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왕스웨이(王實味, 1906~1947

 

1906년 하남성 황천(潢川)현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북경대학 문예과에 입학한 후 서간체 소설 休息(휴식)을 발표하면서 우리 청년들의 사명은 우리의 힘으로 모든 암흑의 깊은 굴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우리의 뜨거운 피로 죄악의 화마를 꺼뜨리는 것이다. 위태로운 조국을 구하고, 더러운 사회를 개선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할 유일한 목표이자 책임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서안사변이 일어나자 항일에 대한 열정을 안고 1937년 연안행을 택했다. 그곳에서 마르크스, 앵겔스, 레닌의 원저를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19422월 모택동이 삼풍정돈을 호소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23정치가 예술가(政治家, 藝術家), 들백합화(野百合花)라는 두 편의 글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연안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공산당 상급 간부들의 특권의식과 관료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일반 당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였다. 또한 문예의 독창성이나 독립성을 억누르는 당시 연안의 정치세력을 비판함과 동시에 현실비판 없이 왜곡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문예가들도 함께 꼬집었다. 당의 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주장이 점점 많은 찬성 여론을 얻자, 정풍 지도부는 그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19421023, 반혁명 트로츠키주의자숨겨진 국민당 스파이5인 반당집단의 구성원으로 낙인찍혀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5인 반당집단의 나머지 4명과 함께 19434월에 체포되었으며, 194771일 처형되었다.

 

92. 라오서(老舍, 1899~1966)

 

1899년 북경의 한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서경춘(舒慶春)으로 노사라는 필명은 1926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라오장의 철학(老張的哲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922년 첫 단편 소설 딸랑이(小鈴兒)를 발표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대학에서 중국문학 강의를 하였다. 이 시기 많은 외국문학 작품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의 창작 생애에 밑거름이 되었다. 1925라오장의 철학, 자오즈가 말함(趙子曰), 이마(二馬)세 편이 소설월보(小說月報)에 실리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 해 1926년 문학연구회에 가입하였다. 1966년 임표(林彪)와 사인방에 의해 박해 받다가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묘성기(貓城記), 라오장의 철학, 낙타상자(駱駝祥子), 사세동당(四世同堂)과 화극 龍須溝, 茶館등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인력거꾼, 창기, 순경, 이야기꾼 등 북경 서민들의 삶이 질박하게 표현되어있다. 그들의 삶의 묘사를 통하여 전근대적 사회로부터 반식민지 사회로 변화되면서 겪게 되는 북경 사람들의 희비극적인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작품에서 사용하고 있는 거친 북경어는 작품의 사실적 묘사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93. 딩링(丁玲, 1904~1986

 

1904년 호남성 임례(臨澧)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상해로 와 진독수(陳獨秀), 이달(李達) 등이 설립한 평민여자학교(平民女子學校)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구추백(瞿秋白) 등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이 설립한 상해대학 중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북경으로 가 북경대학에서 문학과 과정을 청강하였으며 1925년 호야빈(胡也頻)과 결혼하였다. 1927년 처녀작 夢珂소설월보에 발표하면서부터 구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폭로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처녀작 발표 이후 오래지 않아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소피 여사의 일기(莎菲女士的日記)를 완성하여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여 기관지 북투(北鬪)의 편집을 담당하였고, 1932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3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남경에 연금되었으나, 송경령(宋慶齡), 채원배(蔡元培), 노신(魯迅), 로망 롤랑 등 국내외 저명인사의 구명활동과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남경을 탈출하여 연안에 이르게 된다. 연안에서 해방일보(解放日報)문예부간의 주편을 맡았다. 이 시기 내가 하촌에 있을 때(我在霞村的時候), 병원에서(在醫院中)등의 작품을 창작하였고, 1948년 장편 소설 태양은 상간하 위를 비추고(太陽照在桑幹河上)를 발표하였다.

신 중국 성립 이후 초기 창작 경향과는 상이하게 사회주의 문학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문예보(文藝報)의 주편을 비롯하여 중앙문학연구소 소장, 중공중앙선전부 문예처장 등을 맡았다. 1955년과 1957년 두 차례에 걸쳐 좌익 세력에 의해 반당 소집단(反黨小集團)에 속하는 우파 세력으로 몰리면서 북대황(北大荒)으로 12년간 하방되었다. 사인방이 해체되고 난 후 비로서 문학적 지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만년에 도깨비 세계(魍魎世界), 눈보라 세상(風雪人間)등을 남겼다. 198634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94. 뤄펑(羅烽, 1909~1991)

 

1909년 현재 요녕(遼寧)성 심양(沈陽)에서 태어났다. 1928년 흑룡강성 호해철로전습소(呼海鐵路傳習所)에서 공부를 하던 중 혁명에 가담하여, 그 이듬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호해 철로 특별지부 선전 요원, 서기 등을 맡았다. 918사변 후, 북부 만주혁명 문예발전활동을 하던 소군(蕭軍), 소홍(蕭紅), 백랑(白朗) 등과 알게 되었다. 이즈음 그는 태양이 당신의 얼굴을 검게 그을린다(曬黑了你的臉)라는 신시를 발표했다. 1935년 상해로 건너가 좌련에 가입하고, 상해문예계 전시 복무단 선전 부장과 월간지 초강(哨崗)의 주편을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 신시, 소설, 극본을 대량으로 창작하였는데, 장시 ()삼부곡, 중편소설 모윈과 한얼모 소위(莫雲與韓爾謨少尉)》,장편소설 만주의 죄수(滿洲的囚徒)도 이 때 쓴 작품들이다. 1941년 완남사변 후, 연안으로 거처를 옮겨 전국문예계항적협회 연안지부 제1기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중일전쟁 종식 후, 동북 지역으로 돌아와 동북 문화부 부부장, 동북 문련 부주석 등을 맡았으며, 양안춘추(兩岸春秋)라는 장편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7년 우파로 분류되면서 그의 창작 활동은 중단되었다.

