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문학논쟁사 속 지식인(10)

조회 수 3467 추천 수 0 2012.10.23 13:43:19

262. 다이왕수(戴望舒, 1905~1950)

 

  1905浙江 杭州에서 출생하였다. ‘우항시인(雨巷詩人)’이라 불리며, 중국의 모더니즘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본명은 戴朝安이고, 필명으로는 戴望舒, 艾昂甫, 江思 등이 있다. 1923년 가을, 상해대학 문학과에 입학하였고, 1925년에 震旦대학으로 교적을 옮겨 프랑스어를 학습하였다. 1926施蟄存, 杜衡 등과 함께 瓔珞순간(旬刊)을 창간하였고, 시집 凝淚出門을 발표하였다. 1928년에 雨巷을 발표하였으며 같은 해에 施蛰存, 杜衡, 冯雪峰과 함께 文學工場을 창간하였다. 1929년 첫 번째 시집 我的記憶을 발표하였는데, 이 시집은 그의 초기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집이다. 1932施蟄存이 주축이 되어 만든 잡지 现代의 창간에 함께 하였다. 11월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대학, 리옹대학 등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외국 문학 번역에 보냈다. 당시 그가 번역한 작품으로는 蘇聯文學史話, 比利時短篇小說集, 意大利短篇小說集등이 있으며 이밖에 스페인 작가의 소설집을 연구하기도 했다. 1935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1936년에 卞之琳, 孫大雨, 梁宗岱, 馮至 등과 함께 新詩월간을 만들었다. 이 잡지는 신월파(新月派)와 현대파(現代派) 시인들의 교류의 장이었다는 점에서 중국 근대 시단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 간행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중일전쟁 발발 후, 홍콩의 大公報문예부간의 주편으로 있었으며, 1938년 여름 星島日報·星島부간의 주편으로 있었다. 1949, 北平에서 열린 중화문학예술 공작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그 후 신문출판총서 국제 신문국 프랑스과 과장을 맡게 되었다. 1950北京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263. 타이징농(臺靜農, 1903~1990)

 

  1903安徽 霍邱에서 출생하였다. 漢口중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北京대학 중문과 수업을 청강하였으며, 후에 북경대학 대학원의 중국학과에서 근로 장학생이 되었다. 1920년대 향토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1925년 여름, 魯迅이 미명사(未名社)를 발기할 때 미명사를 구성원이 되었다. 단편소설을 위주로 하였지만 시, 산문도 창작하였으며, 주로 莽原반월간, 未名반월간에 발표하였다. 발표된 단편소설 地之子, 建塔者1928, 1930년 미명출판사(未名社出版)에서 未名新集의 일환으로 출판되었다. 地之子에는 총14편의 소설이 실렸는데, 거의 민간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 많았으며 일상생활이나 평범한 사건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냈다는 특징이 있다. 建塔者에는 총10편의 소설이 실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군벌 통치의 부당함을 폭로하였으며, 백색공포 아래에서도 투쟁을 견지하는 혁명지사를 높이 평가하였다. 후에 輔仁대학, 齊魯대학, 山東대학, 廈門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四川으로 건너가 白沙여자사범학원의 중문과 주임을 맡았다. 중일전쟁 종식 후에는 臺灣대학 중문과 교수를 맡았다.

 

264. 다이핑완(戴平萬, 1903~1945)

 

  1903廣東 潮安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가을, 국립 廣東고등사범학교(中山대학의 전신) 스페인어과에 입학하였다. 1924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4·12사변 후, 상해로 가 문학창작과 좌익문예운동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左聯발기 준비에도 참여하였으며 좌련의 기관지였던 拓荒者의 중요한 기고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상해에서 蔣光慈, 錢杏邨, 杜國庠, 洪靈菲 등과 함께 太陽월간과 我們월간을 창간하였다. 1935년에 상해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 단 서기를 맡았으며, 줄곧 좌련 활동을 한 좌련의 발전에 중요한 인물이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상해에 남아서 新中國文藝叢刊文藝新聞의 편집 작업을 하였으며, 每日譯報의 현지 소식판을 담당하며, 진보문예 간행물 사업에 힘썼다. 그가 발표한 저작으로는 出路, 都市之夜, 陸阿六, 苦菜등의 단편소설집이 있고, 前夜, 荔清과 같은 중편소설이 있다.

