중앙조직부 대리부장을 겸직한 뒤, 이듬해 오굥항(吳敬恒) 등과 공산당 탄핵안을 제출해 당내 대규모 숙청작업을 주도하였다. 1928년 국민정부 위원 및 동() 감찰원 부원장을 거쳐 1933년 강소성 정부 주석, 1938년 중앙정치학교 교육장 대리, 1945년 중앙재무위원회 주임위원, 1950년 국민당 중앙평의회 위원을 지낸 뒤, 이듬해 8월 사망하였다. 정치인이면서 저술 활동에도 힘써 통례신편(通禮新編), 소련정치의 회상(蘇政回憶), 이상적 앞날(理想的前途), 의정만담(醫政漫談)등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의 동생 陳立夫는 미국의 피츠버그대학에서 광물학 석사학위를 받고 1925년 귀국하여 장개석의 측근이 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시기에 특무첩보대 CC단을 조직, 국민당 정부의 강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1948년 입법원 부원장이 된 직후 미국으로 갔으며, 행정원 정무위원, 총통부 자정(總統府資政) 등을 역임하였다. 1969년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주요 저서에 국민당 우익의 이론을 대표하고 공산당의 유물론에 반대하는 유생론(唯生論)(1934)삶의 원리(1944) 등이 있다.

 

42. 펑쉐펑(馮雪峰, 1904~1976)

 

   190462일 절강성 의호현(義烏縣0에서 출생하였다. 설봉(雪峰), 화실(畵室) 등의 필명을 썼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시인이자 문예이론가이다. 1919년 금화성립제7중학(金華省立第七中學) 사범과에 입학하여 ·신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1921년 학감반대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고 같은 해 가을 절강제일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부터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1927년 전후로 공산당에 입당한 후 러시아문학의 번역과 평론으로 창작 방향을 전환하였다. 1928년 유석(柔石)의 소개로 노신을 알게 되고, 그와 협력하여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주간으로서 활약하였다. 구추백(瞿秋白)의 지도하에 중국무산계급혁명문학의 새로운 임무(中國無産階級革命的文學新任務)등을 결의하고 노신과 함께 上海文化界告世界書등을 발표하였다. 중국공산당 대장정에 참가하고 항일통일전선 결성의 공작 등에 진력하였으나, 1937년 탈당하여 고향에 돌아와 1941년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2,3년간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후에 복당하였으며 전후에는 문예보의 주임편집원과 작가협회 부주석을 역임하는 등, 문학계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고 비평 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1957년의 반우파 투쟁 때 정령(丁玲) 등과 함께 우파분자라 비판받았고, 반당 그룹으로 단죄되어 문학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주요 저서로는 잡문집 시골과 도시(鄕風與市風), 우언집 설봉우언(雪峰寓言), 시집 영산가(靈山歌)등이 있으며 노신 연구저작으로 노신과 소년시절의 친구들(魯迅和他少年時候的朋友), 노신을 기억하며(回憶魯迅), 野草》,《노신문학의 길(魯迅的文學道路)등이 있다.

 

43. 후치우위안(胡秋原, 1910~2004

 

   1910년 호북성 무한(武漢)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사학가, 문학가이자 정치가이다. 15세에 국립무창대학교 이과에 입학한 후 공청단에 가입하여 무한평론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장개석이 일으킨 ‘4·12’ 사태에 반대하여 백색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1928년 상해로 와 복단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였고 1929년에는 국가 유학생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학습하였다. 1931‘9·18’사변이 발발하자 관비유학생의 신분을 버리고 상해로 돌아와 문학으로써 항일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상해 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문화평론주편을 맡아 창간호에 <阿狗文藝論>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문학예술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운 것이고 민주적인 것이다.”라며 문학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문예를 침범하지 말라(勿侵入文藝), 전행촌 이론의 청산과 민족문학학술의 비평(錢杏邨理論之淸算與民族文學學術之批評)등의 문장을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노신, 구추백, 풍설봉 등 좌익작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쌍방의 치열한 논전으로 인하여 호추원은 당시 문단의 3종인(第三種人)’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홍콩을 거쳐 1951년 대만에 정착하였다. 중국국민당 당원, 대만자심입법위원(臺灣資深立法委員),《중화잡지발행인, 중국통일연맹명예주석 등을 역임했다. 1989년 미술전기학회(美國傳記學會)에 의해 국제저명리더자명단(國際著名領袖人名錄)에 수록되었다. 2004년에는 중화문예종신성취상(中華文藝終身成就獎)’을 수상하였고 그해 사망하였다.

