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학 지식인(9)

조회 수 3202 추천 수 0 2012.09.19 21:55:05

166. 쳰쉬안퉁(錢玄同, 1887-1939)

저쟝 우싱(吳興) 출생. 사상가. 어문개혁활동가.

1906년 일본으로 가서 와세다 대학 사범과에 입학하였고, 루쉰(魯迅)과 황칸(黃侃) 등과 함께 장타이옌(章太炎)으로부터 국학, 문자음운학 등을 배웠다. 장타이옌의 소개로 동맹회에도 가입하였다. 1910년 귀국 이후, 중학 교원, 《新青年》 편집, 베이징고등사범 국문과 교수, 베이징대학 교수, 베이핑사범대학 중문과 교수와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봉건주의 문화 및 제도와 문언문을 반대하고, 백화문을 사용하는 언어문자 개혁 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실행하였다. 그는 중국어병음자모를 개선하고 국제화된 한어병음자모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나중에 자오위안런(趙元任), 리진시(黎錦熙) 등과 국어로마자병음방식을 제정하여 문자 간소화 개혁의 선구가 되었다. 그가 저술한 《文字學音篇》은 최초의 고등학교 음운학 교과서로 사용되었고, 많은 음운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음운학자인 뤄창페이(羅常培), 웨이졘궁(魏建功), 바이디저우(白涤洲) 등은 그의 제자들이었고, 황셴판(黄現璠)도 그의 연구생이었다. 국어연구회, 국어통일주비회 등의 회원이었고, 1931년 국음자모강습소 소장을 맡았다. 《文字學音篇》 책은 장타이옌 등의 전통 음운학의 성과를 계승하고, 가오번한(高本漢)의 현대 음운학의 연구 방법과 관점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 교재로도 사용된다. 1925년 5․30 참안 이후, 그는 《關于反抗帝國主義》라는 글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인 중국 침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거하고, 중국인들이 민주와 과학, 현대 문화지식에 주의를 기울이며 각성하도록 호소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文字學音篇》, 《說文部首今讀》 등이 있다.

 

 

167. 천위안(陳垣, 1880-1971)

광둥 신후이(新會) 출생. 종교사학자. 교육자.

1910년 광화의학원(光華醫學院)을 졸업하였다.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쑨원(孫文)의 영향을 받아서 《時事畵報》와 《震旦日報》를 창립하여 반청 혁명 사상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선전하였다. 1912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 시기에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의 항일구망운동을 지원하는 등 항일 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는 《元典章》에 대해 2백여 권 이상의 관련 자료를 참조해 교정하였고, 《元典章校補釋例》를 저술하였다. 그는 종교사에 관해서도 《古教四考》(《元也里可温教考》, 《開封一赐樂業教考》, 《火袄教入中國考》, 《摩尼教入中國考》),《回回教入中國考》 등과 같은 저서를 남기고 있어 종교 전문가라고도 불린다. 그의 종교사 연구는 중서문화교류사 연구의 영역을 확대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1917년 중국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고 《元也里可温考》를 저술하였고, 원대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元西域人華化考》를 출간하여 국내외 사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원대 몽고 민족과 종교의 역사에 대해 자료를 수집해 연구한 《元西域人華化考》 책은 《元史》 뿐만 아니라 원대 60여 명의 문집도 자료로 이용하였으며, 사부(史部) 이외에도 경부(經部), 자부(子部), 집부(集部)의 저작물도 모두 이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元也里可温教考》는 종교 연구 이외에 원대사에 관해서도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서이다.

왕궈웨이, 량치차오가 사망한 후, 천인커는 1929년 칭화대학에 천위안을 국학연구원 지도교수로 추천하였지만, 그는 거절하였다. 그는 1929년 푸런대학 교장으로 임명되어 20여 년 동안 재직하였다. 이후로 푸런대학은 주스쭈(朱希祖), 마헝(馬衡) 등 저명한 학자들이 모였으며, 명문학교가 되었다. 1952년 고교원계 조정으로 푸런대학은 베이징사범대학으로 병합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천인커, 후스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는데, 《陳垣来往書信集》에는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1949년 후스와 천인커는 베이징을 떠나 각각 미국(이후 대만)과 광저우로 갔지만, 그는 중일전쟁 시기와 마찬가지로 줄곧 푸런대학에 남아 있었다.