 

265. 타오멍화(陶孟和, 1888~1960)

 

  본명은 履恭. 1888天津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제1회 사범반을 졸업하였다. 성적이 우수하여 일본 東京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가서 역사와 지리를 수학할 수 있었다. 1910, 영국 런던대학에서 경제정치학원 사회학과 경제학을 수학하였고, 191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해 귀국하여 北京고등사범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14년부터 1927년까지 북경대학의 교수, 학과 주임, 문학원 원장, 교무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4년 중앙연구원 사회과학 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동시에 中國社會經濟史季刊의 주편을 맡았다. 1948년 중앙연구원 원사로 선출되었고, 1949년 중국 과학원 부원장, 사회역사고고언어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1955년 중국과학원 편역 출판위원회 주임이 되었고, 중국 과학원 철학 사회과학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초기 학술 연구는 사회제도를 개혁하여 민국을 인민의 국가로 바꾸고, 민치의 국가를 수립하자는 주장이 주된 핵심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조사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의 연구 조사 방법은 중국 사회 경제 조사 방법상에 있어 기틀을 마련하였다. 주요 저작으로는 中國鄉村與城鎮生活, 社會與教育, 孟和文存, 中國的城市生活與勞動, 社會問題, 北平生活費之分析, 中國勞工生活程度, 上海工人家庭生活水平的研究등이 있다.

 

266. 타오징순(陶晶孫, 1897~1952)

 

  본명은 陶熾, 1897江蘇 無錫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대학교까지 마쳤다. 1919九州제국대학 의과대학에 재학하던 당시 郭沫若과 친해져 동인잡지 Green(格林)을 창간하는 데 참여하였다. 19217, 창조사 발기 동인으로도 활약하였다. 아울러 創造季刊등의 잡지에 소설, 희곡, 번역문 등을 다양하게 기고하였다. 1919년에 창작한 木犀1925년에 창작한 音樂會小曲은 그의 가장 유명한 단편소설로, 중국신문학대계·소설3(中國新文學大系·小說三集)에 실렸다. 1927년 일본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大衆文藝學藝등의 잡지의 주편으로 일하였다. 1929년 혁명극단인 예술극사에 가입하였고, 193032일에 좌련(左聯)에 가입하였다. 1930년부터 주로 의료위생, 의학교학을 비롯한 의학 관련 연구에 많은 성과를 남겼다. 1946년에 대만으로 갔다가 1950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소설, 희곡, 번역, 음악, 미술, 의학, 천문,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과 두각을 나타내었다.

 

267. 두탄(杜談, 1911~1986)   

 

  1911河南 內鄉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杜興順이다. 1928년 겨울, 북경대학에 청강생의 신분으로 들었다. 1930北平 좌련(左聯)에 가입하였다. 北方文藝, 文哨, 擎旗手, 普羅詩選등의 간행물 편집을 한 바 있으며, 이 시기에 시를 창작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2년에 張秀中 등과 함께 시집 血在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상해에서 蒲風 등과 함께 중국시가회(中國詩歌會)를 발기하였고, 新詩歌를 출판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延安으로 가서 중앙연구회에서 학업을 시작하였고, 졸업 후 중앙연구회에 남아 신문 敎硏室에서 일하였다. 194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5東北으로 가서 東北영화제작소에서 있었다. 1949년 중앙 문화부 영화국으로 자리를 옮겼고, 영화극본 창작에 있어서 각색 작업을 맡기도 하였다. 1958, 北京영화제작소에서 翠崗紅旗라는 영화의 극본을 창작하였다.

 

268. 두윈셰(杜運燮1915~2002)

 

  1915년 말레이시아 페라크주에서 태어났다. 1945西南연합대학 외국어과를 졸업하였다. 1945부터 重慶大公報에서 편집 일을 하다가 싱가포르의 南洋여중 화교중학에서 교사로 지냈다. 홍콩 大公報부간의 편집을 맡고 新晚報에서는 번역 일을 맡았다. 1951년부터 北京 신화사(新華社) 국제부에서 일하였다. 그는 1940년부터 작품 창작을 시작하였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초기 <滇緬公路> 등의 시 작품을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穆旦, 袁可嘉, 鄭敏 등과 함께 九葉集을 발표하였고, 평론계로부터 구엽시파(九葉詩派)’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구엽시파는 중국 현대 시단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의 작품 가운데 몽롱시(朦朧詩)’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다시 한 번 시단의 주목을 끌었다. 작품집으로 杜運燮六十年詩選등이 있다.  

