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스(胡適, 1891~1962)

 

  18911217일 안휘성 적계현(績溪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학자, 시인, 역사가, 문학가이자 철학가이다. 문학혁명을 제창하였고 신문화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다. 중국 자유주의의 선구자로서 신청년을 진지로 삼아 민주, 과학을 선전하고 프래그머티즘 교육이론의 보급에 힘썼다. 그의 프래그머티즘 적용에 의한 국고정리 운동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14년 미국 코넬 대학교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유심주의 철학가 듀이에게 사사 받으며 그의 실용주의 철학을 수용하였다. 1917년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북경대학 교수를 역임하는 한편, 신청년편집부에 가담하여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개성자유, 민주와 과학을 선전하였으며 문학개량과 백화문학을 적극 제창하였다. 그 해 신청년에 발표한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는 백화로 문언문을 대체하자는 주장이었다. 5·4 시기에는 이대교(李大釗) 등과 문제와 주의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에서 1933년까지 주로 중국고전소설의 연구 고증에 몰두하였고 항일전쟁 초기에는 국민당의 국방참의회의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938년에는 주미 중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항전 승리 후 북경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중공정부 수립 직전에 미국으로 망명, 대만으로 건너가 중앙연구원 원장, 국민정부 총통부 자정(資政) 등의 요직을 거쳤다. 한편, 1954년 호적의 학술사상을 자산계급유심주의라고 비판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1962년 타이완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저서로 중국 철학사 대강(1919), 상시집(嘗試集)(1921), 백화문학사(1928), 호적문존(胡適文存)(1930)과 자서전 사십자술(四十自述)(1933) 등이 있다.

 

2. 천두슈(陳獨秀, 1879~1942)

 

  1879108일 안휘성 회녕현(懷寧縣)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국 현대 사상가, 혁명가이자 정치가이다. 일본 및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1916년 상해에서 신청년발간에 참여하였다.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으로서 1917신청년<문학혁명론>을 발표하였다. 문학혁명은 언어형식과 사상내용의 결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5·4신문화 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21년에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중앙당서기에 피선되었다. 1922년 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과의 연합전선 수립과 코민테른 가입 등을 결의하고, 당 기관지 향도주보(嚮導週報)를 발간하였다. 그 해 11~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코민테른대회에 참석한 후 중국 국민당과 합작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랐다. 1925년 중국 국민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국민당에서 집단 탈당하려고 하였으나 코민테른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까지 당 중앙총서기직을 연임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자 코민테른은 합작실패의 책임을 물으며 총서기직에서 축출하였다. 1929년 당적을 박탈당하자 ‘<당의 동지들에게 고하는 글(告全黨同志書)>’을 발표, 코민테른의 중국혁명 지도에서의 오류와 당시 당 중앙의 오류를 규탄하여 트로츠키파로 지탄받았다. 1933년 상해에서 당 조직을 획책하다가 체포·구금되어 1939년 출옥하였다. 만년에는 사상적인 전환을 가져와 영·미식 민주주의를 찬성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였으며, 1942년 병사하였다.

 

3. 쳰쉔통(錢玄同, 1887~1939)

 

  1887912일 절강성 오흥현(吳興縣)에서 출생하였다. 언어문학개혁활동가, 문자음운학자, 사상가이자, 5·4 신문화운동의 제창자 중 한 명이다. 1906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908년에는 노신, 황간(黄侃) 등과 함께 장병린(章炳麟)에게 국학을 수학하면서 음운학, 훈고학, 설문해자(說文解字)》등을 공부하였다. 1910년 귀국 후, 북경대학 교수를 역임하는 한편 신청년》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어문개혁활동, 문자, 음운학과 설문연구 등 언어문자학 방면의 공헌이 매우 크다. 그는 백화문을 견지하자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신청년 진독수의 백화문 편지를 게재하고 사람들에게 백화문으로 글을 지을 것을 호소했다. 신청년역시 그의 제창과 영향 하에 1918년 제4권 제1호부터 백화문으로 출판되었다. 한편, 국어운동의 적극적인 참여자이기도 하였다. 1917년 국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었다. 여금희(黎錦熙)와 함께 1925년에 국어주간(國語周刊)을 창간하고, 1932년에는 중국대사전을 편찬하였다. 오치휘(吳稚)가 쓴 국음자전(國音字典)을 편집·교열하기도 하였다. 1939117일 북경에서 병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신학위경고서(新學僞經考序), 설문단주소전(說文段注小箋), 문자학음편(文字學音篇)등이 있다.

 

4. 루쉰(魯迅, 1881~1936)

 

  본명은 주작인(周樹人)이다. 1881925일 절강성 소흥(紹興)의 관료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택동은 그를 위대한 무산계급문학가, 사상가, 혁명가이자 중국문화혁명의 主將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13세 되던 해에 관료로 있던 조부가 과거 부정시험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고 장기간의 투병생활을 하던 부친마저 사망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가세의 몰락으로 인해 유년기부터 세상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98년 남경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에 입학,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졸업 후 일본으로 가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유명한 환등기 사건을 겪은 후 의학의 길을 포기하고 국민성 개조를 위해 문학으로 눈을 돌린다. 그 무렵 유럽의 피압박 민족 및 슬라브계 작품에 공감하여 동생 주작인(周作人)과 함께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을 번역하는 한편, 망명 중인 장병린에게 사사하였다.