 

44. 쑤원(蘇汶, 1907~1964

 

   1907년 절강성 항현(杭縣)에서 태어났다. 소문(蘇汶), 두형(杜衡) 등의 필명을 썼다. 중국 현대의 작가, 문예 이론가이다. 상해 진단 대학을 졸업하였고 학창 시절 문학창작을 시작하였다. 1926년 대망서(戴望舒)와 함께 영락(瓔珞)旬刊을 창간하였고 후에 시칩존(施蟄存) 등과 무궤열차(無軌列車)월간, 신문예월간, 현대월간 등을 창간하고 편집을 담당하였다. 이 기간에 왕성한 창작활동과 번역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즈음 발표한 단편집 석류화(石榴花)의 단편소설들은 주로 청년남녀의 생활과 감정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1933현대잡지에 좌익문예에 반기를 들며 3종인을 자처하는 문장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문예자유론을 제창하며 호추원이 주장한 자유주의 창작이론을 옹호하였다. 이로써 대규모의 3종인논쟁이 시작되었고 그는 구추백, 노신 등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는다. 이 논쟁 중에 <3종인의 출로(第三種人的出路)>등 중요한 문장을 발표하였다. 항일전쟁 기간에는 홍콩, 중경, 남경 등지로 옮겨 다니며 중앙일보(中央日報)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가 평론 작업을 계속하였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반도(叛徒), 소용돌이(漩涡裏外)》,단편소설집 회향집(懷鄕集)등이 있다. 1964년 사망하였다.

 

45. 저우양(周揚, 1908~1989)

 

   1908년 호남성 익양(益陽)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문예이론가, 문학번역가, 문예활동가이다. 중국과학원사회과학학부 위원을 역임하였다. 19275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나 당 조직과의 연락이 소원해지면서 자연스레 탈당하게 되었다. 1928년 상해 大夏大學을 졸업하고 그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귀국 후인 1932년 다시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좌익작가연맹에서 활동하였다. 1933현대잡지에 <사회주의의 리얼리즘과 혁명의 낭만주의에 관하여(關於社會主義的現實主義與革命的浪漫主義)>라는 문장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중국에 소련의 사회주의리얼리즘 창작방법을 소개한 최초의 글이었다. 항일 전쟁이 격화되자 문예계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19379월 연안에 도착한 후에 각종 요직을 거쳤으며 문예전선(文藝戰線)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1944년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문예(馬克思主義與文藝)라는 책을 발행하여 마르크스주의 경전작가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이들의 문예문제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1949년 전국문련 부주석으로 선출되었고 신 중국 건립 후에는 중공중앙선전부부부장, 문화부부부장, 당조서기(黨組書記), 중국작가협회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 초 문화대혁명 시기에 강청 등 4인방에 의해 수난을 겪었고 4인방 몰락 후 재기하여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겸 연구생원, 학부위원(學部委員), 중국문련부석(中國文聯主席), 중국작가협회부주석, 중공중앙선전부부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9년 개최된 전국문학예술공작자제4차대표대회에서 과거를 계승하고 미래를 열으며, 사회주의 신시기의 문예의 번영(繼往開来繁榮社會主義新時機的文藝)라는 보고를 통해 수 십 년 간 지속된 핍진한 문예역사를 청산하고 신시기 문예의 임무를 수행하자고 제창하였다. 또한 불공정한 비판을 받은 문예 종사자들에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1989년 사망하였다.

