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린겅(林庚, 1910~2006)

 

   1910222일 북경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시인, 고대문학 학자, 문학사가이다. 중국작협 회원이자 북경대학교 중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28년 북경사범대학부속중학을 졸업하고 청화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30文學月刊을 창간하고 1933년 대학 졸업 후 文學季刊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해에 최초의 자유시체 시집인 를 출판하고 1934년 이후에는 자유시체를 구사한 시인으로서 새로운 격률체를 시도하는 시 창작을 주로 하였다. 이즈음에 北平情歌, 冬眠曲及其他등의 시집을 발표하였다. ‘7·7’ 사변 후에는 하문대학으로 가 교편을 잡았으며, 신 중국 성립 후에 북경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저서로는 春夜與窗, 問路集, 空間的馳想등과 중국문학사, 詩人屈原及其作品硏究등의 문집이 있다. 2006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62. 류나어우(劉吶鷗, 1900~1939)

 

  1900년 대만 臺南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일본에서 성장하였으며 동경청산학원을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일어와 영어에 매우 능통하였다. 귀국 후 상해진단대학 불문과에서 불어를 공부하였다. 1920년대 말의 경향은 진보적이었다. 1928第一線書店을 설립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당국의 조사를 받았으며, 후에 水沫書店을 경영하였다. 이때 마르크스주의문예논총(후에 과학적예술논총서로 개명) 등의 진보서적을 출판하였다. 한편 無軌列車(반월간)을 창간하여 일본의 신감각파 문학을 소개하는 한편, 현대주의 경향을 띠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진보적인 작품들도 실렸다, 이로 인해 無軌列車는 그해 연말에 제8기까지 출판하고 국민당 정부에 의해 정간 당하였다. 1929년 시칩존(施蟄存), 서하촌(徐霞村), 대망서(戴望舒) 등과 함께 상해에서 무궤열차의 경향을 이어 받은 新文藝월간을 발행하고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28’ 사변 중에 水沫書店이 훼멸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항전시기에 다시 돌아와 왕위(汪僞) 정부의 명령에 따라 文匯報를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으나, 1939년 신문이 나오기도 전에 국민당 특무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대표작으로 단편소설집 都市風景線景등이 있다. 대표적인 해파 작가의 일원이다.

 

63. 장커퍄오(章克標, 1900~2007)

 

   1900년 절강성 海寧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작가, 번역가이다. 20살 되던 해에 정부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가 교토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였다. 귀국한 후 교편을 잡다가 문학에 종사하기로 결심한다. 1926년 상해에서 호유지(胡愈之), 풍자개(豊子愷), 섭성도 등과 함께 공동으로 一般月刊의 주편을 맡았다. 동시에 등고(滕固), 방광도(方光燾) 등과 함께 중국 신문학초기의 유명한 문학사단 중 하나인 사후사(獅吼社)를 설립하였다. 1928년에 개명서점에 들어가 당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개명수학교과서와 開明文學辭典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다시 時代圖書公司를 설립하였는데, 1930년대 중국에서 커다란 규모의 출판사 중 하나였다. 그는 申報自由談칼럼의 주요 기고자였으며 1930년대 잡문의 대가 중 한명으로 소위 해파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林語堂, 소순미(邵洵美) 등과 함께 잡지 論語를 창간하였다. 2005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으며 2007년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창간하거나 편집한 대표적 간행물로는 獅吼, 一般, 金屋, 論語, 時代畵報등이 있으며, 소설 戀愛四象, 愛欲, 水上, 殺艶등과 대량의 잡문, 산문이 있다.

 

64. 쉬위(徐訏, 1908~1980)

 

  1908년 절강성 慈溪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鬼才라고 불리는 교수 작가이다. 1933년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학창시절 단편소설 煙圈을 발표하였다. 1934년 상해에서 人間世월간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36년 단편소설 郭慶記를 발표하고, 그 해 프랑스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항전기에 귀국하여 상해에서 天地人, 作風등 간행물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37년 중편소설 鬼戀으로 이름을 떨쳤다. ‘孤島時期상해에 남아 吉布賽的誘惑, 荒謬的英法海海峽, 精神病患者的悲歌一家등 장편소설을 창작하였다. 이 시기 상해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주관적 상상을 중시하는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얽히고설킨 애정을 소재로 하여 낭만적 환상과 철학이론을 결합하고, 아방가르드적이며 통속적인 것의 기이한 조합을 보여주었다. 1950년 홍콩으로 가 曹聚仁 등과 출판사를 설립하고 熱風반월간을 창간하였다. 홍콩 중문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000년 사망하였다.