  귀국 후 1918신청년최초의 백화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하여 가족제도와 예교의 폐해를 폭로하였다. 이어 공을기(孔乙己), 고향, 축복등의 단편소설 및 산문시집 야초(野草)를 발표하여 중국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특히 아큐정전(Q正傳)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다. 창작 외에도 많은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였고, 1920년 이후에는 북경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교단에 서기도 하였다. 1924년 주작인과 어사사(語絲社)를 조직하고, 1925년에는 청년문학자들과 미명사(未名社)를 조직하였으나 북양군벌의 문화 탄압과 3·18 사건으로 인해 북경을 탈출하여 광동으로 갔다. 1927년 가을 상해 조계에 숨어 제자 허광평(許廣平)과 동거하며 문필생활에 몰두하는 한편, 창조사(創造社), 태양사(太陽社)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그룹 및 신월사(新月社) 등 우익그룹과의 논쟁을 통해 상해 문단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해나갔다. 항일 전쟁이 격화된 후에도 문단 내에서 벌어진 여러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 폐병이 악화되어 숨졌으며 수많은 군중과 작가들이 애도하였고, 그를 민족혼으로 추대하였다. 대표작으로 광인일기, 아큐정전, 고향, 야초등이 있다.

 

5.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

 

  18891029일 하북성 낙정현(樂亭縣)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천진북양법정전문학교(天津北洋法政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겨울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유학생총회의 애국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16년 귀국 후, 북경의 진보 신문 신종보(晨鍾報)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신문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신기원(新紀元)>, <나의 마르크스주의관>, <문제와 주의를 다시 논한다> 등 수십 편의 글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다. 19203월 북경대학에서 마르크스학설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성립된 후에는 당 중앙 대표를 맡아 북방 지역의 공작을 지도하였다. 1926년 북경에서 일어난 일·영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군벌인 장작림과 오패부(吳佩孚)에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북양군벌 단기서(段祺瑞) 정부가 도모한 ‘3·18 사건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당의 북방 조직을 이끌며 혁명투쟁을 견지하였다. 1927426일 장작림은 소련대사관에 진입하여 숨어 있던 이대교 등 80여명을 체포하였고, 28일 처음으로 그를 처형하였다. 당시 향년 38세였다. 북경향산만안공원묘지(北京香山萬安公園墓地) 안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묘비에는 중공중앙이 쓴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 있다. “이대교는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이며, 중국공산당의 주요 창시자 중 한명이다. 그는 모든 혁명가의 영원히 빛나는 모범이 되었다···.”

 

6. 류반농(劉半農, 1891~1934)

 

  1891529일 강소성 강음(江陰)의 지식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5·4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명이며, 중국 현대 저명한 문학가, 언어학자이자 교육가이다. 동시에 중국어의 이론적 기초를 다진 사람이기도 하다. 1911년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1912년 상해로 와 원앙호접파의 잡지에 투고하며 생활하였다. 1917년 북경대학 법과대학 교수를 하면서 동시에 신청년의 편집 일도 맡았다. 문학혁명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였으며 문언문에 반대하고 백화문을 제창하였다. 1920년 영국 런던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실험언어학을 전공하였다. 1921년 여름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5년에 프랑스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저작 한어자성실험록(漢語字聲實驗錄)으로 콘스탄틴 언어학상을 수상하였는데, 중국 언어학사상 최초의 해외 수상이었다. 1925년 가을 귀국하여 북경대학 중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언어학도 강의하였다. 1926년 시집 양편집(揚鞭集)》, 와부집(瓦釜集)을 출판하였다. 1934년 북경에서 병사하였다.

 

7. 마오둔(茅盾, 1896~1981)

 

  원래 이름은 심덕홍(沈德)이고 자는 빙안(雁冰)이다. 189674일 절강성 가흥동(嘉興桐)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저명한 작가, 문학평론가, 문화활동가이자 사회활동가이다. 5·4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며 중국 혁명문예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일곱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뜨고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북경대학을 중퇴하고 상해 상무인서관에 취직하였으며, 소설월보(小說月報)를 개혁하는 한편 1921사실주의 문학과 인생을 위한 문학을 이념으로 표방한 문학연구회의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 해 공산당에 가입한 이후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글과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문학 이론을 발표했다. 후에 광주로 내려가 국민당 제2차 대표대회에 참가하고 국민당 중앙선전부 비서를 역임하였다. 당시 선전부 부장은 모택동이었다. 1927()삼부곡-환멸,동요,추구를 발표하였다가 혁명문학파의 비판 대상이 되자 1928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30년 귀국 후에는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여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공정부 수립 후에는 중국문련 부주석, 문화부장, 작가협회 주석으로서 문예계를 지도하였으며, 문화혁명 때는 영화화된 그의 소설 임씨네 가게(林家鋪子)비판을 받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문화부장직에서 해임된 후 19764인방이 몰락할 때까지 확인된 공식 활동은 없다. 대표작으로는 식삼부곡,임씨네 가게,자야(子夜),농촌삼부곡(農村三部曲)(春蠶,秋收,殘冬》),부식(腐蝕)등의 소설과 극본 청명전후(淸明前後)등이 있다. 1981년 사망하였다.