 

269. 두헝(杜衡, 1907~1964)

 

  1907江蘇에서 출생하였다. 上海 震旦대학 재학 시절부터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1926, 戴望舒와 함께 순간(旬刊) 瓔珞을 창간하였고, 施蟄存과 함께 월간 無軌列車, 월간 新文藝, 월간 現代등을 운영하였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창작·번역하였다. 단편집 石榴花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대부분 청춘 남녀의 감정을 잘 반영한 것들이다. 1933現代에 자신은 반동문학과 좌익문학 사이에 위치한 3종인(第三種人)’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3종인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논쟁 기간 중 <‘第三種人的出路> 등의 중요한 글을 발표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초기에는 전쟁을 피하여 홍콩에 있었으며, 1937년 장편소설 漩渦裏外를 발표하였다. 1942四川南方인서관 등에서 일하였다.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신문사에서 평론 일을 하였다.

 

270. 텅구(滕固, 1901~1941)

 

  上海미술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문학과 예술사를 공부하였다. 1929년 독일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32년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바로 정치에 참여하였는데, 행정원 참사 겸 중앙 문물보관 위원회 상임위원, 重慶 中央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정치에 몸담고 있던 시간에도 예술과 고고학 방면의 글을 썼으며, 독일 동방 예술학회에서 명예회원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38, 국립 北平예술전문학교와 국립 杭州예술 전문학교가 합병하여 昆明에 국립예술 전문학교로 되었는데, 이 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하지만 교장을 맡은 지 2년 정도 후 개인적인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후에 뇌막염으로 사망하였다. 저작으로는 唐宋繪畫史, 中國美術小史, 征途訪古述記, 唯美派的文學, 圓明園歐式宮殿殘跡, 死人的歎息, 迷宮등이 있다.

 

271. 덩쥔우(鄧均吾, 1898~1969)

 

  1898四川 고린(古藺)에서 출생하였다. 1921上海 泰東서국에서 편집 일을 하다가 郭沫若을 알게 되면서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고 그 때부터 문예 창작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신문학 사단이었던 創造社에 가입하였고, 이듬해에 郭沫若, 成仿吾, 郁達夫 등과 함께 創造季刊의 편집을 맡았다. 후에 林如稷 등과 함께 천초사(淺草社)를 만들어 淺草라는 문예 계간을 창간하였다. 1932년 상해의 신간(辛墾)서점에서 人類悟性論, 科學概論등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1934년 고향으로 돌아와 古藺 현립(縣立) 초급 중학의 교원과 교장직을 차례로 맡았다. 1937년에 成都로 가서 興中日報, 建國時報의 주편을 맡았으며, 차요(車耀)가 만든 大聲周刊에서 일하며 시국을 비판하는 글들을 썼다. 그 후 193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9년 고향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古藺縣 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당시 교육 사업을 비호하면서 공산당원 훈련반을 만들었으며, 1943년에는 古藺縣 교육과장이 되었다. 중일전쟁 종식 후, 교육계를 대표하여 현 참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重慶 북배면인(北碚勉仁)중학으로 가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중경시 참의회 비서를 맡으면서 당의 지하활동에 참여하였다. 국공내전 이후, 중경시 문교관할위원회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중경시 인민정부 문화국 문예과장, 중경시 문련 비서장 및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중경분회 부주석, 사천성 민간문예연구회 부주석, 紅岩·奔騰등의 문예 월간의 주편을 맡았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박해를 받다가 19699,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92, 중국공산당 중경시위원회 정치협상회의 강당에서 그를 위한 추도식이 거행되었으며 후에 鄧均吾詩詞選이 출판되었다.