 

46. 바진(巴金, 1904~2005)

 

   19041125일 사천성 성도(成都)의 대지주 관료 가정에서 출생하였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중국 현대의 문학가, 출판가, 번역가이다. 5·4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사상에 눈을 떠, 1923년 남경과 상해로 올라와 혁명운동에 참가하였고 1926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일찍이 국제공산주의운동 중에 아나키즘이론을 신봉하여 사회활동에 참가하였다. 프랑스 유학중에 집필하여 귀국 후인 1929년에 발표한 멸망(滅亡)에 이러한 사회혁명운동 중의 경험과 좌절을 표현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격류삼부곡 ()》《()》《가을()과 애정삼부곡 ()》《()》《()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들은 사회 전제제도와 봉건 가족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여 당시 젊은이들의 반항정신을 고취시켰다. 항일전쟁 동안에는 중경과 계림에서 게원(憩園)(1944), 4병실(1946), 한야(寒夜)(1946) 등을 집필하였으며, 동화와 단편도 발표하였다. 해방 이후에 작가협회 부주석 등의 공직을 맡았으며, 문화대혁명 때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중국의 대문호로 평가받고 있으며 91세인 1995신은 없다(沒有神)를 발표하여 중국 문단을 놀라게 하였다. 101세인 200510월에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멸망(滅亡), 격류삼부곡 ()》《()》《가을(), 애정삼부곡 ()》《()》《()과 잡문집인 수상록등이 있다.

 

47. 스즈춘(施蛰存, 1905~2003)

 

   1905123일 절강성 항주(杭州)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작가, 번역가, 학자이다. 1929년에 중국 최초로 심리분석기법을 도입한 소설 구마라습(鳩摩羅什), 장군의 머리(將軍的頭)를 창작하여 중국 현대소설의 창시자 중 한명이자 신감각파의 주요 성원이 되었다. 1930년대에 그가 주편을 담당한 잡지 현대에는 현대주의 사조를 반영하여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중시하는 등 현대기법을 추구하는 창작품이 주로 실렸으며 당시 영향력이 컸다. 한편 좌익작가 루쉰은 현대에 기고하는 심종문, 두형, 파금, 목시영 등의 작가를 3종인이라고 비판하였고, 그는 이들을 두둔하며 노신에 반발했다. 항일전쟁 발발 후 운남대학, 하문대학(厦門大學), 기남대학(暨南大學)과 광화대학(光華大學)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52년 이후에는 상해 화동사범대학 중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루쉰과 벌인 논쟁으로 인하여 1950~1970년대에 핍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문학창작과 번역을 포기하고 고전문학과 고대 비문(碑文) 연구에 몰두하였다. 1980년대 이르러 현대주의 사조가 다시금 중국에 유입되자 그의 작품과 경향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문학창작과 학술 연구 상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에 상해시문학예술걸출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에 사망하였다.

 

48. 선총원(沈從文, 1902~1988)

 

   19021228일 호남성 봉황현(鳳凰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소설가이다. 대대로 군인이었던 집안은 묘족(苗族)을 진정시켜 다스리기 위하여 그 곳에서 살아왔다. 13세 때 지방 군벌에 들어가 변경의 각지를 편력하였으며, 1922년 북경으로 나와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소설을 써서 호적에게 인정을 받았다. 뒤에 상해에서 정령(丁玲), 호야빈(胡也頻) 부부와 잡지 홍흑월간(紅黑月刊)을 펴내고, 회명(會明)(1929), 종문자전從文自傳(1931)과 그의 대표작인 변성(邊城)(1934) 등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주로 자기의 체험에 바탕을 둔 변경에서의 군대생활이나 소수민족의 풍속적 흥미가 감도는 작품들이었으며, 이로써 흔들리지 않는 작가적 지위를 굳혔다. 작가로서의 출발 당초부터 혁명문학의 정치주의에 대항하여 순문학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대표적인 경파(京派) 작가로서 상업주의적인 흥미 위주의 작품을 생산하는 해파(海派) 문인들을 비판하였다. 중일전쟁 중에는 곤명에 있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북경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뒤에 그의 반정치성을 비판받고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51나의 학습을 발표하여 자기비판을 했고, 창작을 그만둔 뒤 북경 역사박물관에 근무하며 고고학을 연구하였다. 미완성의 장편 대하(大河)(1944) 외에, (柏子)(1928), 용주(龍朱)(1929), 월하소경(月下小景)(1932) 등의 작품이 있다.