 

65. 장아링(張爱玲, 1920~1995)

 

   1920년 상해 부유한 서양식 호화주택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작가이다. 할아버지 장패륜(張佩綸)은 청 말의 대신이며, 할머니 이국우(李菊耦)李鴻章의 장녀였다. 그녀는 일생 대량의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소설, 산문, 영화극본과 문학논문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녀의 서신 역시 저작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남성과 여성이 사랑하면서 느끼는 정신적 긴장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당대 중국문학에서 최고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장애령의 작품은 1940년대의 상해와 일본 제국이 점령한 홍콩에서의 삶을 묘사하면서 삶의 일상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당대의 다른 많은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현상과 달리 작품 배후에 정치적인 의도를 그다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폭발적인 인기와 유명세를 누렸다. 1944년 일본괴뢰정부의 매국노였던 호란성(胡蘭成)와 결혼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1945년 출판된 문화계친일파죄악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후에 이혼하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간다.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5636세였던 그녀는 65세의 좌파 문인인 극작가 Ferdinand Reyher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이후 뉴욕에 거주하며 창작과 번역 및 중국연구서 등을 집필하였고, 1967년 남편이 죽자 미국에 혼자 남아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미국에서 은둔자적 생활을 하다가 1995년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금쇄기(金鎖記), 傾城之戀, 半生緣, 紅玫瑰與白玫瑰등이 있다.

 

66. 쑤칭(蘇青, 1914~1982

 

   1914년 절강성 寧波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작가, 소설가, 산문가, 극작가이다. 장애령과 함께 유명한 해파 여류작가이다. 1933년 국립중앙대학(남경대학의 전신)을 졸업하고 상해로 이주하였다. 1935년 딸을 낳는 것의 고통을 토로한 산문 産女論語잡지에 투고 하였고, 후에 이를 수정하여 生男與育女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창작을 시작한다. 40년대 초 결혼생활의 파탄으로 직업작가가 되었으며 주로 宇宙風, 逸經, 古今, 風雨談, 天地등의 잡지에 글을 발표하였다. 장애령과 함께 한 쌍을 이루며 일시에 인기를 얻었다. 1943년 장편 자전소설 結婚十年風雨談에 연재하면서 일시에 주목을 끌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1948년 말까지 18판이 발행되었다. 1947續結婚十年을 출판하였다.

   그녀는 30,40년대 해파문학의 대표적 여류작가이며, ‘상해문단에서 가장 명예로운 여류작가였다. 동시에 잡지 天地의 주편을 담당하고 四海出版社를 설립하고 小天地를 창간하였다. 항전 승리 후에는 타락한 작가로 지목받아 심문을 받았으며 1949년 상해에 남아 방화월극단(芳華越劇團)의 전문 극본편집인으로 일하였다. 이때 江山遺恨, 賣油郞, 屈原, 寶玉與黛玉, 李娃傳을 편집하였다. 그 중 1954년 공연된 寶玉與黛玉300여회나 공연되며 극단 창단 이래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문혁기간 중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으며 1982년 겨울 병사하였다. 대량의 산문소품을 남겼으며 대부분 완금집(浣錦集), (), 飮食男女등에 실려 있다. 대표 장편소설로 기도가인(歧途佳人)등이 있다.

 

67. 스지메이(施濟美, 1920~1968)

 

   1920년 절강성 紹興에서 출생하였다. 1937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東吳大學 경제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즈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상해 조계에 진입하자 가정형편이 극도로 빈궁해졌다. 集英中學正中女中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지인 중에 애국인사들이 있어 늘 일본군의 체포 대상이었다. 그녀의 애인은 상해 윤함구에서 탈출하여 사천으로 가던 중에 일본 전투기의 폭격에 사망하였다. 이후 한편 생 결혼하지 않았다. 항전 승리 후 상해에서 교편을 잡으며 문학 창작에 종사하였다. 당시 동오대학 출신의 여류 작가들이 유명하였는데 程育眞, 鄭家瑗, 양숙진(楊繡珍), 湯雪華, 兪昭明, 施濟美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東女吳作家라고 불리었다. 그 중 그녀의 작품 수가 가장 많았고 영향력 역시 가장 컸다. 이들은 모두 수십만 자에 달하는 소설과 산문을 썼으며 萬象, 春秋, 幸福小說月報등의 간행물에 발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건국 후에는 교육사업에 종사하였고 문화대혁명 중에 핍박을 받아 1968년 사망하였다.