 

272. 리니(麗尼, 1909~1968)

 

  1909湖北 孝感에서 출생하였다. 신 중국 성립 이후, 武漢大學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武漢 中南인민출판사 편집부 부주임·부사장 겸 총 편집, 廣州 暨南대학 중문과 교수, 譯文(후에 世界文學으로 개명)의 편집 위원 등을 각각 역임한 바 있다. 대표적인 산문으로 江南的記憶이 있다. 이 작품은 7·7 사변 후, 가솔들을 버리고 난을 피하는 모습에 깊은 자극을 받아 창작한 것이다. 그는 작품에 나는 그 땅을 기억한다. 나는 야간열차에서 열이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아 끈 적이 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작은 찻간에서 짧은 연필을 쥐고 흥분되지만 부끄럽게 달빛을 빌려 썼다. 내가 쓴 것은 다섯 글자였다. 강남, 아름다운 토지, 우리의!........”라고 썼다. 이 작품에 대해 巴金강남, 아름다운 토지, 우리의 이렇게 맑은 소리, 이렇게 두터운 감정, 우리는 영원히 江南的記憶의 작가를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비단 산문 창작에만 드러나진 않았다. 번역 작품도 남겼는데, 그가 번역한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의 글들은 진정한 작가의 이론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작품집으로는 巴金이 선별하여 엮은 白夜鷹之歌라는 두 편의 산문집이 있다. 문혁 기간에 박해를 받았고 1968廣州에서 사망하였다.

 

273. 루리(魯藜, 1914~1999)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에서 살다가 1932년 귀국하여 처녀작 母親을 발표하였다. 1934년 상해에서 좌익문학활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8년에 延安으로 가 중국인민 항일군사정치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延安組詩를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 泥土는 몇 대에 걸쳐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혁명열사 張志新 등은 그의 시를 좌우명으로 삼기도 하였다. ‘칠월시파(七月詩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시는 애국정서가 짙게 깔려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에 醒來的時候, 星星的歌, 鍛煉, 鵝毛集등의 시집이 출판되었고, 후에 毛澤東頌, 紅旗手, 英雄的母親등이 출판되었다. 1955년에 호풍(胡風)사건에 연루되어 26년 동안 복역하였다.

 

274. 루이스(路易士, 1913~)

 

  본명은 路逾이고, 紀弦路易士 등의 필명으로 활동하였다. 1913河北省 청원현(清苑縣)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 봄부터 시 창작을 시작하였고, 1933蘇州 미술 전과 학교를 졸업하고, 시 창작집 易士詩集을 발표하였다. 1934년에는 시 잡지 火山, 1936년에는 詩志를 창간하였다. 또한 오분성(吳奔星)과 함께 北平에서 시 잡지 小雅를 창간하였으며, 대망서(戴望舒)와 함께 상해에서 월간 新詩를 창간하여 모더니즘 시파에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1948, 대만으로 가서 臺北市 成功중학에서 25년 간 근무하다 퇴직하였다.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풍부한 시 창작뿐만 아니라 이론 면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가지고 있어 대만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파의 창도자로 주지(主知)적인 시 창작을 강조하였다.

 

275. 루위안(綠原, 1922~2009)

 

  1922湖北 황파(黃陂)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처음으로 <童話>라는 시로 등단하였다. <童話>로 대표되는 초기시의 몽롱함, 중기 작품의 비분 격정, 그리고 만년의 작품에서 보이는 진중함은 모두 그가 추구했던 독특한 예술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창작에 있어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는데, 그 중 한 특징은 종교적 색채였다. 시 평론가 장립군(張立群)시인의 작품 가운데서 은근히 보이는 종교적 의식과 종교적 감상은 매우 주의 깊게 볼 만한 현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憎恨>, <給天真的樂觀者們>, <詩人>, <站在伽利略面前>, <又一名哥倫布>, <重讀聖經>, <母親爲兒子請罪: 爲安慰孩子而作>, <祈禱> 등과 같이 여러 시대에 걸쳐 창작된 작품을 통해, 그가 지니고 있는 정서와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작품 속에 종교 의식, 종교적 인물, 종교적 정서 등이 적지 않게 표출하면서 농후한 종교적 색채를 갖게 되었다.