 

49. 무스잉(穆時英, 1912~1940)

 

   1912년 절강성 자계(慈溪)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소설가이다. 부친은 은행가였으며 부모님을 따라 어려서부터 상해에서 공부하였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독특한 기질과 풍격으로 인해 鬼才작가라 불리었다. 1929년부터 소설 창작을 시작하여, 이듬해 新文藝에 소설 우리의 세계(咱們的世界)(黑旋風)을 발표하였다. 1932년 최초의 소설집 남북극(南北極)을 발표하였는데, 상류사회와 하층사회의 양극적 대립이 잘 반영되어있다. 1933년 출판한 두 번째 소설집 공묘(公墓)에서는 창작 경향을 바꾸어 기이하고 다채로운 도시생활을 묘사하고, 기교면에서도 요코미쓰 리이치 등 일본 신감각파의 현대적 수법을 모방하고 프로이트 식의 심리 소설을 시도하였다. 이로써 눌유구(吶劉鷗), 시칩존(施蟄存) 등과 함께 중국 현대소설 문단의 신감각파를 형성하였다. 이 후 백금의 여체상(白金的女體塑像), 성처녀의 감정(聖處女的感情), 나이트클럽의 다섯 명(夜總會裏的五個人), 상해폭스트롯(上海的狐步舞)등 신감각파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정치사상의 변화에 따라 1933년을 전후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도서잡지심사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항일전쟁 발발 후 홍콩으로 갔다가 1939년 상해로 돌아와 왕정위(汪精衛) 정권의 중화일보부간(副刊)문예주간화풍(華風)민국신문(國民新聞)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후에 국민당 특무대에 의해 암살되었다.

 

50. 양춘런(楊邨人, 1901-1955

 

   1901년 광동성 호안(潮安)에서 출생하였다. 역사에 의해 잊혀진 第三種人이다. 1925년 동필무(董必武)의 추천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던 태양사(太陽社)’의 주요 창기인 중 하나이며, 최초의 중국 공산당 지도하의 희극단체인 좌익희극가연맹의 서기를 담당하였다. 1932년 여름과 가을에 상악서소구(湘鄂西蘇區)에서 4개월간 머무르며 정당 생활의 참호를 벗어나(脫離政黨生活的戰壕)를 완성하였으며, 이듬해 1월 이를 독서잡지에 발표하며 소자산계급혁명문학의 기치를 들고 소위 第三種人이 되었다. 19336월에 大晩報·火炬신유림외사(新儒林外史)를 발표하여 노신을 공격하였다. 1949년 이후 사천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955년 반우파 투쟁이 발생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51. 한쓰헝(韓侍, 1908-1987)

 

   190832일 천진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작가, 문학번역가, 교수이다. 어려서 천진동문서원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30좌련에 참가하고 이듬해 광동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4년부터 중산문화교육관 특별반을 편역하였고 1937년에는 중앙통신사 특약 종군기자와 총 편집실 심사위원을 지냈다. 1930년대 작성한 많은 문예비평문을 엮어 문학비평논집, 참치집(參差集), 천견집(淺見集)등으로 출판하였다. 이 시기 대중문예’, ‘3종인등 문제와 관련하여 좌익문학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해방 후 제로데학(齊魯大學) 교수를 역임하였고, 이후에는 상해에서 문학번역작업에 종사하였다. 1987년 사망하였다.

 

52. 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1010일 복건성 용계(龍溪)의 가난한 목사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당대의 저명한 문학가이다. 1912년 상해 성요한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청화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19년 미국 하버드 대학 문학과에 입학하여 1922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3년에 귀국하여 북경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 음운학을 연구하는 한편, 1924년에 노신의 어사(語絲)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해 하문으로 가 하문대학 문학원장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武漢정부 외교부의 비서가 되었다. 1932년에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論語), 1934년에 人間世, 1935년에 우주풍(宇宙風)을 창간하였다. “자아를 중심으로 하고 한적(閑寂)을 격조로 하는소품문 창작을 제창한 논어파(論語派)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계급론을 이념 기반으로 삼아 산문을 전투 무기로 활용하고자 하는 좌익작가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35년 이후 미국에서 영문으로 吾國與吾民, 風聲鶴唳, 孔子的智慧, 生活的藝術등을 창작하였으며, 프랑스에서 京華煙雲등의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공자, 장자 철학과 도연명(陶淵明), 이백(李白), 소동파(蘇東坡), 조설근(曹雪芹) 등의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였다. 그는 중국 현대문학 사상 처음으로 외국어로 작품을 써서 해외에 이름을 알렸다. 1952년 미국에서 잡지 天風을 창간하였고, 1966년에 대만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1967, 홍콩 중문대학의 연구교수로 초빙되었고, 1976년 홍콩에서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표작으로는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My Country and My People)(1935), 영국에서 출판된 수필집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1938), 소설 Moment in Peking(京華煙雲)(1937), 폭풍 속의 나뭇잎(A Leaf in the Storm)(1941) 등이 있다.