 

68. 탄웨이한(譚惟翰, 1913~1994)

 

   1913년 호북성 漢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저명한 언어학습 전문가, 교수이다. 1937년 상해 광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신 중국 건립 후에는 화동사범대학 중문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980년 전국어문교학법연구회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후에 학술위원회 주임이 되었으며 1994년 사망하였다. 국내 어문학 기간지에 思路敎學和敎學思路, 敎學中誰爲主體등 수 십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저서로는 語文教學心理學이 있다. 일생 언어학습 분야의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문학 작품도 창작하였다. 대표적인 소설 海世吟, 鳥夜啼, 夜鶯曲, 燈前小語, 暮雲飛등과 영화극본 秋之歌, 草木皆兵, 笑笑笑, 夜長夢多등이 있다. 이들 극본은 일부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소청, 장애령 등 해파 작가와 친분이 두터웠다.

 

69. 판위쳬(潘予且, 1902~1990)

 

   1902년 안휘성 경현(涇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통속소설 작가이다. 상해 성요한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마침 五州運動이 발생하자 대학 당국에서는 학생과 교원들이 사회활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당시 고학년이던 그는 이에 울분을 느끼며 六三同學會에 참가한 후 학교를 자퇴하고 光華大學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문학 창작에 매진하였다. 소설 如意珠과 산문飯後談話등을 발표하는 한편, 학교에서는 부지런히 화극활동을 벌여 학생들의 공연과 연기를 지도하고 극본을 편집하였다. 당시 희극평론과 무대이론에 관한 책인 說寫做舞臺藝術등을 발행하였다. 항일전쟁 발발 후 상해를 떠났다가 1939년 돌아와 여러 간행물에 다량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도시생활과 도시민의 모습을 제재로 한 소설을 창작하여 1940년대 상해 고도시기와 윤함구 시기에 비교적 영향력 있는 통속문학 작가로 인정받았다. 대표작으로 단편소설집 予且短篇小說集, 七女書등과 장편소설 女校長, 金鳳影등이 있으며, 이 외에 尋記, 移情記, 追無記, 月記, 勸學記, 留香記, 別居記등의 단편소설 등이 있다.

 

70. 야오쉐인(姚雪垠, 1910~1999)

 

   19101010일 하남성 정주시 인근의 鄧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소설가이다. 그의 고향은 척박하고 빈궁하였으며 봉건군벌의 압박과 토비의 침략이 빈번한 곳이었다. 9살 되던 해, 토비의 침략으로 집이 다 타버리자 가족은 시내로 들어와 거주하게 되었다. 시내에서 고등소학을 다니며 다량의 고문을 암송하고 습작을 하였다. 192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제2차 직봉전쟁의 발발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토비에게 붙잡혀 약 100일간 그들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은 그의 자전적 소설인 長夜(1947)의 기본 소재가 되었다. 1930년대부터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에 여러 편의 장편소설과 중편소설을 발표하였다. 항일 전쟁이 끝난 후 上海大夏大學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명조(明朝) 말기의 정치제도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학교를 떠나 하남성 문인연합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75년에 武漢作家協會에 가입하였다. 대표작 李自成은 중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유물론의 관점으로 명조 말기의 봉건사회를 해부한 작품이다. 1963년에 제1(, )을 창작하고, 1977년에 제1권 수정본과 함께 제2(··)을 냈으며 1981년에 제3(, , )을 냈다. 198210이자성(2)으로 제1차 마오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사망하였다.

 

71. 쉬우용(徐懋庸, 1911~1977)

 

   1911115일 절강성 상우(上虞)의 빈농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926년 제1차 대혁명에 참가하였다. 정부의 수색을 피해 상해로 숨어들어 半工半讀하는 勞動大學에 입학하였다. 1932년에 톨스토이전을 번역하였고, 1933년 여름부터 잡문을 창작하여 申報·自由談에 투고하였다. 그의 잡문은 필법이 예리하고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34년 상해에서 左聯에 가입하였다. 1935년 잡문집 打雜集을 출판하였는데 노신이 서문을 써 주었다. 이 해 소련, 일본의 진보서적을 번역 하였다. 1936년 좌련 해산 등의 문제로 노신과 논쟁을 벌였으며, 노신은 <서무용에게 항일통일전선문제에 대해 답함(答徐懋庸關於抗統戰線問題)>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트로츠키파의 비판에 반박하는 한편, 이르바 국방문학의 구호에 반대하였다. 1938년 연안으로 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무한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1977년 사망하였다.

