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17)

조회 수 2902 추천 수 0 2013.06.03 14:49:01

481. 한원저우 (韓文洲, 1926~)

 

   1949년부터 작품 창작을 시작한 후 1959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山西文藝火花의 편집부 편집을 맡은 바 있다. 또한 晉東南 지구 문련 주석, 長治시 문련 명예 주석, 山西성 문련 제3회 위원, 산서성 작가협회 상무이사, 산서성 문련 위원, 선서성 작가협회 부주석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작으로는 장편소설 五女傳, 시집 栽瓜曲》,개인 전집 長春嶺, 단편소설집 新媳婦, 凍解花開, 井中栽樹, 長院奶奶, 天門取經記, 藍帕記, 趕花集등이 있다.

 

482. 한스샨 (韓石山, 1947~)

 

   1970山西대학 역사과를 졸업하였다. 잡지 黃河의 부주편, 중공 清徐현 위원회 부서기를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 山西성 작가협회 부주석, 山西文學의 주편으로 있다. 소설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이후 산문, 문학 평론 등으로도 활약하여 문단의 검객(文壇刀客)”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문학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1972년부터 작품 창작을 시작하여 1980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483. 한잉샨 (韓映山, 1933~1998)   

 

   1953保定 1중학을 졸업하였다. 1952년부터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 중국 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일찍이 河北성 문련 편집인, 天津시 문련 편집인, 保定시 군중예술관 창작원, 保定시 문련 주석편집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주요 산문 및 소설집으로는 水鄉散記, 紫葦集, 綠荷集, 串枝紅, 滿澱荷花香, 明境塘, 孫犁的人品與作品등이 있다.

 

484. 항위에허 (杭約赫, 1917~)

 

   1917江蘇 宜興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曹辛之, 구엽시파(九葉詩派) 시인 가운데 한 명이다. 학창 시절 항일 구망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延安 陝北 공학 및 迅藝術學院에서 공부하였다. 1940년부터 현재까지 문화 출판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국공내전 이전에 상해에서 친구들과 함께 월간 詩創造中國新詩을 꾸렸다. 또한 杭約赫라는 필명으로 噩夢錄, 火燒的城, 複活的土地등의 시집을 발표하였다. 1981년에 辛笛 등과 함께 九葉集을 출판하였다.

 

485. 샹페이량 (向培良, 1905~1959)

 

   북경사립 중국대학, 북경 세계어 전문학교를 나왔다. 19265呂蘊儒, 高歌과 함께 鄭州에서 豫報을 만들었다. 북벌군이 武漢을 점령한 후, 무한정부의 기관지인 革命軍日報부간의 편집을 맡았다. 1929년 상해 南華서점의 총 편집인이 되었다. 또한 朱之倬, 戴望舒 등과 함께 青春月刊을 창간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국립 희극학교 연구실험부 주임을 맡았고, 국민 정부 중앙 문화 운동 위원회 제1연극원 순회 교육대 대장을 맡으며 湖南, 廣西 등지를 순회하며 연출을 하였다. 1947년 중국 만세(萬歲) 극단 단장을 맡았다가 이내 그만두고 고향의 洪江 洪達 중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8년 우파로 구획 당하였다가 1979黔陽현 인민 법원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다. 대학재학 시절, 문학 활동에 종사하며 광표사(狂飆社)의 주요 성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노신이 주관한 망원사(莽原社)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신문화를 제창하였으며 항일 구망을 주장하였다. 문예가 생활을 반영한다는 입장을 나타내었고, 경전을 읽는 복고 운동에 반대하였다. 이후 <彪炳千秋>라는 蔣介石을 위한 찬가를 쓰기도 하였다.

 

486. 쉬싱즈 (許幸之, 1904~1991)  

 

   1904江蘇 揚州에서 출생하였다. 1916呂鳳子에게 그림을 배웠다. 1919년 상해에서 미술을 전공하였고, 1923년 상해예술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이후 일본 동경 미술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귀국 후 중화예술대학 서양학과 주임을 맡았다. 1930년대에 좌익문화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좌련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시대미술사(時代美術社)를 조직하였으며 좌련의 미술연합(美聯)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逃荒者, 失業者, 鋪路者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상해 영화제작소 연출, 과학교육[科教] 영화제작소 부소장 등을 맡으며 영화 및 연극 연출작업도 하였다. 중앙 미술학원 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작품으로는 巨手, 海港之晨, 紅燈柿, 偉人在沉思中등이 있고, 許幸之畫集을 출판하였다.