 

95. 샤오쥔(軍, 1907~1988)

 

1907년 요녕성 금주(錦州)에서 태어났다. 1925년 장학량이 심양에 세운 동북 육군 강무당에서 법률과 군사를 전공하였다. 1929, 군벌의 잔혹함을 고발했던 그의 첫 백화 소설연약한……(……)을 심양의 성경시보(盛京時報)에 발표하였다. 1932년 하얼빈으로 와서 본격적인 문학 생애를 시작하였다. 1933년 그와 소홍(蕭紅)이 함께 엮은 단편소설집 고생스런 여정(跋涉)을 출판하였다. 그 가운데 소군의 작품은 외로운 어린 새(孤雛), 심지(燭心), 분홍색 선(桃色的線), 이는 늘 있는 일(這是常有的事), 미치광이(瘋人), 하등인(下等人)으로 총 6편이다. 19346월 동북지역을 떠나 청도(青島)에서 청도신보(青島晨報)의 부간을 맡는다. 이때 대표적 장편 소설 8월의 향촌(八月的鄉村)이 탄생한다. 이후 단편 소설집 (), 강에서(江上)》,산문집 1015(十月十五日), 푸른 잎의 이야기(綠葉的故事)》,중편소설 졸졸(涓涓)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장편소설 3(第三代)를 완성하며, 제국주의와 전근대적 군벌 통치 하에 시달리던 동북 사회의 현실을 그려냈다. 1940년 연안으로 떠나 1945년 겨울까지 줄곧 연안에서 생활하며 노신연구회의 주임간사, 문협 분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신 중국 수립 후 하얼빈에 돌아와 동북대학 문학부장이 되어 문화보(文化報)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반공적 언행으로 인해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비판을 받고 오랫동안 광산 등에서 사상개조를 받았다.

 

96. 멍차오(孟超, 1902~1976)

 

1902년 산동(山東)성 제성(諸城)에서 태어났다. 1926년 상해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상해에서 장광자(蔣光慈), 아영(阿英) 등과 함께 태양사를 조직하고 태양월간(太陽月刊)을 출간하였다. 동시에 예술극사, 중경서남학원 교수들과 함께 춘야서점(春野書店)을 열어 혁명문학을 주창하였다. 1929년 가을 중국 좌익작가연맹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1932년 호서 방적공장의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7개월 만에 풀려난 이후 북평, 산동 등지를 떠돌았다. 1940년 하연(夏衍) 등과 함께 잡문 잡지 야초(野草)를 발간하고, 이듬해에 잡문집 장야집(長夜集)을 출판했다. 1944년 일본군을 피해 곤명으로 온 후, 서남일보(西南日報)의 부간 고원(高原)”, 대공보(大公報)旬刊 만화만화(漫畫漫話)”, 신민보(新民報)예술주간(藝術周刊)” 등의 편집을 맡았다. 19466, 서남 지역의 학생 운동에 참여하며 당국의 지명 수배를 받자 홍콩으로 건너갔다. 19487월 모순이 주편을 맡았던 소설월간(小說月刊)에서 편집을 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 다시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신 중국 성립 이후, 국가출판총서 도서관 부관장, 인민미술출판사 창작실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인민 문학 출판사 부총편집 겸 희극편집실 주임을 역임하는 가운데 이혜랑(李慧娘)이라는 역사극을 창작했다.

 

97. 천취안(銓, 1903~1969)

 

   1903년 사천성 부순현(富順縣)의 상인, 지식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919成都入省立第一中學을 졸업하고 청화대학 유학반에 입학하였다. 1928년 출국하여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철학, 문학 및 외국어를 공부하였다.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니체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독일 Kiel 대학에서 독일에서의 중국문학 번역과 보급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4년 초 귀국하여 장편소설 革命前的一幕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북벌전쟁 하에 애정 이야기를 통해 두 주인공의 인생관을 표현하였으며, 구조가 대칭적이고 필법이 자연스러워 일찍이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이 후 무한대학, 청화대학, 장사임시대학, 곤명서남연합대학 등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쳤다. 1940년에서 1942년까지 임동제(林同濟) 등과 함께 戰國策, 戰國등 간행물을 발행하여 戰國重演’, ‘尙力政治등 파시즘 사상을 전파하면서 전국책파를 형성하였다. 화극 野玫瑰에서 국민당 특수업무의 생활을 미화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해방 후 복단대학, 남경대학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으나 연구업적은 그다지 많지 않고 전쟁 중에 대부분 분실되었다. 1957년 반 우파투쟁 때 비판을 받았다. 1969년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野玫瑰, 黃鶴樓, 狂彪, 金指環, 無情女, 藍蝴蝶등이 있다.

 

98. 린통지(林同濟, 1906~1980)

 

   1906년 복건성 복주(福州)에서 출생하였다. 전국책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어려서 莊子左傳을 즐겨 읽었으며 20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28년 미국 미시건 대학을 졸업하고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중국문화사를 강의하였다. 1931년 동북3성이 함락 당하자 현재는 ()’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이며, ‘이 모든 일체이다.”라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을 바탕으로 한 사상이 점진적으로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가 제창한 戰國時代’, ‘尚力政治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1934日本在東北的擴張이라는 논문으로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 한 후 귀국하여 천진 남개대학, 서남연합대학, 복단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신 중국 건립 후 복단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영국문학사, 영미소설, 영국희극, 셰익스피어 비평 등을 강의하였다. 1980년 사망하였다.