 

72. 차오쥐런(曹聚仁, 1900~1972)

 

   1900년 절강성 난계돈두진(蘭溪墩頭鎭)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의 좌파작가, 편집인, 기자, 교수이다. 1921년 절강성립사범을 졸업하고 상해의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0년 이후에는 홍콩 星島日報의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위한 찬가인 北行小語, 北行二語, 北行三語를 창작하였다. 1972년 사망하였다. 후에 애국인사로 지정되었다. 그는 노신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만년에 鲁迅評傳을 지었다.

 

73. 주슈샤(祝秀侠, 1907~1986)

 

   1907년 광동에서 출생하였다. 상해 복단대학 중문과 재학 중 小說月報에 소설 祝老夫子를 발표하였다. 1929년 졸업 후에 복단대학, 중문대학, 광서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대 노신, 욱달부와 친분이 두터웠다. 항전시기에 광동으로 돌아 와 성정부 비서를 역임했으며, 홍콩 국민당중앙해외부의 비서를 담당하였다. 후에 인도네시아에서 발행되는 天聲日報의 총 주편을 맡았다. 인도네시아가 일본에 함락 된 후 해상표류를 하다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여 印度日報의 편집 겸 총 주필을 맡았다. 후에 귀국하여 국민당중앙에서 요직을 거쳤으며 복단대학 중문과 교수가 되었다. 항전 승리 후에 광주시 정부에서 일하다 1949년 마카오를 거쳐 대만에 정착하였다. 대만에서 교육 관련 요직을 두루 거쳤고 1986년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三國人物論, 三國人物新論, 諸葛亮傳, 華僑名人傳등의 저작과 소설 八月間, 산문집 秀俠散文등이 있다.

 

74. 후펑(胡風, 1902~1985)

 

   1904년 호북성 기춘(蘄春)에서 두부가게를 운영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북경대학 예과를 거쳐 청화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했다. 국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9년 일본 게이오 대학에 유학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처음 접한다. 이후 상해에서 좌익작가 연맹에 서 간부로 활동하던 주양(周揚)을 알게 되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중국 작가들이 조직한 좌익작가 연맹에서 활동하다가 국가를 비방한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추방당하였다. 귀국 후, 평론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항일전쟁 중에는 무한과 중경 등지에서 잡지를 발간하였다.

   1949년 신 중국 건립 후, 계급투쟁을 우선시 하는 공산당의 문예 강화 정책에 따른 기존 문예를 비판했다. 이에 공산당 문예 정책의 수정을 요구하는 30만 자의 의견서를 공산당 중앙당에 제출하였다. 작가의 개인적인 의식을 강조한 그의 의견은 그가 영향을 받은 주양을 포함한 다수에게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특무기관과 연관된 편지가 폭로되어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19551월 결국 굴욕적인 자아비판을 글로 작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19555월 호풍은 결국 스파이로 몰려 체포되었으며 봉성(奉城)감옥에 수감되었다. 196512월 석방되어 사천성 성도로 강제 이주했다가 문화대혁명 때 무기징역을 받고 다시 수감되었다가 모택동이 사망한 후인 19791월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공산당 간부였던 주양으로부터 반동분자로 몰린 것에 대한 사과를 받고 일부 명예를 회복하였으나 19856월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중국 정부는 19886월 완전한 명예회복을 선언하였다. 그의 문예이론은 모택동의 문예강화와 대립하여 작가의 주관, 자아의 확장에 의한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점이 특징이다. 논문 외에도 시집으로 야화여전(野花與箭)등이 있다.

 

75. 저우리보(周立波, 1908~1979)

 

   190889일 호남성 益陽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우수 당원이자 현대의 작가이자 편역가이다. 1924長沙省立第1中學에 입학하여 교장인 王季範, 特立 등의 영향 하에 진보사상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28년 상해로 와 강만(江灣)노동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1930년 전단지를 돌렸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 창작에 매진하였다. 1931‘9·18사변후에 상해로 돌아와 교편을 잡는 한편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다 투옥되었다. 1934년 출옥한 후 상해에서 중국 좌익작가연맹에 참여하였으며, 193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좌련의 비밀간행물의 편집을 담당한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보고문학과 산문을 다량으로 창작하였다. 1942년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하였으며 1944년에는 解放日報부부장 및 문예부간의 총 편집을 맡았다. 신중국 성립 이후 19497월 전국문련과 전국문협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심양노신문예학원연구실 주임, 호남성문련부석과 중공당조서기 등을 맡았으며, 1-3기 전인대대표로도 선출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 전국문련위원과 중국작가협회이사를 역임하였으며, 人民文學편집위원과 湖南文學의 주편을 맡았다.