그는 푸런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의 교장을 맡았고, 베이징대학, 베이핑사범대학, 푸런대학(輔仁大學) 등의 교수도 역임하였다. 1949년 이후 베이징사범대학 도서관 관장,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도서관 관장,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제2소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중앙연구원 원사에 임명되었다. 1920년대 그는 중외학자들에 의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저명한 학자로 호평을 받았고, 1930년대 이후에는 천인커(陳寅恪)와 함께 사학계의 2陳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대학교 교장으로 46년을 재직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1959년 79세로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을 맡기도 하였고, 문화대혁명 시기 연금되었다.

주로 원사, 역사문헌학, 종교사 등을 연구하였고, 원대(元代) 서역사(西域史) 연구의 권위자이다. 그는 중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의 도래와 전파에 대해 주의하였고, 중외문화교통사의 내용도 함께 고찰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元西域人華化考》, 《南宋河北新道教考》, 《明季滇黔佛教考》, 《清初僧諍記》, 《中國佛教史籍槪論》 등이 있다.

 

 

168. 천인커(陳寅恪, 1890-1969)

후난(湖南) 창사(長沙) 출생. 고전문학가. 언어학자.

그의 부 천싼리(陳三立)는 청말 4공자 중의 한 명으로 저명한 시인이고, 조부 천바오전(陳寶箴)은 후난 순무를 역임하고 개혁을 지지하는 개명된 독무였다. 이러한 집안 환경으로 인해 그는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등의 서적을 두루 통달하였다. 1910년 자비로 독일 베를린대학, 프랑스 파리고등정치학교 등으로 유학하였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귀국하였다. 1918년 쟝시성(江西省) 관비 지원으로 다시 미국 하버드대학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에는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가서 동방고문자학, 중앙아시아 고문자, 몽고어 등을 학습하였고, 티벳어, 만주어, 산스크리트어, 힌두어, 돌궐어, 투르크어 등 여러 언어에 능숙하였다. 1925년 칭화학교(淸華學校)가 대학으로 승격되고 국학연구원을 설립하였을 때, 과학적인 방법으로 국고(國故)를 정리하기 위해 왕궈웨이(王國維), 량치차오(梁啓超), 천인커, 자오위안런(趙元任) 등을 초빙하였다. 그도 이들 3명과 함께 국학대사라고 불렸다. 량치차오와 왕궈웨이는 1926년 칭화대학 연구원의 교수로 36세였던 그를 추천하였고, 연구원 주임이었던 우미(吳宓)와 량치차오가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고 한다.

항전에서 승리한 후,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하였다. 1949년 귀국 이후, 칭화원(清華園)에서 강의하면서 학술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국민당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소장이었던 푸쓰녠(傅斯年)이 대만으로 가기를 권유하였지만 이를 거절하고, 샹강(香港)의 초청을 받아 광저우 링난대학(岭南大學)에서 강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원계 조정으로 링난대학이 중산대학으로 합병된 이후에는 중산대학 교수를 맡았다. 중국과학원 사회과학부 위원, 중국문사관 부관장, 제3계 전국정협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박해를 받았다.

그는 청대 건가학파의 고증 방법과 서구의 역사에 대한 진화, 발전의 사상을 연계해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하고 종합적으로 탐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陳寅恪魏晋南北朝史講演錄》, 《唐代政治史述論稿》, 《金明館(叢稿初編》, 《金明館叢稿二編》, 《陶渊明之思想與淸談之關係》 등이 있다.

 

 

169. 천치넝(陳啓能, 1934- )

상하이 출생.