 

99. 뤠이하이쫑(雷海宗, 1902~1962)

 

   1902년 하북성 영청현(永淸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저명한 역사학자이다. 일생동안 중국 역사와 세계 역사에 대해 탐구하였으며, 중국 문화와 세계 문화의 연구·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1922년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시카고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27년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남경중앙대학, 무한대학, 청화대학, 서남연합대학과 천진 남개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서남연합대학 재직 시절 진전(陣銓), 임동제(林東濟) 등과 함께 전국책파(戰國策派)를 결성하고, 당시 상황을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전국시대로 파악하는 주장을 펼쳤다. 신 중국 건립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62년 사망하였다.

 

100. 사오취안린(邵荃麟, 1906~1971)

 

   1906년 사천성 중경에서 태어났다. 중국 현대 문예이론가, 현대문학평론가이자 작가이다. 상해 복단대학 경제학과에서 공부할 때 학생애국운동에 참가하였다. 192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4년 반제반전대동맹에서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였다. 1937년 출옥 후 본격적으로 문학창작과 번역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품 , 車站前등에서는 국민당 반동파의 부패와 일본 군국주의의 죄악을 폭로하고 인민대중의 생활과 투쟁을 반영하였다. 항일전쟁 발발 후, 항일선전과 문화공작에 참여하며 東南戰線》,《現代文藝, 現代靑年, 改進, 抗戰戱劇등 간행물을 편집하였다. 후에 중국공산당 문화공작조 조장 등을 맡으며 文化雜誌등의 편집과 靑年文藝창간에 참여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 홍콩으로 가 홍콩과 국민당 통치구의 문예운동을 조직하는 등 문예계 통일전선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이 후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을 이끌고 대륙으로 귀국하였다. 신 중국 건립 후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계획국 국장, 중공문교위원회 위원, 중공중앙선전부 부비서장 겸 교육처 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부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을 지냈다. 19627월 대련에서 개최된 농촌제재단편소설창작좌담회에서 현실주의심화를 강조하면서, ·두 종류의 인물 형상 외에 중간 형태의 인물을 써야 한다는 인물형상의 다양화를 제창하였다. 이는 농촌제재소설창작이 경박하고 단조로운 현상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로 인해 공개 비판을 받았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모진 핍박을 받다가 1971610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단편소설집 英雄, 宿店, 喜酒과 극본 麒麟寨등이 있고, 번역으로는 被侮辱與被損害的, 陰影與曙光등이 있다.

 

101. 수우(舒蕪, 1922~2009)

 

본명은 방관(方管)으로 1922년 안휘성 동성(桐城)에서 태어나, 중국 현대 작가문학 비평가로 활동하였다. 1938광서일보(廣西日報)의 부간 南方에 투고하면서 서무(舒蕪)”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十月에 처녀작 때에 맞춰 즐기는(及時行樂)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에서 중일전쟁 중에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는 상류층을 고발하였다. 1940년에 학업을 그만두고 호북, 사천 등지의 농촌 소학교 및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4년부터 1949년까지 국립여자사범학원(國立女子師範學院), 강소학원(江蘇學院), 남녕사범학원(南寧師範學院)의 부교수 및 교수를 역임하면서 문학과 철학에 대한 교학과 연구를 이어갔다.

1945년 초 호풍(胡風)이 주편을 잡고 있던 七月주관을 논함(論主觀)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5년여에 걸친 문예논쟁의 주요 논지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적지 않은 잡문을 창작하였고, 이를 모은 것이 괘검집(掛劍集)이다. 1949년 이후에는 광서 문학예술계 연합회 연구부장(廣西文學藝術界聯合會研究部長), 남녕시 문련부주석(南寧市文聯副主席)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 북경 인민문학출판사의 편집원, 편집실 부주임, 편집 심의원로 일하였다. 1979년에는 중국사회과학의 편집 심의원으로 역임하였으며, 주작인(周作人)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1986년에 퇴임하였고 2009년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02. 샤옌(夏衍, 1900~1995

 

본명은 심내희(沈乃熙). 절강성(浙江省) 여항현(餘杭縣, 현재 杭州)에서 태어나 문학영화희곡 작가 및 문예평론가, 번역가, 사회활동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신문학운동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이다. 1919년 고향에서 54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 시기에 당시 절강성에서 가장 진보적인 잡지로 꼽혔던 쌍십(雙十)을 친구들과 함께 창간하였다(이 잡지는 제2기부터 절강신조(浙江新潮)로 개명함). 1920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마르크스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4년 손문의 소개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였으며 노동자 운동과 번역 작업에 힘썼다. 고르키의 어머니(母親)를 비롯하여 해외 명작을 번역하였다. 1929년 정백기(鄭伯奇) 등과 함께 상해예술사를 조직하여 프롤레타리아 연극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무산계급 연극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30년 좌련(左聯)에 가입하였고, 1933년 중국 공산당 상해 위원(中共上海文委成員) 등을 역임하였다. 199595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103. 린모한(林默涵, 1913~2008)

 

1928년 복주고등사범과(福州高中師範科)에서 공부하던 중 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아 복주(福州), 하문(廈門), 상해 등지에서 혁명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귀국하였고, 생활일보(生活日報), 독서와 출판(讀書與出版), 세계지식(世界知識), 국민주간(國民周刊)등 진보적인 잡지의 편집을 맡았으며, ‘묵함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8년 연안으로 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43해방일보(解放日報)의 편집부간을 맡으면서 여기에 다수의 단편 소설과 잡문을 기고하였다. 중일전쟁 승리 이후 상해를 거쳐 홍콩으로 건너가 국민당 통치구에서 발행되었던 공산당 기관지 군중(群衆)과 공산당 관리 하의 문학잡지였던 대중문예총간(大衆文藝叢刊)의 편집을 맡았다. 이 시기에 썼던 政論, 잡문 및 문예 논문을 모아 출판한 책들이 격변 중에(在激變中), 낭화(浪花), 사자와 용(獅和龍)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공중앙선전부 부부장, 문화부 부부장,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200813일 북경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04. 동비우(董必武, 1886~1975)