 

 

276. 레이스위(雷石榆, 1911~1996)

 

  1911廣東 臺山에서 출생하였다. 193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중국 좌익작가연맹 東京 분회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 동경 분회의 간행물이었던 東流, 詩歌등의 주편을 맡았다. 아울러 일본어로 시가 창작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일본어 시집 沙漠之歌는 출판 후 일본 문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중일전쟁 발발 후,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에 가입하였고, 또한 잡지의 주편을 맡으면서 많은 문예작품을 창작하는 한편 항일 구망 문화운동에도 힘썼다. 1939년에 昆明으로 가 제3회 문예계 항적협회 이사를 맡았으며, 昆明 분회의 일을 하면서 西南文藝잡지의 주편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끝나고, 대만으로 건너가 國聲報의 주필 및 부 주편을 맡았다. 1947년 대만대학 법학원의 부교수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 홍콩 南方학원의 부교수 및 中業학원의 교수를 맡았다. 1952天津에 초청받아 津沽대학(河北대학의 전신)의 교수가 되었고, 또한 중국 현대문학 교연실 및 외국문학 교연실의 주임을 맡았다.

 

277. 류이정(柳詒徵, 1879~1956

 

  1879江蘇 鎮江에서 출생하였다. 17세의 나이에 수재(秀才)에 합격하였고, 이후 三江사범학당에서 수학하였다. 졸업 후 江南 고등 상업학당, 江南 고등 실업학당, 寧屬사범학당, 兩江사범학당, 北京 明德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42, 南京고등사범학교에서 중문과 역사 교수를 담당하였고, 1925東南 대학에서 학생운동이 발생하자 北京으로 올라가 清華대학과 北京 여자 사범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찍이 南京 도서관 관장, 江蘇省 참의원으로 역임 한 바 있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에는 浙江대학, 貴州대학과 重慶 중앙 대학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으며, 국사관(國史館) 편집자로도 일하였다. 신중국 성립 이후에는 複旦대학에서 일하였다. 주편한 책으로는 江蘇省立國學圖書館圖書總目, 江蘇省立國學圖書館現存書目등이 있고, 저작으로는 中國文化史, 國史要義, 東亞各國史, 中國版本概說, 劬堂讀書錄등이 있다.

 

278. 류쳰(柳倩, 1911~2004)

 

  1911四川 榮縣에서 출생하였다. 국립 成都대학을 졸업하였다. 1932년에 穆木天, 薄風 등과 함께 중국시가회(中國詩歌會)를 만들고, 잡지 新詩歌를 창간하였다. 1933년에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였고, 郭沫若, 阿英, 任白戈, 鄭伯奇, 田漢, 周揚, 夏衍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진보 문예활동을 펼쳤다. 1936년 초, 上海에서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통일전선 성질의 가곡작가협회가 만들어 졌다. 회원으로는 上海의 저명한 시인, 작가, 작곡가 등이 포함되었는데, 柳倩도 이 협회의 회원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郭沫若의 소개로 南方局이 주도하는 문화공작위원회인 중화문예계항적협회(中華文藝界抗敵協會)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49년에 중국 인민 해방군이 되었다. 국공내전 이후, 上海군관회문예처와 華東문화부에서 일하였다. 柳倩은 중국 서예가 협회, 중국 시서화 연구회, 중국 노인 서화 연구회 등을 창건하는 데 앞장섰다. 일찍이 중국서예가 협회의 상임이사, 중국 서예가 협회 北京분회 부주석, 중국 작가협회 회원, 중국시사학회 고문, 중국 예술 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79. 루칸루(陸侃如, 1903~1978)

 

  1903江蘇 海門에서 출생하였다. 1920北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1922北京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시절 屈原, 졸업 후 宋玉을 출판하였다. 1924, 대학 졸업 후 清華대학 대학원 중국 고전문학 전공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대학원 졸업 후, 上海 중국 공학에서 교수를 맡았고, 동시에 復旦대학, 暨南대학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생전에 그는 중국 고전문학과 교학방법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하였고, 저술활동도 풍부했다. 그의 부인 馮沅君과 함께 쓴 中國詩史는 선구적인 연구 저작으로 영향력이 넓다. 그의 中國古典文學簡史는 이미 영어와 루마니아어로 번역된 바 있다.