   장편소설 暴風骤雨와 영화 解放了的中國은 스탈린문학상을 받았으며, 湘江之夜는 전국단편소설1등상을 받았다. 1955년에서 1965년까지 고향으로 돌아가 장편소설 山鄕巨變20여 편의 향토단편소설을 창작하여 향토문학의 새로운 주제와 풍격을 형성하였다. 1979925일 북경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周立波短篇小说集, 周立波散文集, 周立波選集, 立波文集등이 출판되었다.

 

76. 바오톈샤오(包天笑, 1876~1973

 

    1876226일 강소성 소주에서 출생하였다. 청 말 수재로 이름을 떨쳤다. 일본어에 정통하며 山東靑州府學堂 監督을 역임한 바 있다. 1903년 상해로 가 관보인 時報副刊余興을 편집하였고, 동시에 正書局에서 小說時報, 婦女時報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文明書局에서 小說大觀, 1922년에서 1923년까지 大東書局에서 星期周刊의 편집을 각각 맡았다. 1935년 상해에서 장한수의 뒤를 이어 花果山副刊의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항전 승리 후에는 홍콩에서 거주하였다. 1930년대 중반 두개의 구호논쟁 중에 노신이 주도하는 민족혁명전쟁의 대중문학구호를 지지하였다. 1973년 홍콩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上海春秋, 해상신루(海上蜃樓), 包天笑小說集등이 있다.

 

77. 장톈이(天翼, 1906~1985)

 

   1906년 남경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친구 대망서(戴望舒), 두형(杜衡), 시칩존(施蛰存) 등과 함께 문예간행물을 발간하였으며, 星期六, 法月, 星期등의 간행물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4년 가을 상해미술학원에 입학하여 1년간 공부하였고 이듬해 북경대학으로 갔다. 192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하층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퇴학한 후 상해, 영파(寧波) 등지에서 사원, 가정교사, 회계, 기자, 실업자 등의 고통을 경험한다. 1931년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혁명문예창작과 기타 혁명 활동, 항일선전운동 등에 참가하였다. 1938년 단편소설 화위선생(華威先生)을 발표하여 항전을 이끈다는 명목으로 허위에 가득 찬 관료인 화위선생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번역되면서 중국에 파란을 몰고 와 결국 폭로와 풍자문예에 관한 논쟁을 일으켰다. 신 중국 건립 이후 영화를 보러 갈 때, 그들과 우리들(1952), 보물 호리병(1957) 등을 발표하면서 동화작가로 더 유명해졌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주자파로 비판 받아 호북성으로 하방 되어 노동개조를 당했으며 반신불수, 실어증에 걸렸다. 1985년 사망하였다.

 

78. 우쭈샹(吳組緗, 1908~1994)

 

   1908년 안휘성 涇縣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부터 宣城안휘성립중학, 蕪湖성립5중과 상해구학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상해 民國日報부간 覺悟에 단편소설 不幸的小草, 1925년에는 婦女잡지에 단편소설 鳶飛魚躍을 발표하였는데, 두 편 모두 선명한 반봉건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1929년 청화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가 1년 후 중문과로 전과하였다. 이때 林庚, 李長之, 季羨林 등과 함께 淸華四劍客이라 불리며 문학 창작의 꽃을 활짝 피웠다. 1932년 소설 官官的禮品을 창작한 이래, 一千八百擔, 天下太平, 樊家鋪등을 발표하여 리얼리즘 기법으로 문단을 향유하였다. 1938년 전국문예계항적협회 설립의 발기인 중 한명으로서 老舍와 함께 공동으로 <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宣言>의 초안을 잡고 협회의 상임이사가 되었다. 신 중국 건립 후 청화대학, 북경대학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문련과 작협의 이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牛鬼蛇神으로 타도 당했으며 1994년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一千八百擔, 天下太平, 樊家鋪등이 있다.

 

79. 장다오판(道藩, 1897~1968)

 

   1897년 귀주성 盤縣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영국 런던대학 대학원 미술부에 입학하였다. 유학기간 중에 독일에 온 徐悲鴻 등을 만나고 陳立夫 등과 교류하였다. 1922년 런던에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이듬해 국민당 런던지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陳立夫와는 일생을 두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국민당 가입 후에는 CC계의 요인이 되었으며 광동정부 비서, 귀주성 당무지도원, 국민당 중앙조직부 비서, 남경시 정부 비서장, 국립청도대학 교무장(1930.4~1930.10), ‘國民大會선거사무 부총간사, 중앙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며 오랜 기간 관방문화교육사업 부문에 종사하였다. 1938년 문예계항적협회의 창립에 가담하였다. 이후 1940년대 초까지 이어진 폭로와 풍자논쟁에서 국민당 측의 입장을 대변하여 폭로와 풍자통일전선 내부의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적을 돕는다는 이유로 항전에 유해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후 대만으로 건너가 CC계의 지도자로서 봉파(奉派) 國民黨 중앙개조위원으로 활동하며 국민당 개조 작업에 착수하였다. 1952立法院 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19686월 사망하였다. ‘三民主義文藝理論家라고 불린다.