 

1986년 호북(湖北)성 황안(黄安)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공산당 창건자 가운데 한 명으로 중국 사회주의 법제의 기초를 세웠던 인물이다. 1911년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중국 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였다. 1914년 일본 동경의 사립일본대학(私立日本大學)에서 법률을 전공하였고, 이 시기 손문이 세운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156월 귀국한 후 원세개를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가 두 차례 감옥에 수감되었고, 1916년 출소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9년 상해에서 54운동에 가담하였다. 19217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 대표 회의에 무한(武漢)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 모스크바의 중산대학과 레닌학원에서 유학하였다. 193410월 장정에 참여하였고, 섬감녕(陕甘寧) 지구 정부 대리 주석을 맡았다. 건국 후에는 중앙재경 위원회 주임, 정무원 부총리, 정무원 정법 위원회 주임, 최고인민법원원장, 전국정협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등의 요직을 맡았다. 출판 저서로는 동필무 선집(董必武选集), 동필무 정치법률 문집(董必武政治法律文集), 동필무 시선(董必武詩選), 동필무연보(董必武年谱)등이 있다. 197542일 북경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05. 루딩이(陸定一, 1906~1996)

 

1926년 강소(江蘇)성 무석(無錫)에서 출생하였다. 청년 시기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받아 192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공청단 중앙선전부장을 지냈다. 건국 이후, 중공 중앙 선전부장, 국무원 부총리, 중앙서기처 서기, 문화부 부장, 전국 정협 부주석 등을 역임한 바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금빛 낚시 바늘(金色的魚鉤)》,《노산계(老山界)등이 있다.

 

106. 쑨위(孫瑜, 1900~1990)

 

1900년에 중경(重慶)에서 태어나 유년 시기 가족을 따라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 처음 영화를 접한 그는 청화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영화와 시가에 관심을 가졌다. 청화대학 졸업 후, 미국 위스콘신 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후에 뉴욕 촬영학원에서 촬영 공부를 했다. 1926년에 귀국하여 상해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화 인생을 시작하였다. 1928년 연출한 첫 작품 소상루(潇湘淚)가 발표됐다. 이듬해 중국 영화를 혁명군으로 부흥시키고, 외래 영화에 대항하는 선봉자이기를 자청했던 연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의 창업작 고도춘몽(故都春夢)을 찍었다. 구지식인의 고난 역정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이 영화는 관객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들장미(野玫瑰), 화산정혈(火山情血), 천명(天明), 장난감(小玩意), 체육황후(體育皇後), 대로(大路)6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대부분 시대적인 경전으로 남았다. 이후 1950년에 완성한 무훈전(武訓傳)은 발표 당시 주은래, 주덕 등의 호평을 받았지만, 이듬해 인민일보에서 봉건문화를 맹렬히 선전하며, “반동 봉건 통치자에게 항복한 영화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문혁 시기에 수차례 가산을 몰수당하고, 비판 대회를 거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81손유영화대본선집(孫瑜電影劇本選集)이 출판되었고, 1990년에는 자서전 대로의 노래(大路之歌)가 대만을 비롯한 해외에서 발간되었다. 19907월 사망하였다.

 

107. 쉬츠(徐遲, 1914~1996)

 

1914년 절강성 남심(南潯)의 한 교사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4년에 부치다(), 무거운 버스(沉重的BUS), 발췌시(詩拔萃)등을 짓고 훗날 이 시들을 스무살의 사람(二十歲人)이라는 시집으로 엮었다. 1936년에는 산문 가극원과 기타(歌劇院及其它), 베토벤의 사랑(貝多芬之戀)등을 쓰고, 미문집(美文集), 흥청이는 밤(狂歡之夜)에 실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유럽과 미국의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특히 시 작품은 이미지의 응축, 리듬의 도약 등에서 서구 모더니즘과의 영향 관계를 찾아볼 수 있으며, 산문 창작은 특히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의 영향을 받았다. 1950년부터 7년 동안 한국 전쟁에 2, 장강대교 공업 현장에 6번 다녀오면서 시집 아름다움신기풍부(美麗神奇豐富), 전쟁평화진보(戰爭和平進步)공화국과 나라의 노래(共和國的歌)를 썼으며, 논문집 시와 생활(詩與生活)을 출판하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4년 동안 그는 시간(詩刊)의 부 주편을 맡았고, 1960년 무한에 정착하고 난 이후부터는 르포르타주 창작에 열을 올려 불 속의 봉황(火中的鳳凰), 목단(牡丹)등의 작품을 썼다.

 

108. 허징즈(賀敬之, 1924~)

 

1924년에 산동성 역현(嶧縣)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항일구국 운동에 참여하였고, 16세에 연안으로 가 노신예술학원 문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7세에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5년에 노신예술학원에 소속하여, 집단으로 중국 최초의 신가극 백모녀(白毛女)를 창작하였다. 본래 이 작품은 민간에 의해 구비되던 전설의 일종으로 귀신의 복수라는 전통적 원형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집단 토론을 거쳐 구 사회는 사람을 귀신처럼 만들고, 신 사회는 귀신을 사람으로 만든다.”라는 새로운 주제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중국작가협회 및 희극작가협회 이사, 문화부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건국 이후 연안으로 돌아와(回延安), 방성가창(放聲歌唱), 삼문협가(三門峽歌), 시월 송가(十月頌歌), 뇌봉의 노래(雷鋒之歌), 서쪽으로 가는 열차의 창문(西去列車的窗口), 중국의 시월(中國的十月), 팔일지가(八一之歌)등의 시집을 남겼다.