 

8. 청팡우(成仿吾, 1897~1984)

 

  1897824일 호남성 신화현(新化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무산계급혁명가, 교육가, 문학가이자 번역가이다. 5·4 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명이다. 1910년 일본 도쿄대학에 입학하였고 1921년 졸업 후 귀국하였다. 5·4운동 후에 곽말약(郭沫若), 욱달부(郁達夫) 등 일본과 국내에서 반제·반봉건 운동에 투신하던 사람들과 함께 상해에서 혁명문학단체인 '창조사'를 설립하였다. 1924년에서 1927년까지 광동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을 지냈다. 당시 혁명의 중심지인 광동에서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 등 공산당원 및 노신 등 혁명문화인사와 교류하였다. 대혁명 실패 이후 유럽으로 가 혁명운동을 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였다. 19288월 파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중공의 베를린·파리지부 기관지인 적광(赤光)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19319월 귀국한 이후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였다. 193410월 대장정에 나서 193510월 섬북(陕北)에 도착한 이후 공산당이 세운 섬북공학(陕北公學)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당의 교육사업 부문에 종사하였다. 연안 시기에 공산당선언, 고타강령(Gothaer Programm)비판(哥達綱領批判), 사회주의-공상에서 과학으로(社會主義從空想到科學),반 뒤링론反杜林論등 마르크스주의 경전들을 번역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인민대학, 동북사범대학과 산동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845월 북경에서 향년 87세로 병사하였다.

 

9. 궈모뤄(郭沫若, 1892~1978)

 

  18921116일 사천성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공산당원이자 저명한 무산계급문학가, 시인, 극작가, 고고학자, 사상가, 고문자학자, 역사학자, 서예가이자 혁명가, 사회활동가로 국내외로 명성을 날렸다. 중국 신시(新詩)의 기반을 닦았으며 노신 이후 혁명문학계의 공인된 지도자가 되었다. 1914년 봄 일본으로 가 제1고등학교 예과에서 일본어를 배운 후 1915년 오카야마(岡山)의 제6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일본 여자와 결혼하였다. 1918년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의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5·4운동의 자극과 W.휘트먼, 타고르, 괴테 등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대표 시집으로여신(女神)을 들 수 있다. 여신에서 중국 전통시가의 속박에서 벗어나 5·4 시대정신을 반영한 중국문학사상 최초의 신시를 구현하였다. 1927년 장개석 사령부 지휘하의 북벌군 총 정치부 주임으로 일하였으나 이후 장개석을 성토하는 격문을 쓰고 남창봉기에 참여하였다.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가 19282월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일본에서 갑골문, 금문(金文)을 연구하며 1930중국고대사회연구를 편찬하였고 1937년 항일전쟁 발발 후 귀국하였다. 1948년 국공내전 기간 중앙연구원 원사를 지냈다. 신 중국 성립 이후에는 문학창작에 매진하여 역사극 채문희(蔡文姬), 무측천등 여러 편의 작품을 썼으며, 노예제 시대에서는 중국 노예제와 봉건제의 분기를 춘추와 전국시대로 나누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중앙인민정부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문화교육위원회 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부위원장, 중국과학원원장, 중국과학원철학사회과학부주임, 역사연구소 소장, 중국과학기술대학 총장, 중국 문련 주석, 중국공산당 제9, 10, 11기 중앙위원, 2, 3, 5기 전국 정협 부주석 등 요직을 맡은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양주금문사도록고석(兩周金文辭圖錄考釋),금문총고(金文叢考),복사통찬(卜辭通纂등이 있으며, 주요 문학 작품으로는 시집 여신, 성공(星空), (), 전모(前茅), 회복(恢復)등과 산문 나의 유년(我的幼年), 반정전후(反正前後), 창조십년(創造十年), 북벌도차(北伐途次)및 희극 세 명의 반역 여성(三個叛逆的女性), 굴원(屈原), 호부(虎符), 당체지화(棠棣之花), 고점리(高漸离), 채문희, 무측천등이 있다. 이 외에도 괴테 시 번역집인 Faust가 있다. 1978년 향년 86세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10. 메이광지(梅光迪, 1890~1945

 

  안휘성 선성(宣城)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20년에 귀국하였다. 당시 하버드 대학에서 배빗(Babbitt)에 의해 신인문주의가 제창되었는데 그 영향을 받았다. 1909년 친지의 소개로 알게 된 호적과 유학기간 중에 편지를 왕래하면서 고학(古學), 공교(孔教)를 부흥시키는 것과 문학혁명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귀국 후 남개(南開)대학 영문과 주임을 거쳐 1921년 동남(東南)대학 서양어과 주임을 역임하였다. 이때 잡지학형(學衡)을 창간하고 구학(舊學)을 널리 알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다.”는 구호를 제창하였다. 1924년 미국으로 돌아가 강의하였으며 1927년 귀국 후 중앙대학(원래 동남대학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서구 고대의 중요한 학술문예를 널리 알려 중국인이 서구문화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이로써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적절한 방법을 찾도록 하였다. 또한 교육을 중시하고 인문수양을 제창하였으며 학생들에게 유려한 문장과 아름다운 필치를 요구하였다. 1945년 귀양(貴陽)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주요 중문 저작은 매광적문록(梅光迪文錄)에 실려 있고, 영문 저작은 가신집(家信集)》, 문학연강집(文學演講集)에 수록되어 있다.