 

 

53. 천왕다오(陳望道, 1891~1977

 

   1891118일 절강성 의오(義鳥)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교육가이자 수사학자, 언어학자이다. 1915년 일본으로 가 와세다 대학에서 문학, 철학, 법률 등을 전공하였으며, 이때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귀국 후에 항주절강성립제일사범학교(杭州浙江省立第一師範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012월부터 신청년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30~40년대에 상해와 중경에서 중국문법혁신문제에 관한 토론을 제기하고, <談動修辭學發凡詞和形容詞的分別>(1938)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방법론상에서 기계적인 모방을 비판하고 기능적인 관점에서 중국어 어법을 연구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는 중국 최초로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였으며, 명저인 사해(辭海)의 총 편집을 역임하였다. 신 중국 건립 이후 복단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중국현대수사학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명저 수사학발범(修辭學發凡)을 집필하였다. 1977년에 사망하였다.

 

54. 페이밍(廢明, 1901~1967)

 

   1901년 호북성 황매(黃梅)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풍문병(馮文炳)으로 19268월부터 필명인 폐명(廢明)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현대 소설가이다. 15세 되던 해 무창(武昌)의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소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1924년 북경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 후 북경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22년부터 長日, 講究的信封, 柚子, 少年阮仁的失踪등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1924년부터 어사사(語絲社)의 주요 성원이 되었다. 그는 주작인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의 출판물에 주작인이 왕왕 서문을 작성하여 주었다. 또한 경파(京派) 작가에 속하기도 했다. 1924어사(語絲)竹林的故事등을 발표하고, 이듬해 단편소설집 竹林的故事, 와 장편소설 莫須有先生傳을 출판하였다. 한편 풍지(馮至), 양우춘(梁遇春) 등과 함께 잡지 낙타초(駱駝草)를 창간하였다. 1937년 북평이 함락된 후 고향으로 돌아 와 미완의 장편소설 莫須有先生坐飛機以後를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항전 승리 후에 길림대학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1967년 장춘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56. 주광쳰(朱光潛, 1897~1986

 

   1897919일 안휘성 동성(桐城)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미학가, 문예이론가, 교육가이자 번역가이다. 무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홍콩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잠시 중학교에서 근무하였다. 5·4 신문화운동 시기 문언문을 반대하며 백화문 사용을 주장하였다. 1921년 백화문으로 쓴 처녀작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심리분석(福魯德的隱意識說與心理分析)행위파 심리학의 개략과 그 비평(行爲派心理學之槪略及其批評), 진화논증進化論證등 독서비평을 발표하였다. 이는 초보적으로 형성된 그의 학문과 연구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1922년 발표한 어떻게 학술계를 개조할 것인가(怎样改造學術界)에서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정신(愛眞理的精神)’, ‘과학적 비평정신’, ‘창조정신실증정신을 배양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향후 그의 학술 연구에 기본 정신이 되었다. 1924년에 최초의 미학 문장인 <무언의 아름다움(無言之美)>를 발표하는 한편, 상해로 가 섭성도(葉聖陶), 호유지(胡愈之), 하연(夏衍), 하개존(夏丏尊), 풍자개(豊子愷) 등과 함께 입달학원(立達學園)을 설립하여 신식교육개혁의 시험무대로 삼고자 하였다. 1925년 유학을 떠나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와 런던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심리학·철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프랑스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33년에는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비극심리학이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에 귀국하여 북경대학교 서양문학과 교수로 부임했으며 그 후 사천대학 문학원장과 무한대학 교무처장을 지냈다. 그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문예이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학적 관점에서 문예이론을 연구하여 서구의 문예이론과 중국의 문예이론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문예창작과 감상은 독립적인 영역에 속하며 자유스러운 미감 활동이라는 순수문학론을 주장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86년 사망하였다. 대표적 연구서로는 문예심리학(1936)시론(詩論)(1942), 문학을 말함(談文學)(1946) 등이 있다.