 

80. 왕런수(王任叔, 1901~1972)

 

   1901년 절강성 奉化에서 출생하였다. 필명은 巴人이다. 1923년 문학연구회에 가입하면서 시와 소설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69월 광주로 가 북벌군 총사령부 비서를 역임하였고 1929년 일본으로 갔다. 이듬해 상해로 귀국하여 중국좌익문학연맹에 가입하였다. 항전기에는 譯報, 民族公論魯迅全集편집에 종사하였다. 1941년 인도네시아로 가 항일운동과 화교통일전선공작을 펼쳤다. 194710월 홍콩으로 귀국하여 오래지 않아 해방구에 도착한다. 신 중국 건립 후에는 주인도네시아 중국대사, 인민문학출판사 부사장, 文藝報편집 위원, 중국작가협회외국문학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53년 예전에 지었던 文學讀本에 대폭 수정을 가하여 文學論稿라고 제목을 바꾸었으며, 1957新港잡지에 발표한 단문 論人情으로 1960년 비판을 받게 된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핍박을 받았으며 1972년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監獄, 破屋, 在沒落中, 과 중편소설 阿貴流浪記, 證章및 장편소설 莽秀才造反记등이 있다.

 

81. 무무톈(穆木天, 1900~1971

 

   1900년 길림성 伊通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상징파 시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1918南開中學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동경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1년 창조사에 가입하여 초기에는 주로 낭만주의 시를 쓰다가 후에 상징주의로 전향하였다. 1931년 상해에서 좌련에 가입하여 시가부분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중국시가협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후에 중산대학, 동북사범대학, 북경대학 등의 교수를 지냈으며 문화대혁명 때 박해로 죽었다. 주요 작품으로 시집 여심, 망명자의 노래등이 있다. 주로 애정, 전원산수를 노래한 낭만적인 소재와 疊句疊字를 중복한 음절을 사용하는 기법을 활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후에 중국시가회에 참여하면서 사상적으로 변신을 보였다. 중산대학, 동북사범대학, 북경대학 등의 교수를 지냈으나 문화대혁명의 박해로 죽었다.

 

82. 천보다(陳伯達, 1904~1989)

 

   1904년 복건성 惠安에서 출생하였다. 중국의 사회과학자, 문화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이다.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그 해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다. 귀국 후 북평중국대학, 연안중공중앙당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중공중앙선전부 등의 요직을 맡았다. 1936년에 신 계몽운동을 주창, 艾思奇, 何幹之 등과 사상문화에서 애국주의, 자유주의, 이성주의를 주창하고, 항일구국의 문화통일전선 결성에 노력했으며 후에 신민주주의 문화운동에의 길을 넓혔다. 항전 기간 연안에서 장개석의 중국의 운명을 비판하였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중국사대가족(中國四大家族)을 써서 국민당 관료 자본을 분석폭로하였다. 신 중국 건립 후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석, 과학원 부원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창간된 이래 중공기관지 홍기(紅旗)의 편집장을 맡았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문화혁명소조의 책임자로서 王力, 江靑 등과 함께 활약하였으며, 모택동 사상을 신봉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실제적 운영자이자 이론적 대표자가 되었다. 1969년 이후에는 모택동, 임표, 주은래, 康生과 함께 중공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의 요직에 몸을 담았으나 70년에 실각했다. 1976林彪, 江青반혁명집단의 주범으로 체포되었으며 1981125일 최고법원에서 18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8월 보석으로 출감하여 1989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83. 아이쓰치(艾思奇, 1910~1966)

 