 

487. 예즈 (葉紫, 1912~1939)

 

   본명은 余鶴林으로 1912湖南省 益陽縣에서 출생하였다. 1926武漢 군사학교 제3분교에 들어갔다. 412 정변 후,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와 누이가 피살되어, 홀로 고향을 떠나 남경, 상해 등지를 유랑하였다. 구걸을 하기도 하고 인력거를 끌기도 하며 고된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소학교의 교원 및 신문사의 편집원이 되었다. 1932陳企霞와 공동으로 無名文藝를 창간하였고, 같은 해에 좌련에 가입하며 문단에 들어섰다. 1933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예즈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豐收를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일련의 산문과 소설을 발표하였다. 1935년 자비로 단편소설집 豐收를 출판하였고, 이는 奴隸叢書에 수록되었다. 같은 해에 폐병에 심하게 걸렸는데, 병환 중에도 중편 소설 과 단편소설 山村一夜를 창작하여 출판하였다. 1939년 사망하였다.

 

488. 예딩뤄 (葉鼎洛, 1897~1958)

 

   상해에서 미술을 전공하였다. 1925을 전후하여 長沙 湖南 1사범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또한 趙景深, 田漢 등과 함께 綠波社 長沙 분회를 만들었으며 자비로 蕭湘綠波를 출판하였다. 田漢과 함께 南國社의 주축이 되어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鬱達夫를 도와 大眾文藝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처녀작 白郎的一生은 어디에서 출판되었는지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출판된 소설 前夢은 한 청년 화가의 유랑 생활을 그린 것으로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분노를 잘 묘사하였다. 雙影은 그의 자서전적 소설로 한 청년과 기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다. 주인공의 고독과 실망이 음울한 정서로 표현되었다. 그의 창작 풍격은 鬱達夫의 그것과 흡사하다. 후에 遼寧에서 미술 신문을 꾸리기도 하였고, 開封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지만 이내 직업을 잃고 곤궁한 생활에 빠졌다. 중일전쟁 발발 후 그의 생활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으며 어떠한 작품도 출판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단편 소설집 脫離, 男友, 白癡, 他鄉人語, 중편소설 前夢, 雙影, 烏鴉, 未亡人등이 있다.

 

489. 후산위안 (胡山源, 1897~1988)

 

   본명은 胡三元, 1897江蘇無錫의 한 농촌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920杭州 三江대학을 졸업하였다. 상해 기독교청년협회 출판부 번역원, 河南 開封 中山대학, 杭州 三江대학의 교사, 상해 世界서국 편집원 등으로 일하였다. 신문학 단체 미쇄사(彌灑社)를 만들어, 월간 彌灑彌灑社創作集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40여 가지의 필명을 사용하여 소설, 신시, 산문, 희곡 등 다 방면으로 문학 활동을 펼쳤다. 국공내전 이후 蘇南 문교학원 교수, 福建 사범학원 중문과 주임, 蘇北 사범 전문학교 및 상해 사범학원 중문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84년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제4차 전국 작가 대표 대회의 명예대표가 되기도 하였다. 1988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490. 후셴수 (胡先驌, 1894~1968)

 

   1894江西 南昌에서 출생하였다. 12세에 이미 史記漢書를 통독하였다. 京師대학당 예과에 들어갔다. 1912년 동서양 유학 고사에서 1등을 하며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과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 농업과 식물학을 연구하였다. 1916년 중국으로 돌아왔다가 1923년에 다시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하버드 대학에서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南京 고등사범학교, 東南대학, 북경대학, 북경사범대학 등에서 교수를 맡았다. 신 중국 설립 이후 중국 과학원 식물 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였다. 중국 식물학 연구, 특히 식물 분류학, 고식물학 및 경제 식물학 분야의 연구에 있어 혁혁한 성과를 가져왔다. 1928년부터 중국 과학원 생물 연구소, 靜生 생물 조사소, 廬山 식물원, 雲南 농림 식물원 연구소 등 과학 연구 기관을 설립하며 중국 식물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1923鄒秉文, 錢崇樹와 함께 중국 최초로 高等植物學을 저술하였다. 種子植物分類學講義, 中國植物分類學, 經濟植物學등의 저작을 남겼다.