1952년 베이징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하였고, 1953년 졸업 이후 베이징러시아어전문학교(北京俄語專科學校)에서 러시아어를 학습하였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소련 레닌그라드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59년 귀국 이후,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세계사조와 세계역사연구소에서 연구하였다. 1985년 연구원으로 승진하였고, 《史學理論》과《史學理論研究》의 주편, 톈진사범대학과 상하이사범대학의 겸임교수, 중국사회과학원 캐나다연구 중심의 주임, 세계역사연구소 부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방문학자로 스탠포드 대학 후버연구소에서도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史學理論與歷史研究》, 《西方近代社會思潮史》(공편), 《史學理論大辞典》(공편), 《西方史學的東方回響》(공저), 《英國如何撤出殖民地》(주편), 《香港與英國的殖民撤退》(주편) 등이 있다.

 

 

170. 천헝저(陳衡哲, 1893-1976)

쟝쑤 우진(武進) 출생. 여성. 문학가.

1911년 상하이애국여학교에 입학하였고, 1914년부터 칭화학당 유학생반에서 학습하였다. 칭화학당의 지원으로 미국 뉴욕 바사여자대학(Vassa College)으로 유학 가서 서양사와 서양문학을 전공하였다. 1920년 시카고 대학에서도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미국에서 후스(胡適)와 런수융(任叔永), 양싱포(楊杏佛) 등과 교류하였다.

베이징대학 차이위안페이(蔡元培) 교장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베이징대학, 둥난대학 등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첫 번째 여자 교수였다. 5․4운동 시기 신문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17년 단편 백화소설인 《一日》을 발표하였다. 《新青年》과 《小說月報》 등에 백화문의 소설들을 계속 발표하였고, 시, 소설, 산문 등을 백여 편이나 썼다. 여성의 독립과 자주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주요 저서에 《文藝復興史》, 《西洋史》, 《小雨點》(단편소설집), 《衡哲散文集》 등이 있다.

 

 

171. 천멍쟈(陳夢家, 1911-1966)

난징 출생. 고문자가. 고고학자. 시인. 문학사가.

국립 제4중산대학(난징 중양대학의 전신) 법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9년 국립 제4중산대학 교수였던 쉬즈모의 추천으로 《新月》 2권 8호에 《那一晚》를 발표하였다.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모(徐志摩) 교수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일생 동안 계속되었고, 신월파의 중요한 인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2년 옌징대학 종교학원에서 학습하였고, 나중에 고문자학으로 전공을 변경하였다. 그는 1937년 원이둬의 추천으로 창사(長沙) 칭화대학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쿤밍 시난연합대학에서도 강의하였다. 1944년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가서 고문자학을 강의하기도 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중국의 동기(銅器) 자료를 수집하였다. 1952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과 학술위원회 위원, 《考古學報》 편집위원, 《考古通訊》 부주편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우파로 지목되었으며, 문화대혁명 동안 4인방의 박해를 받았다.

그는 주로 고문자학, 연대학, 고대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으며, 갑골문과 은주 시대 동기 명문, 한간 그리고 고대 문헌 등의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殷墟卜辞總述》, 《西周銅器断代》, 《武威漢簡》, 《老子今釋》, 《海外中國銅器圖錄考釋第一集》, 《尚書通論》, 《美帝國主義劫掠的我國殷周銅器集錄》 등이 있다.

 

172. 마커야오(馬克垚, 1932- )

세계중고사. 정부특별진첩 수혜자. 서유럽 봉건경제사, 중서 봉건사회 비교연구.

1952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이후에도 학교에 남아 강의하였다. 1985년 교수가 되었고,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역사학과 주임을 맡았다. 베이징대학 학위위원회 위원,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학술위원회 위원, 중국세계중세기사연구회 부이사장, 베이징역사학회 부회장, 중국역사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82년 중국 세계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영국과 그리스를 방문하였고, 1990년과 1995년에는 중국 사학 대표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17, 18차 세계 역사학 대회에 참석하였다. 영국, 독일, 한국, 인도 등의 국가에서도 학술 방문 및 학술회의에 참가해 교류 활동을 하였다.

세계중세사를 각 국가 간 비교 방법으로 오랫동안 연구하였고, 세계중고사, 아시아유럽 봉건사회 비교, 서구중고사료 및 사학 등을 강의하였다.