 

11. 우미(吳宓, 1894-1978)

 

  1894년 섬서성 경양현(涇陽縣)에서 출생하였다. 저명한 서양문학가이자 국립 동남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1723살의 나이로 하버드 대학에서 서양문학을 전공하였다. 10여년의 미국 유학 기간 중에 19세기 영국문학 특히 낭만파 시인의 작품에 대해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올렸다. 1926년 귀국하여 국립 동남대학 교수가 되었고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는 한편 희랍문화, 기독교문화, 인도불교문화와 중국 유가학설의 4대 전통을 비교 연구하였다. 1921년 매광적(梅光迪) 등과 함께 잡지 학형을 창간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적 신구(中國的新與舊>, <논신문화운동(論新文化運動)>과 같은 논문을 썼는데, 여기에서 고전주의의 잣대로 신체(新體 )자유시를 평가하고 중국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함으로써 중국의 배빗을 자처했다. 이후 청화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해방이 되자 대만 대학의 문학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물리치고 신설된 사천교육학원의 교수를 맡게 되었다. 문혁 기간 중에 비판투쟁의 대상이 되어 76세의 노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중노동과 조리돌림을 강요받았다. 이에 병을 얻어 문혁이 끝난 1978년 별세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오복시문집(吳宓詩文集), 공헌시화(空軒詩話)등이 있다.

 

12. 장스자오(章士釗, 1881~1973)

 

  1881320일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출생하였다. 민주인사, 학자, 작가, 교육자이자 정치활동가이다. 1901년 고향을 떠나 무창(武昌)과 남경 등지에서 수학했으며 19034‘반러운동(拒俄運動)’이 발발하자 상해로 가 채원배 등이 조직한 군사민교육회(軍事民敎育會)에 가입하였다. 1905년 일본을 거쳐 1907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북경대학 교수, 북경농업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갑인파(甲寅派)의 대표 인물로 북양군벌정부의 교육부 총장 겸 사법 총장을 맡고 있을 무렵,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신문화운동을 공격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신문화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고 학교 당국의 복고적인 조치들을 지지하였으며 독경구국(讀經救國)’을 제창하면서 소학교 4학년부터 독경 과목을 부활시키고 백화문으로 작문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1925년 과거에 창간한 바 있는 갑인(甲寅)잡지를 복간한 후 <신문학운동을 평함(評新文學運動)>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여 신문학운동과 백화문을 반대하는 주장을 하였으며, 이로써 갑인半官報라 불리게 되기도 하였다. 이 후 국공합작을 위해 분투하였고 해방 후에는 모택동의 허락 하에 북경에서 거주하며, 양안관계 개선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중앙문사연구관(中央文史硏究館) 관장을 역임하였으며, 2, 3차 전국 정협 상임위원과 제3차 전국인민대회 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13. 정전퉈(鄭振鐸, 1898~1958)

 

  18981219일 절강성 영가(永嘉)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작가이자 학자, 문학평론가, 문학사가, 번역가, 예술사가이며 유명한 수집가이자 훈고학자이기도 하다. 1917년 북경철도관리전문학교(, 북경교통대학)에 입학하였고, 1919년에는 5·4운동에 참가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심빙안(沈雁冰)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 설립을 발기하였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편집인, 소설월보(小說月報)주편, 상해대학교 교수, 공리일보(公理日報)주편 등을 역임하며, 당시 신문화운동에 반대하는 학형파갑인파의 주장을 비판하는 문장들을 발표하였다. 1927년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하고 귀국한 후에는 북경대학, 청화대학 등의 교수를 하였고, 세계문고(世界文庫)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1937년 문화계구망협회(文化界救亡協會)에 참가하였으며 호유지(胡愈之) 등과 함께 복사(復社)를 조직하여노신전집을 출판하였다. 해방 후에도 중국문련과 작가협회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581017일 중국문화대표단을 이끌고 출국하는 도중 갑작스런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 고양이(), 우리는 소년(我們是少年)등이 있다.

 

14. 위다푸(郁達夫, 1896~1945)

 

  1896127일 절강성 부양(富陽)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도쿄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19216월 곽말약(郭沫若), 성방오(成仿吾), 장자평(張資平), 전한(田漢), 정백기(鄭伯奇) 등과 함께 도쿄에서 창조사(創造社)를 조직하였다. 그해 7월 단편소설집 침륜(沈淪)을 발표하면서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22년 초 귀국하여 창조계간(創造季刊)의 창간호 발간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7월 소설봄바람에 취한 저녁(春風沉醉的晚上)을 발표하였다. 1923년에서 1926년까지 북경대학, 무창대학, 광동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26년 국민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현실과 맞지 않는 섬세함으로 인해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이어 창조월간(創造月刊)홍수(洪水)의 편집을 담당하였으나, 결국 좌경화된 창조사를 탈퇴하고 점차 문단과 멀어져 은둔의 문인생활을 하였다. 1926년 말 출판사 일에서 손을 떼고 소설론(小說論), 희극론(戱劇論)등과 같은 문예이론 저작을 발표하였다. 1928년 태양사(太陽社)에 가입하여 노신의 지지 하에 대중문예의 주편을 역임하였고 19303월에는 좌련의 성립에 참가하였다. 19334월 항주로 옮긴 후 많은 산수유람기와 시사(詩詞)를 창작하였다. 1938년에는 항일전쟁에 참가하여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의 상무이사로 선출되었다. 이후 구국운동에 활약하다가 싱가포르로 건너가 성주일보(星州日報)를 편집하였는데, 종전 직후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다고 전한다. 대표작으로 침륜, 과거, 자전(自傳)등이 있으며 암울하고 감상적인 색채가 짙다. 세상을 떠난 뒤 신문학전집의 제1권으로서 《욱달부선집이 간행되었다. 1952년 중앙인민정부는 그를 혁명열사로 추대하였다.