 

491. 후예핀 (胡也頻, 1903~1931)

 

   1903福建 福州에서 출생하였다. 1920년 상해로 가서 胡崇軒으로 개명하고 浦東 중학에 들어갔다. 이듬 해, 大沽口 해군학교에서 기계 제조를 배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북경을 유랑하였는데, 이때 머물던 아파트 주인에게 잡일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한다. 같은 아파트에 있던 대학생들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과 외국 문학에 대해 흥미를 갖고 여러 작품들을 열독하였다. 1924京報부간이었던 民衆文藝周刊의 편집 과정에 참여하면서 이 잡지에 소설 및 단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여름 丁玲을 알게 되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대혁명 기간 중 그는 투쟁이라는 시대의 키워드에서 벗어나 고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상실과 허무를 주정서로 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1928년 상해에서 沈從文과 공동으로 中央日報의 부간이었던 紅與黑의 편집을 맡았으며 이 잡지에도 역시 시와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9년 경제적인 이유로 상해를 떠나 濟南 山東 성립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였다. 그는 학교 안에 문학 연구회를 조직하고 유물사관 및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연구하였다. 이 시기 그는 과거 자신이 펼쳤던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문학이 사회 혁명에 미치는 중요성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혁명 지식인이 가야할 길을 제시했던 소설到莫斯科去도 그의 이러한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후 중국좌익작가연맹에 들어가며 좌련의 집행 위원, 공농병 문학위원회 주석 등을 맡았다. 이 시기 장편소설 光明在我們前面을 써서 공산당원의 험난한 혁명 투쟁 과정을 그렸다. 1931년 동방여사(東方旅社)에서 제1차 전국 공농병 대표대회 예비회의에 참여했을 당시 국민당에 의해 체포되었고, 27일 좌련의 회원이었던 柔石, 殷夫, 馮鏗同 등과 함께 상해에서 살해당했다.

 

492. 후정 (胡征, 1917~)

 

   1917河南省 羅山縣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胡秋平이다. 유년 시절 약국의 도제 및 농림국의 견습생으로 있었다. 1935河南 信陽豫南民報에 그의 처녀작인 서정시 <Sonnet>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에 첫 번째 단편소설 徒弟를 발표하였다. 1936河南 信陽春潮시간(詩刊) 주편을 맡았다. 1938년 혁명에 가담하였고, 8월에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다. 같은 해에 延安 항일 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 들어갔고, 이듬해에 노신예술학원에 들어갔다. 팔로군 115사단 기술 서기편집간사, 延安 시정부 편집원으로 일한 바 있다. 국공내전 시기에는 제2야전군 기자 및 文藝工作의 주편을 맡았다. 1953년 북경의 解放軍文藝의 소설 조장이 되었다. 1955胡風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며, 출옥 후 延河의 편집을 맡았으며 하방 되어 농촌에서 노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0陝西省 사회과학원에서 주최하는 문학연구 활동을 하였다. 퇴직 이후에도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1948李南力, 黎風 등과 함께 東北 光華서점에서 합동 단편소설집 未婚夫婦을 출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에는 시, 단편 소설 등을 발표하였는데, 소설집 紅土鄉記事, 장편시 <七月的戰爭>, <大進軍> 등이 그것이다.

 

493. 후정 (胡正, 1924~2011)

 

   1924山西 靈石에서 출생하였다. 1938晉西南 여량극단(呂梁劇社)에 가입하였고, 후에 延安 노신예술학원, 부대예술학교에 들어갔다. 팔로군(八路軍) 120사 정치부 전투극사 편집 간사, 晉西北 항일구국연합회 문화부 문예 공작단 간사, 晉南日報기자, 重慶 新華日報부간 부조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중앙문학연구소에 들어갔고, 이후 山西省 문련(文聯)에서 山西文藝의 주편을 맡았다. 또한 山西省 정협 제45차 위원 및 중국작가협회 제4회 이사를 역임한 바 있다. 1943년 작품 창작을 시작하였고, 주요 작품으로 단편소설집 摘南瓜, 七月古廟會, 중단편 소설집 幾度元宵, 산문 르포르타주 문학집 七月的彩虹, 장편소설 汾水長流, 明天清明胡正文集이 있다. 1992山西성 위원회를 역임하였고, 성 정부로부터 인민작가의 칭호를 얻었다.