 

57. 리졘우(李健吾, 1906~1982)

 

  1906山西 運城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 李鳴風은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가 북양군벌에 의해 암살당하였고, 그 후 어머니를 따라 타향을 떠돌았다. 1921년 국립 北京사범대학 부속중학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주대남(朱大柟) 등과 함께 문학단체 희사(曦社)를 조직하였고, 문학 간행물 國風日報의 부간 爝火을 창간하였다. 1925清華대학에 입학하여 중문학을 전공하다가 서양문학과로 전과하였다. 같은 해에 王統照의 소개로 문학연구회(文學研究會)에 가입하였다. 1931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플로베르 등 현실주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중화교육 기금회 편집위원회에서 일하였다. 1935暨南대학 교수로 발령받았다. 중일전쟁 동안 상해에서 진보희극운동에 종사하였으며, 상해극예사(上海劇藝社) 및 고간극단(苦幹劇團)의 중견으로 일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정진탁(鄭振鐸)과 함께 잡지 文藝復興을 펴냈고, 상해실험희극학교를 건립하여 희극문학과의 주임을 맡았다. 1954년부터 북경대학 문학연구소, 중국 과학원 문학연구소, 외국문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또한 일찍이 국무원 학위 위원회 평의원, 전국 문련 위원, 중국 외국문학 학회 이사, 중국 희극가 협회 이사, 프랑스 문학회 명예회원, 北京시 정협 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다.

 

 

58. 린후이인(林徽因, 1904~1955)

 

   1904년 절강성 항주(杭州)에서 출생하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서지마(徐志摩), 문일다(聞一多), 주상(朱湘), 손대우(孫大雨) 등과 함께 新月派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다. 신월파는 19264월에 형성된 문학단체로 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영·미 유학생들이었으며, 형성 초기에는 봉건제도를 반대하고 민주를 쟁취하고자 하였다. 후에는 새로운 격률시를 제창하며 신시를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신월파의 재녀(才女)로 불리면서 신월, 시간(詩刊)등에 시를 발표하였다. 섬세하고 온유한 시 연등(蓮燈), 웃음등이 임휘인시집(林徽因詩集)에 수록되었다.

 

59. 볜즈린(卞之琳, 1910~2000)

 

   1910128일 강소성 해문탕문(海門湯門)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문학평론가, 번역가이자 시인이다. 1929년 상해포동중학(上海浦東中學)을 졸업하고 북경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 영국 낭만파, 프랑스 상징파 등의 시를 접하고 신시를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지마는 변지림의 스승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서지마는 변지림의 시를 자신이 편집을 담당하던 시간(詩刊)에 발표하게 하였고, 심종문(沈從文)에게 서문을 쓰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신문화 운동 중의 중요한 시가 유파인 新月派의 대표시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서구 낭만파, 상징파 외에 중국 전통시가에도 능하여 양자를 결합한 독특한 시 풍격을 창조해내었다. 주로 항일전쟁의 긴장감 속에서 고민하는 지식인의 심정을 예리한 감성적 필치로 표현하였는데, 작품이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다.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곤명의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에서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작품에는 삼추초(三秋草)(1933), 수행집(數行集), 한원집(漢園集)(1935), 어목집(魚目集)(1935) 등의 시집이 있으며, 지드·말라르메 등의 번역 작품이 있다. 19571960시간(詩刊)편집위원을 지냈다. 2000년 사망하였다.

 

60. 허치팡(何其芳, 1912~1977)

 

   1902년 사천성 중경시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시인, 산문가, 문학평론가, ‘홍학(紅學)’ 이론가이다. 어려서 중국 고대 시사와 소설을 즐겨 읽었다. 1929년 상해의 중국공학(中國公學) 예과에 입학하였고 신시를 접하였다. 이후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1935년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잡지 현대(現代)에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6년 변지림(卞之琳), 이광전(李廣田) 등과 함께 시집한원집(漢園集)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한원삼시인(漢園三詩人)’이라고 일컬어진다. 1937년에는 산문집 화몽록(畵夢錄)을 발표하여 대공보(大公報)문예상을 수상하였다. 1938년 연안으로 가 노신예술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신 중국 성립 후 주로 문학연구와 평론 부문에 종사하며 오랜 기간 문예계의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중국문학예술연합회 위원, 중국작협 서기,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산문집 화몽록과 시집 예언(豫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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