    1910년 운남성 騰沖에서 출생하였다. 몽고족이다. 1925년 운남성립1중에 입학한 후 마르크스주의를 접하였다. 일본에서 공부하였으며, 193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에서 1936년까지 상해 讀書雜誌의 편집을 맡았다. 1937년 연안으로 가 항일군정대학 교수, 중앙연구원문화사상교실 주임, 중공중앙문위비서장, 解放日報부총편집 등을 역임하였다. 신 중국 건립 후 중공중앙고급당교 철학과 주임 및 부교장, 중국철학회 부회장, 중국과학원철학사회과학부위원 등을 지냈다. 오랜 기간 마르크스주의철학 연구, 선전, 교육업무에 종사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 통속화와 대중화 작업에 관심을 두었다. 적극적으로 각종 유심주의 철학과 논전을 벌였으며 변증유물주의와 역사유물주의를 고수하였다. 또한 모택동철학사상 연구에도 성취를 이루었다. 저서에 신철학론집(新哲學論集), 실천과 이론, 변증유물주의강과제강(辨證唯物主義講課提綱)등이 있다. 특히 대중철학(1936)은 중국의 민족적 위기감에 입각한 민중적 유물론 철학을 논술한 획기적인 계몽서로서 중판(重版)되었다.

 

84. 샹린빙(向林冰, 1905~1982

 

   1905년 하남성 内黄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근현대 사상가가, 철학사가이다. 192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후에 復旦大學, 東北大學, 東吳大學, 山東大學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대 후반 민족형식논쟁 중 민족형식의 창조는 당연히 민간형식을 중심원천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신 중국 건립 후 산동대학과 중국공산당교, 중국사회과학원 등에서 연구 활동과 교육활동에 매진하였다. 주요 저작으로는 中國哲學史綱要, 中國知行學說簡史, 中國哲學思想, 哲學要論, 古代儒家哲學批判, 困知錄, 論語新探등이 있으며, 侯外廬, 杜國庠 등과 함께 中國思想通史를 편찬하였다. 論語新探은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85. 거이홍(葛一紅, ?~?)

 

   강소성 嘉定에서 출생하였다. 문학번역가이다. 상해大同大學을 졸업하였다. 1933년 좌익희극작가연맹에 참여하였고 新演劇잡지를 공동 주편하였다.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 이사와 중소문화협회연구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 후반 민족형식문제논쟁에서 민간문학을 긍정하고 5·4 신문학을 부정한 向林冰의 의견을 비판하였으며, 또한 민간문학을 부정하고 구 형식은 봉건문화의 잔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신 중국 건립 후 外國戱劇주편 및 중국희극출판사 사장 겸 총 편집자, 중국극협서기처 서기, 중국예술연구원 話劇硏究所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루나차르스키의 작가와 사회마르크스문학론등을 번역한 바 있다.

 

86. 자오수리(趙樹理, 1906~1970)

 

   1906924일 산서성 沁水縣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났다. 농촌에서 자라 농민과 그들의 문화예술을 잘 이해하였다. 山西省 長治師範에 입학하여 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진보 성향의 학생 단체에 소속하여 퇴학당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 교사로 근무하면서 산서성 남동부를 무대로 항일 소형신문을 편집하였다. 193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0년 이후 太行山脈의 공산당 문화기관에 소속되어 선전 활동에 종사하였다. 1943년에 처녀작 小二黑의 결혼李有才板話를 발표하였으며, 모택동의 문예강화(文藝講話)’ 방침을 실현한 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향토적 색채가 농후하고 중국 농촌의 수십 년에 걸친 커다란 변화를 잘 묘사하여 山藥蛋派라는 문학유파를 형성하였다. 또한 民話, 민요, 이야기 등의 전통적 민간형식을 구사하되 간결하고 평이한 문체와 대중적이고 유머러스한 표현, 고도의 정치적 내용을 가지는 독특한 풍격을 띠고 있으며, ‘노농병(勞農兵) 대중의 문학이른바 인민문학의 대표작가로 주목받았다. 작품은 중국 국민들의 커다란 사랑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도 계속하여 농촌생활에 대한 문학창작에 매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小二黑의 결혼, 李有才板話, 李家庄的變遷, 福貴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단편작품이 있다. 문혁 기간 중에 비판을 받으며 196718光明日報<趙樹理是反革命修正主義文藝路線的標兵’>라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1970년 모진 핍박 속에 사망하였다.

 

87. 커중핑(柯仲平, 1902~1964

 

  1902년 운남성 寶寧에서 태어났다. 중국 현대 시인이다. 북경정법대학을 졸업하였다. 1926년 상해로 가 창조사 출판부, 狂豹社 출판부 등에서 일하면서 건설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후에 상해노동자감찰대총부 비서, 연합회감찰부 비서 등을 맡았다. 1937년 연안으로 가 街頭詩를 창도하는 데 참여하였고, 섬서·감녕변방구민중극단 단장, 섬서·감녕변방구문화협회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건국 후에는 서북군정위원회 문교위원회 부주임 겸 서북예술학원 원장,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 말의 민족형식문제논쟁에서 민간형식을 민족형식의 중심원천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으며, 1964년 사망하였다.