 

109. 쉬광핑(許廣平, 1898~1968

 

1898년 광동성(廣東省) 번우현(番禺縣)에서 유복하고 개화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천진 직이제1여자사범학교(天津直隸第一女子師範學校)에 들어갔고, 54운동 시기 천진여성애국 동지회(天津女界愛國同志會)와 각오사(覺悟社)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졸업 후, 북경여자고등 사범학교 중문과에 입학하여 노신의 학생이 된다. 이 시기 노신과 함께 현모양처 교육을 강조하던 교장 양음유(楊蔭榆)를 배척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녀는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기 전, 신문에다 노신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발표하였고, 1927년부터 2년 동안 광주에서 노신과 함께 동거 생활을 했다. 1929, 상해에서 노신의 외아들 주해영(周海嬰)을 낳았고, 1936년 노신이 죽기 전까지 노신 활동에 조력자가 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중앙인민정부정무원 부비서장과 전국부녀연합주석, 중국문련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민주당파 중국민주촉진회의 중앙 비서장중앙 부주석 등을 역임하다가 196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910만자에 달하는 노신회의록(魯迅回憶錄)을 완성하였다.

 

110. 어우양쳰(歐陽予倩, 1889~1962

 

1889년 호남성 류양(瀏陽)에서 출생했다. 1907년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춘류사(春柳社)에 들어가 톰아저씨의 오두막과 같은 작품에서 연기를 하기도 했다. 1911년 귀국 후 신극 단체인 춘류극장을 만들어 반봉건혁명 연출을 제창하였다. 같은 해 남사(南社)에 가입하였다. 춘류극장이 해체된 후, 경극 사업을 시작하여 원앙검(鴛鴦劍), 만두암(饅頭庵), 반금련(潘金蓮)등 다수의 작품을 연출하고, 또 그 작품에 출연하였다. 1922년 희극협사(戲劇協社)에 가입하였으며, 단막연극 거센 여자(潑婦), 집에 돌아온 후(回家以後)를 썼다. 1926년에는 영화계에도 뛰어들어 맑고 고운(玉潔冰清), 3년 후(三年以後), 먼 곳의 가희(天涯歌女)를 창작하고 출연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廣州)로 건너가 광동희극연구소(廣東戲劇研究所)를 세우고, 잡지 희극(戲劇)희극주간(戲劇周刊)을 창간했으며, 연극 병풍 뒤(屏風後), 인력거꾼의 집(車夫之家)을 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32년에는 대형 연극 잊지 말아요(不要忘了)와 단막 연극 같이 사는 세 가족(同住的三家人)을 창작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계림(桂林)으로 건너가 유적 대장(流寇隊長)등의 작품을 연출하며 계림의 희극 개혁을 이끌었다. 1944년에는 전한(田漢)과 함께 제1회 서남 희극 전람회를 개최하여 연극, 희곡, 인형극 등 60여 편을 무대에 올리며 항전 희극의 발전에 힘썼다. 항전 승리 후에는 신중국극사와 홍콩영화공사에서 각색연출을 맡아, 경극 도화선(桃花扇)을 연극으로 바꿔 공연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후에는 중앙희극학원 원장과 중국문련 부주석,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11. 메이란팡(梅蘭芳, 1894~1961

 

1894년 북경에서 출생하였으며, 중국의 경극을 해외에 알리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8세부터 경극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 진치분(秦稚芬)과 호이경(胡二庚)을 따라 여자 배역을 배웠고, 10세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곤곡(昆曲)과 무공을 학습하고 경극에서 여자배역 旦角이 맡게 되는 노래, 대사, , 음악, 복장, 화장을 하는 데 있어 자신만의 특색을 만들어 매파(梅派)’라고 불렸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상무위원, 중국문련 부주석,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 중국 희곡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12. 차이추성(蔡楚生, 1906~1965)

 

1906년 상해에서 태어났다. 1929년 몇몇 영화 회사에서 엑스트라, 무대감독, 미술, 스크립터, 조감독, 극작가 등을 거치면서 영화예술 전반에 걸친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1931년 연화영화공사(聯華影業公司)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연출을 맡게 되었고, 이듬해 남국의 봄(南國之春)분홍빛 꿈(粉紅色的夢)을 창작하였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감정적인 정서가 지나치게 풍부하고 당시 엄혹했던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익 영화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33, 중국영화문화협회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을 맡았으며 도시의 새벽(都會的早晨)을 연출하였다. 1934년에 연출한 어광곡(漁光曲)은 강렬한 예술기법과 심오한 사상 전달로 중국영화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모았으며, 19352월에 열린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영예상을 수상하면서 중국 최초로 국제 영화제 수상작이 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고도천당(孤島天堂), 전도만리(前程萬裏)등 전쟁 영화를 제작하였다. 신 중국 성립 이후에는 중국문련 부주석, 중국영화공작자협회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13. 허샹잉(何香凝, 1878~1972

 

1879년에 홍콩에서 태어났다. 1903년 봄 남편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동경 목백 여자대학(東京目白女子大學) 예과에 입학했다가 여자사범학원 예과에 다시 들어갔다. 1905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1908년 본향여자미술학교(本鄉女子美術學校) 고등과에 입학하고, 졸업 후 홍콩으로 돌아와 손문을 도와 혁명 활동을 시작했다. 1913‘2차 혁명실패 후,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4년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에 가입하고, 적극적으로 원세개 타도운동을 벌였다. 1924년 손문의 삼민주의 혁명 강령을 지지하며 중국국민당 개편하였다. 1926,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 부녀부 부장, 광동성 정부 위원 등을 맡았다. 하지만 1927년 장개석의 혁명 반란 후, 국민당의 모든 직위를 내어 놓고 반 장개석 투쟁을 벌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전국 정협 부주석, 화교 사무 위원회 주임, 중국 국민당 혁명 위원회 중앙 주석, 중국 미술가 협회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하향응시화집(何香凝詩畫集)이 있다.