 

280. 루징뤄(陸鏡若, 1885~1915)

 

  1885江蘇 武進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東京 제국대학 문과에서 수학을 하였다. 일찍이 일본 신파극(新派劇) 배우 학교를 나와 무대에 서기도 했다. 또한 稻田대학의 문예 협회에 가입하여 서양 연극을 광범위하게 수용하였다. 1908년 중국 유학생들이 조직한 춘류사(春柳社)에 가입하였다. 1910년과 1911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방학을 보냈는데, 이 때 중국 내 연기자들과 함께 연극 연출을 하기도 했다. 1912년 초 귀국하여 상해에서 歐陽予倩, 馬絳士, 吳我尊 등과 함께 신극동지회(新劇同志會)를 만들고, 직업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연극 이론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각본을 모은 책 家庭恩怨記가 있다. 그는 신극 연극회를 이끌고 3년 여 동안의 시간 동안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 때는 신해혁명이 실패한 바로 직후였으며, 연극은 상업화의 길을 걷지 않는다는 신조를 견지하였다. 그는 예술에 있어 두개의 얼굴이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장엄한 얼굴과 온화한 얼굴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장엄한 표정이 필요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신극동지회가 직업신극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15년 가을, 피로 누적과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281. 링슈화(淩叔華, 1900~1990)

 

  1900北京에서 출생하였다. 유년 시절에 저명한 화가였던 무소균(繆素筠), 왕죽림(王竹林), 학수옥(郝漱玉) 등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고홍명(辜鴻銘)에게 영어를 배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폭을 넓혔다. 1922년에 燕京대학 외국어과에 입학하여, 영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전공으로 하고, 일문학을 부전공으로 하였다. 또한 燕京대학 문학회에 가입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 그녀는 晨報부간에 女兒身世太淒涼, 資本家之聖誕, 我那件事對不起他등의 소설과 朝霧中的哈大門大街등의 산문을 게재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영향력이 그렇게 크지는 못하였다. 그 후 1925現代評論주간에 단편소설 酒後를 실었으면서 치밀하고 대담하게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여 문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 現代評論에 많은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現代評論, 新月, 晨報副刊, 小說月報, 北鬪, 文學雜志, 文季月刊, 武漢日報부간과 現代文藝등의 간행물에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고, 이 작품들을 모아 소설집 花之寺, 女人, 小孩, 小哥兒倆등을 출판하였다. 1935武漢日報의 부간 現代文藝의 주편을 맡았다. 중일전쟁 시기에 영어로 자전체 산문을 썼고, 1953년 영국에서 AncientMelodies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1947년 그녀의 남편 陳源은 프랑스로 떠났고 후에 영국에서 자리를 잡았다. 1956년 싱가포르의 南洋대학,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 중국 근현대문학 강의를 하였다. 1960년 자전 소설집 淩叔華短篇小說選과 산문 평론집 愛山廬夢影을 출간하였다. 1989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1990北京에서 사망하였다.

 

282. 리무안(李木庵, 1884~1959)

 

  1884湖南省 桂陽縣에서 출생하였다. 15세에 수재(秀才)에 합격하였고, 長沙嶽麓서원, 京師국자감태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후에 京師법정전문학당에 입학하여 1905년에 졸업하였다. 유신사상의 영향을 받아 교육을 전파하여, 민중의 지혜를 개발한다.”는 말을 혁신의 주요 요소로 삼았다. 학당, 八旗학당, 政法학당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신문사의 편집, 원고 선별 작업 등을 하며 자신이 믿었던 혁신사상을 실천하였다. 신 중국 성립 이후, 중앙인민정부 사법부 당 조직 서기, 중앙 법제 위원회 위원, 중앙 법제위원회 형사법규 위원회 주임위원과 전국 정협 위원 등을 맡았다. 주요 편·저작으로는 刑法草案, 懲治反革命條例, 懲治貪汙條例, 婚姻法등이 있다. 1955년에 최고 인민법원 고문, 湖南省 정협 부주석이 되었다.