 

88. 샤오싼(三, 1896~1983)

 

  189610월 호남성 湘鄕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현대 시인이다. 장사호남제1사범에서 모택동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친형 蕭瑜, 모택동, 蔡和森 등과 新民學會를 설립하였다. 1920년 프랑스 근검공학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92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3년에 모스크바로 가 유학하였다. 귀국 후 혁명투쟁에 가담하였다.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상주대표 자격으로 소련 하르키브에서 거행된 국제혁명작가회의에 참석하였고, 회의 간행물인 世界革命文學의 중국어판 발행에 참여하였다. 1934년 소련작가제1차대표대회에 중국좌익작가연맹대표 자격으로 발언을 하였고 소련에 있는 동안 많은 시를 발표하여 중국혁명, 무산계급의 투쟁을 찬송하고 제국주의 침략을 질책하였다. 이러한 문학 활동은 중국혁명문학과 세계혁명문학의 교류와 회합을 촉진하였다. 1939년 봄, 귀국하여 노신예술학원 번역부 주임을 맡았다. 신 중국 건립 후 세계평화운동과 대외문화교류업무에 종사하다 1983년에 사망하였다.

 

89. 사딩(沙汀, 1904~1992

 

   1904년 사천성에서 출생하였다. 1922成都에서 사천성제1사범학교에 다니던 중 5·4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30년대 초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노신의 지도를 받았다. 졸업 후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어렸을 때 사천성 농촌 지역을 수시로 방문하였던 경험으로 인해 지방군벌, 토호와 각종 사회세력의 부패한 현실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 1932년에 첫 단편소설 항선(航線)을 발표하였으며, 부두에서문학월보에 발표하였다. 단편소설집 항선, 호떡, 고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출판하였으며, 이 작품들에서 토지혁명운동의 영향과 지방군벌 통치하에서의 불안정하던 농촌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였다. 1940년대에 발표한 장편소설 도금기(淘金記)(1943)곤수기(困獸記)(1945)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 작품에서 작자는 사천성 지역 농촌이 겪는 군벌의 폭정, 처참한 가난, 관료의 혼탁한 정치 등을 생동적으로 묘사하였다. 서남문련부주석, 중공사회과학원문학연구소 소장, 중국작가협회창작위원회 부주임, 사천성 문련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92년 사망하였다.

 

90. 아이칭(艾青, 1910~1996)

 

본명은 장정함(蔣正涵). 1910년 절강성 금화(金華)에서 출생하였다. 5세까지 유모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1928년 항주 국립 서호예술학원 회화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근로 장학생의 신분으로 파리 유학을 떠났다. 거기에서 회화 공부를 하는 동시에 유럽 모더니즘의 시를 접하게 되었고, 벨기에 시인 베르하렌(Verhaeren)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932년 초 귀국을 하고, 상해에서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가입하여 혁명문예 활동에 참여했다. 그 후 수감되어 감옥에서 많은 시를 썼는데 대언하-나의 보모(大堰河——我的保姆)도 이 때 쓴 시다. 애청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처음 쓴 시 대언하-나의 보모는 발표와 동시에 성공을 거두었다. 중일전쟁 시기 한구(漢口)와 중경(重慶) 등지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문예진지(文藝陣地)의 편집 위원, 육재학교(育才學校) 문학과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41년 연안으로 건너가 시간(詩刊)의 주편을 맡았고, 전쟁 시기 창작은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여 북방(北方), 태양을 향하여(向太陽), 광야(曠野), 횃불(火把), 여명의 통지(黎明的通知), 뇌지찬(雷地)등 총 9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연안 창작 시기로 접어들면서 민족의 고난과 중국의 전투의지를 격앙된 어조로 표현하면서 이전 시기와는 창작 풍격을 보여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인민문학의 부주편을 맡았다. 1948년 이후 파도의 꼭대기에서(在浪尖上), 빛의 찬가(光的讚歌), 고대 로마의 투기장(古羅馬的大鬪技場)등의 작품집에 200여 수가 넘는 시를 창작하였다. 1957년 우파로 몰리면서 흑룡강, 신강(新疆) 등지로 쫓겨났다. 이후 20여 년 동안 창작활동을 중단하였다. 1979년 명예가 회복된 후, 중국작가협회부주석 등을 역임하며 유럽과 미국, 아시아 여러 국가를 방문하였다. 199655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애청 시선(艾青詩選)애청전집(艾青全集)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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