 

114. 마쓰총(馬思聰, 1912~1987

 

1912년 광동 해풍(海豐)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파리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1932년 귀국한 후 요람곡(搖籃曲), 꿈 속 모음곡(內蒙組曲), 티벳음악시(西藏音詩), 목가(牧歌)등을 작곡하였다. 194912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무원으로부터 중앙 음악학원의 초임 원장으로 지목됐다. 19666, 문혁의 바람이 불면서 우파로 몰리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 가족 모두 홍콩으로 도망가서 홍콩 주재 미국 영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도착했다. 이후 미국행을 빌미로 나라를 배반한 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1987년 미국에서 심장 수술의 실패로 520일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15.  사이푸딩·아이쩌무(賽福鼎·艾則孜, 1915~2003, 위그르어Seypidin Eziz

 

1915년 신강(新疆) 아투스(阿图什)에서 태어난 위구르족이다. 1944년부터 신강의 이리(伊犁), 타청(塔城), 아러타이(阿勒泰) 세 지구의 혁명에 참여하였다. 일찍이 세 지구의 군사 법정 비서, 임시정부교육청장, 신강 혁명연합 정부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신강 인민 민주동맹 전진보(前進報)의 총 편집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 위원, 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서북행정위원회 부주석, 신강성 인민정부 부주석, 신강대학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5년에는 중장 계급을 받았고 중국 문련 부주석도 역임한 바 있다. 이후 ‘530’운동과 동맹파업과 수업거부 등에 앞장섰다.

 

116. 양한성(翰笙, 1902~1993

 

190211월에 사천성 고현(高縣)의 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3년에 북경, 상해로 와서 혁명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듬해 10월 상해대학 사회과에 입학하였다. 1924년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25년에 중국 공산당원이 되었다. 1928, 곽말약(郭沫若)의 부탁으로 창조사의 조직을 구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동시에 주간 잡지 유사(流沙), 旬刊 잡지 일출(日出)도 만들었다. 이 시기 마임영(馬林英), 배 위의 하룻밤(趸船上的一夜), 변기 사이(馬桶間)15편의 소설과 여수(女囚), 두 여성(兩個女性), 의용군(義勇軍), 중학생 일기(中學生日記)지천(地泉)삼부곡 등 총 8편의 중편소설을 창작하면서 혁명문예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33년에는 18편의 영화 대본과 8편의 화극 대본을 창작하였다. 1949년에 북경으로 와, 중화전국문학공작자협회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전국영화협회 주석을 맡았다. 1953년 제2차 문대회(文代會)에서 중국문련 비서장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에 창작한 연극 삼인행(三人行)은 문화부 우수 극본 1등상을 거머쥐었지만, 1964년에 만든 영화 북국강남(北國江南)은 강생(康生)과 강청(江青) 등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117. 류즈밍(劉芝明, 1905~1968

 

1905년 봉천 개평(奉天 盖平, 현재 遼寧 蓋州)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29년에 귀국한 후 상해정법대학(上海政法大學), 기남대학(暨南大學)의 교수로 지내면서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중국영토보장대동맹단(中國領土保障大同盟黨團) 서기를 맡았다. 이후 좌익사회과학공작자연맹, 상해반일구국연합회, 상해동북항일 구국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33년 국민당에게 잡혔다가 공산당의 도움으로 4년여 만에 출옥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연안으로 가서 중공중앙당교 정치경제학교 연구실 주임, 교무처 주임, 연안평극연구원(延安平劇研究院) 원장 등의 자리를 맡았다. 경극 핍상량산(逼上梁山), 삼타축가장(三打祝家莊)과 화극동지, 길을 잘못 들었소(同志你走错了路)의 창작과 연출을 맡으면서 모택동의 호응을 얻었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중공중앙동북선전부 부장을 지냈으며, 경극 안탕산(雁蕩山), 미인계(美人計), 평극 소녀서(小女婿)와 연극 신생사물의 앞에서(在新生事物面前)의 창작을 주관하였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는 중국문학예술계 연합회 부주석을 맡은 바 있다.

 

118. 캉줘(康濯, 1920~1991)

 

1920년에 호남성 상음(湘陰)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장사성립중고등(長沙省立高中) 문학연구회에 가입하였으며, 교지 및 通俗報)에 애국주의 성향의 시가와 산문, 소설을 개제하였다. 1937文藝副刊에 산문 故鄉瑣記를 발표하는 한편 공산당 지하 조직이 주관하는 觀察日報에 항일 선전문을 게재하였다. 193810, 연안으로 가서 노신예술학원 문학과 제1기생이 되었다. 졸업 후, 사정(沙汀), 하기방(何其芳) 등과 함께 팔로군을 따라 전지에 들어갔다. 1939년 연안으로 다시 돌아와 노신예술학원 노사 문예단체(路社文藝團體) 부주임을 맡았다. 1940년에는 변구(邊區)의 항일연합회 비서장이 되면서 文化導報, 工人日報, 時代青年의 편집을 하였다. 또한 부평(阜平), 평산(平山) 등지의 농촌을 돌며 세금감면, 토지개혁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 중앙 선전부에 소속되어 人民文藝叢書華北文藝의 편집을 맡았다. 1958, 하북성 문련 부주석을 역임하였고, 1979년에는 하북성 문련 주석이 되었다. 1991년 북경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臘梅花, 災難的明天, 抽地등 변구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항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단편소설과 농촌투쟁을 묘사한 장편소설 水滴石穿, 東方紅등이 있다.