 

283. 리루이(李銳, 1917~)

 

  1917湖南 平江에서 출생하였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국립 武漢대학 기계과에서 공부하는 동안 武漢 비밀학생연합의 책임자로서 학생운동을 하였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중공 중앙청년위원 선전과 과장으로 있었으며, 延安解放日報평론부 조장을 맡았다. 1949년부터 新湖南日報, 湖南일보의 사장이 되었으며, 중공 湖南省위원회 선전부 부장을 맡았다. 19581월에 毛澤東의 겸직 비서가 되었지만, 이듬해에 열린 廬山회의에서 맹렬한 비판을 받고, 모든 직무에서 해제되고 당적을 제거 당했다. 저작으로는 廬山會議實錄, 毛澤東的早年與晚年등이 있다.

 

284. 리이민(李逸民, 1929~)

 

  1929山西 運城에서 출생하였다. 1949山西 運城중급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56년에 중국작가협회 문학 강습소를 졸업하였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 1949년 혁명공작에 참여하였으며, 중공 晉南지역 위원회 사무실 간사, 運城 지구 문화국 부국장, 文聯주석, 山西省 문련 제3, 4, 5차 위원 및 작가협회 제1, 2, 3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50년에 작품 창작을 시작하였고 1962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雙喜臨門, 血戰運城과 중편소설집悲歡淚및 단편소설집 秋收的時候, 麗梅的心事, 初春的早晨, 同伴이 있고, 중편소설 兩個社長, 春水碧波, 國寶, 중편 르포르타주 涑水河邊, 紅心向黨등이 있다. 단편소설 捐糧1951山西省 인민정부 乙等상을 수상하였고, 장편소설 血戰運城2001년 제3伯樂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285. 리지예(李霽野, 1904~1997)

 

  1904安徽 적구(霍邱)에서 출생하였다. 친구 王魯彥에게 에스페란토어를 배웠는데, 이를 통해서 魯迅을 알게 되었다. 1925년 노신이 세운 문학사단 미명사(未名社)의 일원이 되었다. 1927년에 燕京대학 중문과를 수료하였고, 河北 天津여자사범학원, 輔仁대학, 百洲여자 사범학원, 臺灣대학 외국어과 교수, 南開대학 외국어과 명예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에 작품 창작을 시작하였고 1952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소설집 , 不幸的一群과 산문집 忙裏偷閑, 回憶魯迅先生, 給少男少女, 意大利訪問記, 魯迅先生與未名社, 잡문집 魯迅精神, 시집 海河集, 今昔集, 妙意曲등이 있다. 이밖에 그가 번역한 장편소설로 被侮辱與損害的, 簡愛, 在斯大林格勒戰壕中, 愛的家庭, 虎皮武士등이 있다.

 

286. 리칭야(李青崖, 1886~1969)

 

  1886湖南 상음(湘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상해 復旦대학을 졸업하였고, 1912년 벨기에 리에주 대학을 졸업하였다. 1921년 문학연구회에 가입하였다. 일찍이 湖光문학사를 조직하였으며, 프랑스 문학의 번역과 소개에 힘썼다. 주요 역작으로 모파상의 작품을 번역한 莫泊桑短篇小說全集, 플로베르의 包法利夫人, 졸라의 饕餮的巴黎, 뒤마의 三個火槍手등이 있다. 그는 長沙 湖南성립 제1사범학교의 교원 시절, 당시 같이 일을 하던 楊昌濟, 黎錦熙, 徐特立 등과 함께 학회를 결성하여 서구의 진보사상을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 蔡和森, 毛澤東, 蕭瑜 등과 진보 학생들이 만든 철학연구소모임 芋園을 지지하였다. 1930년 중엽, 상해 복단대학에서 중문과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모파상의 대표작들을 번역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내 문학계의 이목이 번역에 집중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가족은 프랑스어판 원작 莫泊桑全集만을 겨우 구해내었다. 복단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대륙의 안 지역으로 피난 가는 것을 따라 江西, 湖南을 거쳐 貴陽까지 갔다. 귀양에서 지내던 동안 항전문예 활동을 펼쳤으며 每周文藝社를 조직하였고 每周文藝副刊을 창간하여 항전활동의 중요성을 선전하였다. 1942년 가을, 湖南대학의 초청으로 湖南 辰溪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다양한 문학 수업을 개설하였다. 신 중국 설립 이후, 문학적으로 성과를 올린 그는 上海시 문헌위원회 주임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53년 상해 문사관이 성립되면서 부관장을 맡았다. 196910월 폐암으로 돌연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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