《西歐封建經濟形態研究》, 《世界歷史·中古部分》(주편), Asian and European Feudalism: Three Studies in Comparative History East Asia Institute, 《英國封建社會研究》, 《世界文明史》(주편) 등이 있다.

 

 

173. 마다정(馬大正, 1938- )

저쟝 인현(鄞縣) 출생. 몽고사.

1956년 산둥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였고, 1960년 졸업 이후 산둥대학 중국 근대사 연구생으로 공부하였다. 1964년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에서 중국 민족사를 연구하였고, 특히 수당민족사, 오이라트몽고사(衛拉特蒙古史)에 전념하였다. 1987년부터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부주임을 맡았고, 중국몽고사학회 이사, 중국중아문화연구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내몽고대학이 주최한 국제몽고학토론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厄鲁特蒙古史論集》(공저), 《漂流异域的民族-17至18世紀的土尔扈特》(공저) 《衛拉特蒙古簡史》(공저) 등이 있다.

 

 

174. 마만리(馬曼麗, 1943- )

저쟝 닝보(寧波) 출생. 여성. 서부변강사.

1953년 중궈런민대학 러시아문과에서 학습하였다. 1957년 베이징외국어학원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졸업하였다. 1974년 란저우대학(蘭州大學) 역사학과와 역사연구소에서 강의와 연구를 시작해 간쑤성사주지로연구회(甘肅省絲綢之路硏究會) 부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중국서부변강사지(中國西部邊疆史地)와 몽고역사인물평전 등에 관해 연구하였다.

《土尔扈特部的西遷及其重返祖國的鬪爭》, 《新疆歷史論文集》, 《准噶尔汗国史》(역저), 《西北民族關係史》 등이 있다.

 

 

175. 마셴싱(馬先醒, 1936- )

둥강추(東港區) 출생. 고대사.

타이완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사학연구소 석사,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문화대학 사학과 교수와 주임을 맡았고, 중싱대학(中興大學) 역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簡牘學要義》, 《漢簡與漢代城市》, 《漢代人口研究》, 《漢代之長安與洛陽》, 《漢史文献類目》 등이 있다.

 

 

176. 마루헝(馬汝珩, 1927- )

랴오닝(遼寧) 선양(瀋陽) 출생. 회족(回族). 몽고사.

1947년 국립둥베이대학 문학원 역사계에서 학습하였다. 1953년 런민대학 중국역사교연실 연구생이었고, 1956년부터 조교와 강사를 맡았다. 1972년 이후 베이징사범대학 청사연구조 강사, 런민대학 청사연구소 부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86년 교수로 승진하였다. 중국몽고사학회 이사, 중국중아문화연구협회 이사, 중국중아중아관계사연구회(中國中亞中俄關係史硏究會)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청대오이라트몽고사(淸代危魯特蒙古史)와 청대 신강사, 회민기의사 등을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蒙古族歷史人物論集》(공저), 《厄鲁特蒙古史論集》(공저) 등이 있다

 

 

177. 마융(馬雍, 1931-1985)

후난 헝양(衡陽) 출생. 고대사. 서역사.

1954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보조연구원,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중외관계사연구실 주임, 중국중아문화연구협회(中國中亞文化硏究協會) 부이사장, 국제중아문화연구협회(國際中亞文化硏究協會)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출토된 자료를 중요하게 여겨서 마왕퇴백서(馬王堆帛書)의 정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여러 국가의 언어에 능통하고, 외국 학술서를 소개하기 위해 《斯巴逹卡斯》 등 유명한 외국 서적을 번역해 출간하였다.

중국 고대사와 서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尚書史話》, 《西域史地文物叢考》, 《論西周時代的庶人》(공저), 《新疆歷史文物》(공저), 《古代社會》(공역), 《羅馬帝國社會經濟史》(공역), 《中國大百科全書》(民族卷, 外國史卷, 中國歷史卷) 등이 있다.

 

 

178. 마차오춘(馬超群, 1932- )

난다리(南大理) 출생. 회족(回族). 종교사, 회족사. 동남아시아사.