 

15. 셰성타오(葉聖陶, 1894~1988

 

  18941028일 강소성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였다. 저명한 작가, 교육가, 편집가, 문학출판가이자 사회활동가이다. 5·4 운동 이전에는 이대교, 노신 등이 지지하는 신조사(新潮社)에 참가하였다. 1921년 정진탁,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주자청(朱自淸) 등과 함께 중국 신문단사상 최초의 시 잡지인 를 발간하였다. 1923년 상해 상무인서관에 취직하여 편집출판 일에 종사하였다. 소설월보등의 주편을 맡는 한편, 문학창작에도 힘을 쏟아 장편소설 예환지(倪煥之)와 많은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개명(開明)서점에서 일하며 잡지 중학생의 주편을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1930~40년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청년잡지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낳았다. ‘9·18사변이후 적극적으로 구국항일운동에 뛰어 들어 문예계반제항일대연맹(文藝界反帝抗日大聯盟)’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개명서점의 편집을 맡으며 구사회의 암흑과 인민의 비참한 생활을 해부하고 민족해방투쟁 중의 불굴의 민중을 그려낸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해방 후에는 출판총서의 부서장, 인민교육출판사 사장, 교육부 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제5기 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이자 5기 정협 당위위원, 民進중앙주석을 역임하였다. 1988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 동화집 고대영웅의 석상(古代英雄的石像), 볏짚사람(稻草人)과 소설집 엇갈림(隔膜), 화멸(火滅)등이 있다.

 

16. 왕통자오(王統照, 1897~1957)

 

  자는 검삼(劍三), 산동성 제성(諸城) 출생이다. 1918년 중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했다. 1918부녀잡지에 백화소설인 기념을 발표하는 한편, 서광(曙光)을 창간하였다. 1921년에는 정진탁,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여 인생을 위한 예술을 제창하였다. 1922년에는 5·4 이래 최초의 백화문 장편소설 일엽(一葉)과 이듬해 황혼을 발표하면서 비평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두 편의 장편소설은 반봉건사상을 다룬 작품으로 신사, 상인, 지주계급의 죄악을 폭로하고 능욕을 당하는 여인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이후 상해와 청도 등에서 문학활동을 하였다. 1933년 발표한 장편소설 산우(山雨)로 이름을 떨쳤다. 여기에서 북방 농촌의 제국주의, 봉건세력, 군벌의 복합적인 억압과 이로 인해 몰락해가는 농촌경제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로 인해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자 유럽으로 떠났다가 귀국 후에 장편 시 구월의 바람(九月風)유럽유기(歐游散記)를 발표하였다. 1935년에는 문학월간 주편을 역임하였다. 항일 전쟁 발발 후 상해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개명서점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해방 후에는 산동성 중국문련 주석, 산동대학 중문과 주임, 산동성 문화국 국장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일엽, 황혼등과 수필집 변로문담(爐邊文談), 시가집 작화소집(鵲華小集)》과 왕통조단편소설선(王統照短篇小說選)등이 있다. 1957년 병사하였다.

 

17. 저우쭤런(周作人, 1885~1967)

 

  절강성 소흥(紹興) 출생이다. 노신의 동생으로 중국 현대 저명한 산문가, 문학이론가, 평론가, 시인, 번역가, 사상가이자 중국민속학의 개척자이다. 신문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남경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을 졸업한 후 1906년 일본의 리쿄(立敎)대학에서 영문학·그리스어 등을 배웠다. 또 일본에 망명 중인 저명한 학자 장병린(章炳麟)에게 수학하였으며 형 노신과 공동으로 유럽 근대문학을 번역하여 역외소설집2권을 출판하였다. 1912년 귀국하여 절강성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고, 1917년 북경대학 문과대 교수가 되었다. 문학혁명 운동 때 잡지 신청년에 러시아, 일본의 문학 사조를 소개하였으며, <인간의 문학(人的文學)>, <사상혁명(思想革命)> 등의 평론을 통해 언문일치론(言文一致論)을 둘러싸고 비등했던 운동에 개인주의적 휴머니즘의 의의를 부여하면서 이로써 평론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얻었다. 1920년 정진탁, 심안빙, 섭성도(葉聖陶), 허지산(許地山)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고, 1924년 노신, 임어당(林語堂), 손복원(孫伏園) 등과 어사사(語絲社)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점차 정치적 격동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은일의 경향이 짙어졌다.우천(雨天)의 서》 《영일집(永日集)》 《과두집(瓜豆集)》 《고구감구(苦口甘口)등의 수필집 외에, 그리스 문학·일본 문학의 우수한 번역서도 남겼다.

 

18. 쑨푸위안(孫伏園, 1894~1966)

 

  절강성 소흥 출생이다. 현대 산문 작가이자 저명한 잡지 편집인이다. 어려서 산회사범학당(山會師範學堂)과 북경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두 차례에 걸쳐 노신의 학생이 되었다. 1912년 북경 신보(晨報)부간의 편집을 맡았다. 노신의 아큐정전》은 이 신문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후에 경보(京報)부간 주편을 맡았으며, 19273중앙일보부간을 편집하였다. 그 해 겨울 상해로 돌아와 앵앵서점(嚶嚶書屋)을 설립하고 반월간 잡지 공헌(貢獻)을 출판하였다. 1928당대(當代)주편을 담당하다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항일전쟁시기에 중경중외출판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93월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 이사로 선임되었다. 후에 국민정부군사위원회설계위원 겸 사병월보(士兵月報)사장, 제로(齊魯)대학 중문과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성도(成都)로 가서 화서(華西)대학과 명현학원(銘賢學院)에서 교편을 잡고 성도 신민보(新民報)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건국 후에는 정무원출판총서판본(政務院出版總署版本)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복원유기(伏園游記)》,  노신선생이삼사(魯迅先生二三事)등이 있다.