 

119. 우한(吳晗, 1909~1969)

 

   1909년 절강성 의오(義烏)에서 태어났다. 1927년 항주의 浙江대학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상해 오송(吳淞)中國公學에 다시 입학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후스의 신임을 받았다. 1931년 초에 호응린연보(胡應麟年譜)를 완성하였다. 대학 졸업 후 청화대학에서 명대역사 과목의 강의를 맡았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운남(雲南)대학을 거쳐 서남연대(西南聯大)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항일 민주 운동에 참여하다가 19437월에 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에 많은 역사 잡문을 창작하며 국민당의 통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46년 다시 北平으로 돌아온 그는 청화대학과 北平民盟의 주임위원이 되었다. 1949년 이후에는 북경시 부시장, 중국 과학원 철학사회 과학부 위원, 북경시 역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중국역사소총서(中國曆史小叢書)外國曆史小叢書를 주편하기도 하였다. 19599, 논해서(論海瑞), 해서매황제(海瑞罵皇帝)등의 글을 발표하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정신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1960년에는 신편 역사극해서파관(海瑞罷官)을 창작하였고, 그 후 吳南星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전선(前線)삼가촌찰기(三家村劄記)라는 코너를 통해 전문적으로 산문을 게재하였다. 196511, 요문원(姚文元)海瑞罷官을 두고 반당반사회주의의 독초라고 비판하였고, 이어서 三家村劄記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1969년 당국에 잡혀서 감옥 안에서 사망하였다. 1979년 북경시 위원회는 그의 가족에 대한 반당의 불명예를 벗겨주었다.

 

120. 무단(穆旦, 1918~1977)

 

    1918天津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대 탐험자, 목단시집(穆旦詩集)(1939~1945), 깃발()등 세 편의 시집을 출판하였으며, ‘구엽시파(九葉詩派)’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청화대학 영문과를 다니다가 중일전쟁을 피해 곤명(昆明)의 서남연합대학으로 옮겨갔고, 이 시기에 서구 모더니즘에 깊이 경도되었다. 그의 작품은 서유럽의 모더니즘과 중국 전통시가의 특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며 상징과 함축, 사변성이 풍부하다. 194112월에는 그가 창작한 시 찬미(贊美)가 인민교육출판사의 어문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시 창작을 멈추고 외국 시가의 번역에 전념하였다. 주요 번역으로는 러시아 푸쉬킨의 폴타바(波爾塔瓦), 청동의 기사(靑銅騎士), 푸쉬킨 서정시집(普希金抒情詩集), 예프게니 오네긴(歐根·奧涅金), 캅카스의 포로(高加索的俘虜), 영국 바이런의 돈 주앙(唐璜), 바이런 서정시선(拜倫抒情詩選), 바이런 시선(拜倫詩選)등이 있다. 또한 러시아 및 영국의 문예 이론서를 번역하였다.

 

121. 차이치차오(蔡其矯, 1918~2007)

 

    1918년 복건성 진강시(晉江市)에서 출생하였다. 유년시절 가족을 따라 인도네시아로 이주를 하였다. 1938년에 延安魯迅藝術學院 문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華北文藝學院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5년에 종군기자로 전지에 나가 르포르타주를 쓰는 동시에 시 창작도 함께 하였다. 1948년부터 중국내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 연구하였다. 1953년에 北京中央文學講習所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극좌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극좌적 강권을 부정하는 시를 썼고, 결국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1962년 이후부터는 자유시, 민가체시, 고전시사 연구에만 집중하고 시 창작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저작으로는 영풍집(迎風集),쌍홍집(雙虹集),복건집(福建集),영수집(迎水集),취석(醉石),채기교선집(蔡其矯選集)을 비롯한 시집 15권이 있는데, 이 중에서 향토(鄕土)애장(哀葬)두 편의 시는 진찰기변구(晉察冀邊區) 시가 1등상과 2등상을 수상하였다.

 

122. 녜간누(聶紺弩, 1930~1986)

 

    1903湖北省 경산현(京山縣)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상해 고등영문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국민당에 들어갔다. 이후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을 돌며 각민일보(覺民日報), 니얀마신보(緬甸晨報)의 편집인으로 일하였다. 1926년에 국민당의 후원으로 소련의 모스크바 中山大學 대학에 입학하였다. 1928년에 국민당 중앙 통신사 부주임, 신경일보(新京日報)의 부간 우화(雨花)의 편집인으로 일하였다. 1931‘918 사변, ‘文藝靑年反日會를 조직하여 당국의 주시를 받자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19322, 일본에서 호풍(胡風)의 소개로 좌익작가연맹 동경 분회에 가입하였고, 이듬해 일본 좌익문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풀려난 후, 상해로 와서 상해 좌익작가연맹 활동에 가담하였고, 이론연구위원회의 주요 성원이 되었다. 1934년에 중화일보(中華日報)의 부간동향(動向)의 편집위원을 맡았고, 같은 해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에 그의 첫 단편 소설집해후(邂逅)를 출간하였다. 1936년에 호풍, 소군(蕭軍), 소홍(蕭紅) 등과 함께 문학잡지 해연(海燕)을 출간하였고, 1937년에는 한구(漢口)에서 잡지七月을 호풍 등과 함께 만들었다. 이후, 東南戰線, 文化戰士, 野草, 藝文志, 眞報, 客觀, 商務日報, 新民日報등의 편집위원을 역임하였고, 소설집 풍진(風塵), 야희(夜戲),姐姐등을 출간하였다.