 

494. 홍링페이 (洪靈菲, 1902~1934)

 

   1902廣東 潮州의 빈곤한 농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필명은 林曼青, 林阴南, 李铁郎 등이 있다. 광동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을 하였으며, 재학시절 적극적으로 혁명활동에 참여하였다. 대혁명 실패 이후, 국민당의 지명수배를 받고, 싱가포르 등을 떠돌았다. 我们月刊출판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0년 좌익작가연맹 성립 당시 7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33년 국민당에 의해 수감되었고, 1934년 추석을 전후하여 南京雨花臺에서 총살당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流亡, 前线등이 있다.

 

495. 홍선 (洪深, 1894~1955)

 

   1894江蘇 武進의 관료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북경 清華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시절 적극적으로 신극(新劇) 활동을 하였다. 1915년 극본창작을 시작하였고, 처녀작 賣梨人을 완성하였다. 1916清華학교 졸업 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도자기 과정을 이수하였는데, 이때에도 극본 각색을 계속하였다. 1919년 하버드 대학 연극 연습반에 들어가 연극 활동 주력했다. 1921張彭春와 함께 영문판 木蘭從軍을 썼다. 1922년 귀국한 후, 이듬해에 처음으로 희곡 趙閻王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 연극에서 자신이 주인공을 맡았다. 1923년 희극협사에 가입하였고, 연이어 潑婦, 終身大事등을 시연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현대 화극의 실험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연출자의 역할을 새롭게 정하고 리허설을 엄격하게 하며 남녀가 함께 무대에 오르도록 하였다. 또한 무대의 배경 역시 입체적인 세트로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실험들이 당시 중국에서는 처음 행해지는 것이었다. 문명희(文明戲)가 현대 화극으로 향하는 과도적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1928년 그는 화극(話劇)”으로 당시의 희극을 통칭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같은 해에 남국사(南國社)에 가입하였다. 이후 복단대학, 暨南대학, 山東대학, 中山대학, 廈門대학, 북경사범대학 등에서 교수를 맡았다. 대표작으로는 五奎橋, 香稻米, 青龍潭등이 있다.

 

496. 화린 (華林, 1893~1973)

 

   본명은 挺生이다. 1918浙江성 교육회 간사를 역임하였다. 54 운동 중 杭州에서 동맹 파업에 참여하였다. 1920년 상해에서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러시아어를 익혔다. 1921년 이르쿠츠크(Irkutsk)의 제3 국제 동방국(東方局)에 갔으며, 1922년 모스크바 東方대학 중국반에 들어갔다. 1923羅亦農 등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4년 귀국하여 杭州, 上海, 寧波 일대에서 공산당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1927년 북벌군이 항주를 점령하자 당의 지시에 따라 항주 노동조합 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28金華山 지역으로 폭동을 조직하러 파견되었지만, 당과의 연락망이 끊어져 3년 동안 이곳에서 살다가 후에 탈당을 하였다. 1931918 사변 후, 친구의 소개로 상해 開明서점에 들어가 6년 동안 일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丁玲, 宋雲彬 등과 교류하였다. 중일전쟁이 끝나고 다시 富陽으로 돌아갔다. 1947년 현립 초중학교의 교원으로 있었으며 富陽이 해방하고 나서 당 조직의 명령에 따라 지방 인사의 신분으로 반공 구국군(反共救國軍)”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군대를 따라 토비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1950년에 富陽 각계 인민대표회의 대표, 수리(水利) 위원회 위원, 지역 교육위원회 주임 위원 등을 맡았다. 1973년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497. 화한 (華漢, 1902~1993)

 

   1902四川省 高縣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華英雄이다. 1925년부터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였고, 1952년에 중국 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일찍이 530운동에 참여한 바 있고, 상해대학 중공당 지부 서기, 중공 閘北구 위원회 서기, 黃埔군관학교 정치부 비서, 국민혁명군 제46군 정치부 비서 등을 역임한 바 있다. 1927南昌봉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8년 창조사(創造社)에 들어갔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좌련, 문총조직부(文總組織部) 서기를 맡았다. 중일전쟁 기간 중에는 문협이사, 극협(劇協) 및 영협(影協) 상무이사, 중국영화제작소 편집위원회 주임위원, 중화극예사(中華劇藝社), 상해 聯華영화예술사 주임위원으로 있었다. 1949년 이후에는 중화영화인협회(中華電影工作者協會) 주석, 정무원 문교위원회 부비서장, 대외 우호협회 부회장, 중국문련 부주석비서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시나리오 八百壯士, 日本間諜, 青年中國, 中國海的怒潮, 鐵板紅淚錄, 逃亡, 生之哀歌, 生死同心, 夜奔, 塞上風雲, 萬家燈火, 三毛流浪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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