 

19. 쉬디(許地山, 1893~1941

 

  대만의 애국지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대 작가이자 학자이다. 어린 시절 부친이 땅콩(落花生)을 들어 자녀교육을 비유했던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에 1921년 창작을 시작할 당시 落華生을 필명으로 삼고 落花生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대륙으로 돌아와 복건성 용계현(龍溪縣)에서 터전을 마련하였다. 1910년 중학교 졸업 후 사범중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7년 연경대학문학원에 입학하여 1920년 졸업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이 기간에 구추백(翟秋白), 정진탁(鄭振鐸) 등과 함께 신사회(新社會)旬刊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혁명을 선전하였다. 5·4 시기를 전후하여 문학 활동을 하였는데 19211월 정진탁, 심안빙, 섭성도 12명과 함께 북경에서 문학연구회 성립을 발기하고 소설월보를 창간하였다. 1922년 미국 콜롬비아 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종교사와 종교비교학 등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가 종교학, 인도철학, 산스크리트, 인류학, 민속학 등을 연구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연경대학 대학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문학창작에도 매진하였다. 1935년 홍콩대학 대학원 주임교수로 초빙되어 홍콩으로 이주하였고, 이 기간 동안 중영문화협회(中英文化協會) 주석을 역임하였다. 1937년 '7·7 사변' 이후 글, 연설 등을 통하여 항일을 선전했고 장개석에게 단결, 평화, 휴전 등을 요구했다. 이 시기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 홍콩분회 상무이사를 역임하면서 구국사업과 교육활동을 펼쳤다. 1941년 과로로 병사했다. 그의 문학은 광동과 동남아, 인도 등을 주요 배경으로 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공산영우(空山靈雨), 철망노주(綴網勞), 위소추간(危巢墜簡), 도학사(道學史), 인도문학등이 있으며, 번역 작품으로는 이십일 동안의 물음(二十夜問), 방글라데시의 민간고사(孟加拉民間故事)등이 있다.

 

20. 빙신(氷心, 1900~1999

 

  1900105일 복건성 복주(福州)의 해군 군관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대 저명한 시인, 작가, 번역가, 아동문학가이다. 중국민주촉진회중앙명예주석, 중국문련부주석, 중국작가협회명예주석 및 고문, 중국번역가협회 명예이사 등을 역임했다. 부친은 갑오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일본 침략군과도 싸운 적이 있다. 후에 연대(煙臺)에서 해군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였다. 출생 직후 가족과 함께 상해로 이주하였다가 4세에 연대로 가 오랜 기간 살았다. 연대의 망망대해와 아름다운 자연, 아버지의 애국심은 그녀의 성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4년 교회에서 운영하는 북경패만여자중학(北京貝滿女子中學)에 다녔으며, 1919년에는 협화여자대학(協和女子大學) 예과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5·4신문화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1년에는 모순(茅盾), 정진탁 등이 조직한 문학연구회에 참가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유학 가서 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미국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쓴 견문을 국내에 발표하였다. 귀국 후, 연경대학과 청화대학의 여자문리학원에서 강의하였다. 초기에는 가정이나 부녀문제를 다룬 문제소설을 주로 발표했지만, 중기에는 범애사상을 바탕으로 종교적 성향이 강한 작품을 썼다. 사랑의 철학’, ‘모성애’, ‘동심’, ‘자연등은 작품의 기본 주제가 되었다. 작품은 자연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모성과 동심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1919년 처녀작 두 가정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초인(超人)》 《조국을 떠나, 향기등의 소설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시집으로는 뭇별, 봄물등이 있다. 1999년 향년 99세로 세상을 떴다.

 

21. 주쯔칭(朱自淸, 1898~1948)

 

  1898년 강소성 동해현(東海縣)에서 태어났다. 현대 산문가이자 어문교육가, 문학가, 시인, 학자, 민주전사이다. 현실 긍정의 입장에 선 작풍으로 시단에 올랐다. 중국신문학대계·시집을 편집하는 등, 시 비평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새로운 문학론 표준과 척도등을 저술해 고전문학과 신문학의 통일적인 연구 방법을 모색하였다. 1920년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한편, 재학 때부터 시작한 시 창작에 몰두하여 잡지 신조(新潮)등에 기고하였다. 1923년 장편 시 훼멸(毁滅)소설월보에 발표하였고 다음해 시집 종적(蹤跡)을 출판하였다. 1925년 청화대학 교수로 취임할 무렵부터 산문 창작으로 전환하였는데, 1928<뒷모습(背影)>을 발표하여 욱달부(郁達夫)와 쌍벽을 이루는 산문작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중일 전쟁 중에는 곤명서남연합대학(昆明西南聯合大學) 중문학과 주임으로 있었고, 이 시기에 새로운 문학론 표준과 척도(1948) 등을 저술하여 고전문학과 신문학의 통일적인 연구방법을 확립하는 등 시·소설 등의 비평, 고전문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48년 북경에서 병사하였고 대표작으로 시집 종적(踪迹)》,산문집 《뒷모습, 하당월색(荷塘月色), 총총(匆匆)등과 문예이론서 시언지변(詩言志辨), 논아속공상(論雅俗共賞)등이 있다.