    19476월 홍콩으로 건너간 그는 文匯報의 주편을 맡았고, 산문집 沉吟, 巨象, 잡문집 追悼, 二鴉雜文, 血書, 海外奇談, 寸磔紙老虎, 소설집 天亮了, 兩條路등을 창작하였다. 1951년에 북경으로 돌아와 중국 작가협회 이사 겸 고전문학연구부 부부장, 인민문학 출판사 부총편집인 겸 고전부 주임, 중국 문자개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호풍 숙청사업이 있던 19555, 호풍의 오랜 친구라는 이유로 그와 나누었던 서신들을 모두 압수당하였고, 1957년에 우파분자로 낙인찍혀 당에서 제적당하였다. 그는 우파분자로 분류당한 1300여명의 지식인들과 함께 흑룡강 北大荒으로 노동개조를 강요받았다. 1959, 牡丹江 농간국(農墾局)에서 발행했던 北大荒文藝의 편집부 편집위원으로 일하다가 이듬해 다시 북경으로 소환되었으며, 1974년에 결국 인민법원에 의해 무기징역을 판결을 받았다가 1976년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1979년 그의 지위와 명예가 복권되었고 공산당 당적도 회복되었다. 이후, 인민문학출판사 고문, 중국 문련 위원, 중국 작가협회 상무이사 등을 역임하다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작으로는 聶紺弩雜文集),紺弩散文, 三草, 中國古典小說論集, 散宜生詩,高山仰止, 脚印, 聶紺弩舊體詩全編, 聶紺弩全集등이 있다.

 

123. 푸레이위(傅雷於, 1908~1966)

 

    1908上海市 남휘현(南彙縣)에서 출생하였다. 1920년대 초 상해의 천주교가 설립한 徐彙公學에서 공부하다가 반 미신반 종교를 주장하다가 퇴학당했다. 1927년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문학 및 예술평론 수업을 받았다. 1931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였을 때, 로마에서 <국민군 북벌과 북양군벌과의 투쟁 의의(國民軍北伐與北洋軍閥鬪爭的意義)>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며 북양군벌의 반동정치를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1931년 봄 귀국하여 프랑스 문학의 번역과 소개에 힘썼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의 구타와 모욕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인과 함께 자살을 택했다. 그가 번역한 작품은 모두 30여 종으로 프랑스 문학 작품이 주를 이룬다. 그 중 발자크의 작품이 가장 많은데, 고리오 영감(高老頭), 인간 희극(人間喜劇), 외제니 그랑데(歐也妮·葛朗臺)등이 있고,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約翰·克利斯朵夫)외에 볼테르, 메리메 등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124. 하오란(浩然, 1932~2008)

 

    본명은 양금광(梁金廣)이다. 1954河北日報의 기자가 되었고 1956년 북경의 러시아어 신문 友好報의 기자로 일하였다. 같은 해 11, 北京文藝에 처녀작 <희작등기(喜鵲登枝)>를 선보였다. 이후 북방 농촌의 현실과 농민들의 정신을 담은 작품을 창작하는데 힘썼다. 195910월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고, 1961년에는 잡지 붉은 깃발(紅旗)의 편집인이 되었다. 1962년 말부터 장편소설 염양천(豔陽天)을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4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1970년 장편소설 금광대도(金光大道)를 창작하였다. 1973년 중공 제10차 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74년에는 정치적인 요구에 부합하는 중편소설서사아년(西沙兒女)를 썼다. 1977년 북경시 혁명위원회 위원을 맡은 바 있으며 1979년에 열린 전국인민 제4차 문대회에 참여하였다. 1987년에 농촌생활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 창생(蒼生)을 발표하였는데, 새로운 각도로 신시기의 농촌 변화를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중국작가협회이사, 작가협회 북경 분회 전업작가, 중국 대중문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125. 양페이진(楊佩瑾, 1935~)

 

    1935浙江省 제기현(諸曁縣)에서 출생하였다. 19497월 중국 인민해방군에 들어갔다. 1951년 인민군에 속하여 한국 전쟁에 참가하였다. 1957년 문학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고 1958년에 기자로 전향하였다. 남창철도보(南昌鐵道報)의 기자로 재직하는 기간 중에 첫 중편 소설 은색섬전(銀色閃電)을 완성하였다. 1962년 중국작가협회 강서(江西) 분회에 가입하였다. 1963년에 南昌市 문학 작업자 협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1964년에 전쟁 제재로 쓴 중편 아동소설 안홍령하(雁紅嶺下)를 출간하였고, 이듬해 이 소설을 영화 극본으로 각색하여 電影文學에 기고하였으며, 이것을 1966년 장춘영화제작소(長春電影制片廠)에서 영화로 만들었다. 1965년에 지원군 정찰원의 생활을 반영한 장편소설을 완성하였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유실하였다. 1972년 기억을 더듬어 다시 완성하였고, 그 이듬해 출판하였다. ()은 중국 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면서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였고, 영어일어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대표적 단편소설로는 (),기차대합실 속의 봄(候車室裏的春天),燕子飛,紫虹橋畔,편지(),유성(流星)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는 紅塵등이 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 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7) 박영순 2012-09-25 3423
6 80년 이후 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6) 박영순 2012-09-03 2925
5 80년 이후 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5) 박영순 2012-08-20 2888
» 49년 이후~80년 이전 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4) 박영순 2012-07-31 3553
3 49년 이전 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3) 박영순 2012-06-01 3560
2 49년 이전 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2) 박영순 2012-05-11 3514
1 49년 이전 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1) 박영순 2012-04-26 4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