1955년 시난사범학원(西南師範學院) 역사학계를 졸업하였다. 윈난사범대학(雲南師範大學) 역사학과 교수와 주임, 둥난아연구소(東南亞硏究所) 소장, 중국세계고대사연구회 이사, 윈난성역사학회 부회장, 윈난회족연구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1년 South Dakota주 주립대학의 초청을 받아 6개월 정도 강의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基督教二千年》, 《雲南回族史》(부주편) 등이 있다.

 

 

179. 마헝(馬衡, 1881-1955)

저쟝 인현(鄞縣) 출생. 중국 근대고고학의 선구자. 금석학자. 고고학자.

난양공학(南洋公學)에서 학습하였고, 일찍이 경사, 금석학 등도 배웠다. 1922년 베이징대학 연구소 국학문 고고연구실 주임을 맡았고, 칭화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에서도 강의하였다. 1924년 청실선후위원회의 초청으로 청궁전의 물품을 조사, 정리하는 작업에 참가하였다. 1925년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 건립된 후, 고물관(古物館) 부관장, 고궁박물원이사회 이사 등을 거쳐 1934년 고궁박물원 원장이 되었다. 1928년 남경정부가 고궁박물원을 접수할 때도 참여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고궁박물원 문물의 서천과 유지, 보호 작업을 하였고, 항전 승리 이후에도 서천된 문물을 남경으로 옮겨오는 것과 관련된 일을 진행하였다. 국공내전 시기에는 베이핑이 공산당에 점령되기 이전 고궁 건축과 문물의 안전을 위해 원장으로서 저명한 인물들과 국민당에 전쟁을 하지 않도록 호소하여 베이핑의 문화와 고성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였다. 1948년 말 베이핑과 천진에도 국공내전의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그는 남경정부가 자신의 남하와 고궁박물원의 진품을 타이완으로 옮기도록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그는 고궁박물원 원장으로 유임하다가 1952년 베이징문물정리위원회 주임위원을 맡았다.

주로 금석학, 고고학 연구에 전념하였고, 청대 고증학을 계승하여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유적지의 발굴과 고찰을 중요하게 여겼다. 1952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대량의 갑골, 비첩 등의 문물을 고궁박물원에 기증하였고, 사망한 후에는 그의 가족들이 금석탁본 9천여 장을 고궁박물원에 기증하였다. 그는 청대 건가학파의 박학(樸學)의 전통과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채택하여 중국 금석학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金石學概要》, 《凡將斋金石叢稿》 등이 있다.

 

 

180. 마창서우(馬長壽, 1907-1971)

산시 시양현(昔陽縣) 출생. 중국 민족학과 인류학의 토대 설립자. 민족사. 서남 소수민족학.

1929년 난징중양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민족학을 전공하였다. 1933년 졸업 이후에도 조교로 학교에 남아 비교 언어학, 인류학, 고고학, 민족 조사방법 등을 학습하였다. 1936년 중앙박물원에서 일하면서 쓰촨 등지에서 강족, 장족 등에 관한 사회와 역사를 고찰하였다. 1942년 둥베이대학(쓰촨 소재), 진링대학(金陵大學, 청두 소재), 쓰촨대학 등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저쟝대학, 푸단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1955년 시베이대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중국 사학 전통과 서구의 근현대 사회학, 인류학, 언어학, 고고학 등을 융합한 과학적 연구 방법을 사용하여 중국 서남 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민족 조사를 진행하였고, 민족학과 인류학에 대한 토대를 닦았다. 1950년대 이후, 이와 같은 중국 사학 전통과 서구 근대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결합해 흉노학, 선비학, 돌궐학, 장학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馬長壽民族學論集》이라는 연구 성과물을 출간하였다. 특히 그는 민족학과 인류학의 이론과 방법을 연구하면서 지역 문제와 결합해내는 것을 강조하였고, 문헌 자료 이외에도 실지 조사 연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康藏民族之分類體質種属及社會組織》, 《凉山羅夷的族譜》,   《嘉戎民族社會史》, 《北狄和匈奴》 등이 있다.