 

22. 루인(盧隱, 1898~1934)

 

  1898년 복건성 민후현(民候縣)에서 출생하였다.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북경의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1917년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5·4 시기 혜성과 같이 나타나 문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빙심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직설적이고 담백했으며 슬픔이 뒤얽혀 있다. 1921년 문학연구회에 가입하고 1925년 첫 번째 소설집인 해빈고인(海濱故人)을 발간하였다. 1927년 북경시립여자제일중학교(北京市立女子第一中學校) 교장을 역임하였는데 이즈음에 어머니, 남편[郭夢良], 오빠, 절친한 친구인 석평매(石評梅) 등이 모두 세상을 떠난다. 이로 인해 비통한 심정을 담아 작품집 영해조석(靈海潮汐)만우(曼雨)를 출판하였다. 1928년 죽은 남편을 위한 제문 뢰봉탑하(雷鋒塔下)를 지었는데, 후에 모순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0년 이유건(李唯建)과 재혼하였고, 1934년 분만 도중 사망하였다. 작품으로 해빈고인(海濱故人), 영해조석, 뇌봉탑, 운가정서집(雲歐情書集), 동경소품(東京小品)등이 있다.

 

23. 장쯔핑(張資平, 1893~1959

 

  1893년 광동성 매현(梅縣) 출생이다. 일본 유학시절 지질학을 공부하였으며, 당시 곽말약은 의학을, 욱달부는 경제학을, 성방오(成仿吾)는 군사공업학을 각각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문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므로 중국현대문학사상 중요한 문학사단 중의 하나인 창조사를 결성하였다. 1924년 귀국하여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문학창작에도 종사하였다. 그는 출판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 듯 작품을 생산하였다고도 한다. 20여 편에 달하는 연애소설 대부분은 중·장편소설이다. 일본 정권을 위해 일한 매국 작가라는 이유로 1945년 이후 문단에서 제명되었으며 19475월 매국노 문제로 국민당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한 때 창조사의 일원이었던 상해시 부시장 반한년(潘漢年)의 소개로 교편을 잡는 한편 상무인서관에서 번역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556월 반한년의 반혁명사건으로 인해 매국노문제가 다시금 불거졌고 이후 재판을 받다가 1959122일 노동개조농장에서 병사하였다. 대표작으로 매령의 봄(梅岭之春), 최후의 행복(最後的幸福)등이 있다.

 

24. 톈(田漢, 1898~1968)

 

  호남성 장사(長沙)의 빈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시절, 일본 유학생들의 신문학운동 단체인 창조사에 참가하였다. 1922년부터 희곡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커피숍에서의 하룻밤(咖啡店之一夜)(1920), 호랑이를 잡던 밤(獲虎之夜)(1921) 등 초기 작품에서는 감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맨틱한 작풍이 특징적이었다. 또 남국사(南國社)를 조직하여 소주야화(蘇州夜話)(1928), 호상(湖上)의 비극(1929) 등 자작극을 상연하였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1년에는 좌익희극가연맹(左翼戱劇歌聯盟)에 가입하여 난종(亂鍾), 소사(掃射), 폭풍우 속의 7인 여성(1932) 등의 좌익극을 창작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연극계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중공희극가협회 주석으로서 전통극 개혁에 힘썼다. 문화대혁명 중에 장춘교(張春橋), 강생(康生) 등의 모함을 받아 핍박을 받았고, 경극 사요환(謝瑤環)(1961) 등은 반당(反黨)작품으로 비판을 받았다. 19681210일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 커피숍에서의 하룻밤, 호랑이를 잡던 밤, 관한경(關漢卿), 문성공주(文成公主), 백사전(白蛇傳), 사요환(謝瑤環)등이 있다.

 

25. 정보치(鄭伯奇, 1895~1979)

 

  1895년 섬서성 서안(西安)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현대 중국의 영화극작가, 소설가, 문예이론가이자 좌익문학운동개창자 중의 한 명이다. 1920소년중국(少年中國)19기에 처음으로 시 이별 후(別後)를 발표했으며 다음 해 창조사에 가입했다. 1926년 도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 상해로 이주하여 문예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는데, 창조월간(創造月刊), 북두(北斗), 신소설등의 편집주편을 하였고 1929년에는 상해예술극사(上海藝術劇社)의 사장이 되었다. 이듬해 좌익작가연맹의 이사로 선출되었고 좌익희극작가연맹에도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 단막극 항쟁을 썼고, 1932년에는 하연(夏衍)아영(阿英) 등과 함께 명성영화공사(明星影片公司)에 들어가 염조(鹽潮), 태산홍모(泰山鴻毛), 시대적아녀(時代的兒女), 화산염사(華山艶史), 아녀경(女兒經)등의 각본을 썼다. 또한 상해 신보(晨報)부간이나 매일전영(每日電影)에 영화비평과 이론에 관한 글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평론과 회고록을 집필하였는데 특히 창조사에 관한 회고록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791월 세상을 떠났다.