 

 

181. 황윈메이(黃雲眉, 1898-1977)

저쟝 위야오(余姚) 출생. 명청사 대가.

1929년 진링대학(金陵大學) 문화연구소 연구원과 교수를 맡았다. 중일전쟁 승리 후, 후쟝대학(滬江大學), 우시국학전수관(無錫國學專修館) 교수에 부임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산둥대학, 중문과와 역사학과 교수, 역사학과 주임, 도서관 관장, 중국 고대사 교연실 주임 등을 역임하였고, 지난시 민맹주임위원, 산둥성 민맹 부주임, 산둥성 역사학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6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사, 문학사, 음운훈고학, 판본 목록 분야도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명사의 연구에서 《明史考證》(8권)이라는 국내외 학자들의 인정을 받는 연구 성과물을 출간하였다. 청대에 편찬된 《明史》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누락된 부분이 많은 것에 비해, 그는 《明實錄》뿐만 아니라 명대에 국가와 개인에게서 출간된 4백여 종의 자료를 참고해 30여 년이 걸려 완성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明史考證》, 《柳宗元文學的評價》, 《李卓吾事實辨證》, 《明實錄分類索引》, 《邵二雲先生年譜》 등이 있다.

 

 

182. 황스졘(黃時鑒, 1935- )

상하이 출생. 몽고사.

1953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서 학습하였다. 1958년부터 1979년까지 네이멍구대학(內蒙古大學) 역사학과 및 몽고사 연구실에서 강의와 연구에 종사하였다. 1979년에는 항저우대학 역사학과로 옮겨 강의하였고, 1987년 교수로 승진하였다. 1986년부터 원사 연구생 지도, 《元代史料叢刊》 편집, 중국몽고사학회 이사, 중국원사연구회 이사, 중국대외관계사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주로 몽고사, 원대 사회문화사, 북방 유목민족과 동서문화 교류사 등을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元朝史話》, 《耶律楚材》 등이 있다.

 

 

183. 황원비(黃文弼, 1893-1966)

후베이 한촨현(漢川縣) 출생. 고고학자. 서북사지학자(西北史地學者).

1918년 베이징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베이징대학 연구소 국학과에서 강의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시베이연합대학과 쓰촨대학 교수, 시베이대학(西南大學) 역사학과와 변정과(邊政科) 주임, 베이핑연구원 사학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시베이(西北) 과학고찰단의 네이멍구, 신쟝 지역 고찰에 참가하였고, 1934년에는 시베이 과학고찰단의 전임 연구원이었다. 신쟝 지역을 4차에 걸쳐 고찰하였고, 시베이 관련 고고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을 맡았다. 문화대혁명 동안 박해를 받았다.

주로 서북사지와 신쟝(新疆) 지역에 대한 고고학을 오랫동안 연구하였고, 고찰과 발굴의 성과로 누란(樓蘭), 구자(龟兹) 등 고국(古国)과 수많은 고성의 지리적인 위치 및 역사적인 변천을 논증하였으며, 신쟝(新疆) 지역의 다른 시기 역사 문화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축적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高昌陶集》, 《羅布淖尔考古記》, 《吐鲁番考古記》, 《新疆考古發掘報告》 등이 있다.

 

   

184. 리다자오(李大釗, 1889-1933)

허베이 러헝(樂亨) 출생.

1907년 톈진베이양법정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졸업 이후 일본으로 가서 와세다대학 정치본과에서 학습하였으며, 이곳에서 사회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1916년 귀국 이후, 그는 신문화운동에 참가하면서 민주와 과학 정신을 선전하였고, 전통 유교, 구도덕 등 봉건사회의 문화를 비판하였다. 1917년 소련의 10월 혁명 및 1919년 5․4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1918년 베이징대학 경제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5․4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新青年)》과 《每周評論)》 등에 《法俄革命之比較觀》, 《我的馬克思主義觀》 등 소련의 10월 혁명을 찬양하며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1921년 공산당을 창당한 초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쑨원과 국공합작을 교섭하여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반제반봉건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가 1927년 베이징에서 장작림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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