 

26. 저우수줸(周瘦鵑, 1895~1968)  

 

  강소성 소주(蘇州)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국 현대 작가이자 문학번역가이다. 여섯 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며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최초 작품인 사랑의 꽃(愛之花)(극본)소설월보에 발표하였다. 졸업 후 창작과 번역일을 하는 한편 1916년에서 1949년까지 신보(申報), 신문보(新聞報), 자라난(紫羅蘭)등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항전 직전 노신, 곽말약 등 상해의 문예종사자들과 적극적으로 항거하며 함께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저작활동을 하는 동시에 원예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손수 가꾼 정원을 주가화원(周家花園)이라 불었으며, 주은래, 섭검영(葉劍英), 진의(陳毅) 등 국가 지도자들 및 외국 국빈들이 이곳에 수차례 방문하기도 하였다. 문화대혁명 시절 임표 등 사인방에 의해 핍박받다 19688월에 사망하였으며, 주가화원 역시 훼손되고 말았다. 주요 작품으로 항적구국의 단편소설 망국노일기(亡國奴日記), 조국지휘(祖國之徽), 남경지위(南京之圍), 매국노일기(賣國奴日記)등이 있으며, 해방 후에는 산문집 행운집(行雲集), 화화초초(花花草草), 화전쇄기(花前瑣記), 화전속기(花前續記)등을 출간하였다.

 

27. 쉬전야(徐枕亞, 1889-1937

 

  강소성 상숙(常熟)에서 출생이다. 중국 근현대 소설가이다. 어려서부터 구학(舊學)의 기초를 닦아 10세에 이미 사()를 지을 수 있었다. 1912년 초 자유당 영수 주호(周浩)의 초빙으로 상해로 가 민권보(民權報)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이때 소설 옥리혼(玉梨魂)을 출간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옥리혼의 인기에 힘입어 이를 일기형식으로 편집한 설홍루사(雪鴻淚史)소설총보(小說叢報)연재하였는데, 후에소설총보와의 의견 차이로 인해 스스로 청화서국(淸華書局)을 설립하고 소설계보(小說季報)를 발행하였다. 후에 청화서국의 경영이 악화되자 모든 일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빈곤하게 생활하다 세상을 떠났다. 소설로 이름을 떨쳤으나 시사와 서예, 변려문에도 능했다. 그의 소설은 비애감에 넘쳤고 주로 사륙변려문을 사용하였다. 원앙호접파의 형성과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원앙호접파의 기수라고 불리웠다.

 

28. 장헌쉐이(張恨水, 1897~1967)

 

  1897년 안휘성 잠산령두향(潜山岭頭鄕)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장회소설가이자 원앙호접파의 대표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중국 전통의 장회체 소설과 서양 소설의 새로운 기교를 융합하여 복잡한 줄거리와 완정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어려서 구식 서당에 다니며 서유기, 동주열국지등 고전소설에 심취하였다. 특히 홍루몽의 표현기법을 선호하여 음풍농월의 시사(詩詞) 수법과 재자가인을 중심으로 한 줄거리를 즐겨 사용하였다. 1919년에 발표한 청삼루(靑衫淚), 남국상사보(南國相思譜)등과 같은 작품은 뒤얽힌 사랑과 소일거리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244세계만보·야광(世界晩報·夜光)부간에 장회소설 춘명외사(春明外史)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는데, 90여만 자에 달하였다. 후에 언정(言情), 견책(譴責), 무협의 성격을 합친 장편소설 제소인연(啼笑因緣)으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항전 시기에는 항전소설 창작에 힘을 쏟았으며, 해방 후에는 중앙문사관(中央文史館)의 관원을 역임하였다. 1967215일 세상을 떠났다. 다작 작가로 유명하며 50여 년 간의 창작 생애 동안 100여 편의 통속소설을 창작하였고 이중 대부분은 중·장편소설이다. 대표작으로 춘명외사, 금분세가(金粉世家), 제소인연, 팔십일몽(八十一夢)》등이 있다.

 

29. 천시잉(陳西瀅, 1896~1970)

 

  1896년 강소성 무석(無錫)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에든버러 대학과 런던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2년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북경대학 교수가 되었다. 1924년 호적의 지지 하에 서지마(徐志摩) 등과 함께 현대평론(現代評論), 주간(周刊)등을 창간하고 문예부 주편을 담당하였는데, 여기에 한화(閑話)라는 칼럼을 만들어 수많은 잡문들을 발표하였다. 영국 신사의 우아한 자태로 자신의 한적한 방관자적 태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의 글을 閑話라고 명명하였는데, 風花雪月에 대한 한담과 따뜻한 온정을 주로 하여 5·4 시기와 같은 필전의 시기에도 방관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는 西瀅閑話에서 적지 않은 모순된 관점을 보여 주었으며 문체의 측면에서도 원숙한 경지에 달하지 못했다. 현대평론한화란이 없어진 후 문단에서 축출되었다. 1946년 국민당정부시기 주() 파리 聯合國敎科文組織의 상주 대표를 역임하였고, 1966년 런던에서 은퇴한 후 1970년 병사하였다. 60년대 대만에서 서형한화(西滢閑話)가 출판되었을 때, ‘북경여자사범대학 사태와 노신과의 논쟁에 관련한 부분을 스스로 삭제하였는데, 이는 그가 문단에서 축출된 이후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0. 쉬즈모(徐志摩, 1897~1931

 

  1897년 절강성 영해(海寧)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격 시인이다. 상해 호강대학(滬江大學)과 북경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하였다. 귀국 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인으로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문일다(聞一多)와 함께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가 되었다. 인도의 시인 R.타고르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았고, 타고르 소개에 공헌했다. 1928년에는 호적, 나융기(羅隆基) 등과 함께 신월파(新月派)를 조직했다. 19318월 비행기 사고로 급사하였다. 시집으로 피렌체의 일야(一夜), 지마의 시, 맹호집(猛虎集)등이 있고, 서간집으로 애미소찰(愛眉小札0, 지마일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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