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학 지식인(12)

조회 수 3210 추천 수 0 2012.09.23 20:43:55

245. 치궁(啓功, 1912-2005)

베이징 출생. 고전문헌학. 서화가. 국학대사. 만주족(愛新覺羅氏).

청 옹정제 5자와 친왕 훙저우(弘晝)의 제8대손이다. 베이징 후이원중학(匯文中學)을 중단한 후 독학하였다. 1933년 푸쯩샹(傅增湘)의 추천으로 천위안에게 배웠고, 푸런중학(輔仁中學) 국문 교사로 초빙 받았다. 1938년 푸런대학 국문과 강사, 고궁박물원 전문 위원 등을 맡았으며, 고궁문헌관에서 자료를 조사하고 문물 감정을 하는 등의 업무를 진행하였다. 1949년 푸런대학 국문과 부교수 겸 베이징대학 박물관과 부교수를 역임하였다. 1952년 이후 베이징사범대학 부교수, 교수, 국가문물감정위원회 주임 위원, 중앙문사연구관 관장, 박사연구생 지도, 구삼학사(九三學社) 고문, 중국서법가협회 명예 주석, 세계화인서화가연합회창회 주석, 중국불교협회, 고궁박물원, 국가박물관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명말청초 불문거장이고 시인인 서법가 파산선사(破山禪師)를 일생 동안 존경하였다. 저명한 서화가였고, 언어문자학, 고서화감정학, 탑본(榻本)도 연구를 진행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古代字體論稿》, 《啓功韵語》, 《漢語現象論叢》, 《論書札記》, 《說八股》, 《啓功全集》 등이 있다.

 

246. 가오추순(高去尋, 1909-1991)

허베이(河北) 안신인(安新人). 고대사.

1931년 베이징대학 예과에서 역사학과로 전입하였다. 졸업 논문인 〈李峪出土銅器及相關之問題〉에서 그는 출토된 동기에 대해 진시대의 동기라는 것과 진시황이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을 비판하면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북부 지방과 시베리아의 관계를 탐색해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1935년 은허 제12차 발굴인 후가장(侯家莊) 서북강(西北岡) 제3차 작업에 참여하였고, 1954년 책임자이고 스승이던 량쓰융(梁思永)이 사망하여 그가 관련된 정리와 보고서 작업을 맡았다. 은허 제12차 발굴 작업이 《侯家莊》 보고서로 출간되었다. 사어소(史語所)를 따라서 타이완으로 옮겨왔으며, 연구원으로 승진하였다. 1966년 중앙연구원 원사가 되었으며, 1973년 사어소(史語所) 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候家莊》 등이 있다.

 

247. 양즈쥬(楊志玖, 1915-2002)

산둥 창산현(長山縣) 출생. 중국 고대사. 회족.

어릴 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여 가족 등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서 고향 현과 성 교육청의 장학금을 받았다. 1934년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정톈팅(鄭天挺), 쳰무(錢穆), 푸쓰녠(傅斯年) 등의 지도를 받았다. 중일전쟁 시기 학교를 따라 창사(長沙), 쿤밍으로 가서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난카이대학의 3개 대학이 연합한 시난연합대학에서 학습하였다. 1938년 졸업 이후,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외부 연구생이 되었는데, 당시 어언소가 정식으로 연구생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9년 베이징대학 문과연구소에 입학하여 야오충우(姚從吾)와 샹다(向達)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천인커(陳寅恪), 뤄창페이(羅常培), 탕융퉁(湯用彤)의 지도도 받았다. 1941년 졸업 이후, 시난연합대학 교원, 난카이대학 교원,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보조연구원 등을 맡았고, 난카이대학 부교수,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50여 년을 대학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였고, 난카이대학 역사학과에 중국통사, 원사, 송요금원사, 몽고사전제, 수당사, 사학명저선독, 중국역사문선, 중국토지제도사, 중국회족사, 중국교통사 등의 과목을 개설하며 학과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中國歷史大辭典》 주편, 《歷史教學》 편집위원회 주임, 중국원사연구회 명예 회장, 중국몽고사학회 이사, 중국해외교통사학회 고문, 중국민족사학회 고문, 중국당사학회 고문 등도 역임하였다. 톈진시 제6, 7, 8계 정치협상회의 위원과 상무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주로 원사, 수당사, 중국 회족사, 중국 토지제도사 등을 오랫동안 연구하였고, 원대 마르코폴로와 중서교통사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元代中國伊斯蘭教派初探》,《元代回族史》, 《隋唐史通俗講話》,《中國歷史大辭典》(주편, 수당오대사 주편) 등이 있다.

 

248. 정펑위안(鄭逢源, 1916-1946)

쟝시 진시인(金溪人).

1934년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구제강(顧頡剛)에게 배웠고, 졸업 이전 수학 여행에 동학인 우샹샹(吳相湘)과 린준(林君) 등과 함께 갔다. 중일전쟁 시기 학교를 따라 남쪽으로 옮겨가 시난연합대학에서 학습하였다. 1938년 졸업 이후, 베이핑도서관 항전사료정집위원회 중문조에서 중문 자료를 정리하였다. 요총오와 쳰무(錢穆)가 푸쓰녠(傅斯年)에게 정펑위안을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서 연구하도록 추천하였다. 그는 1939년 쳰무가 우시(無錫)에서 《中國歷代地理沿革圖》를 편찬할 때 보조 연구원을 담당하였다. 1944년 충칭에서 전문 사학 잡지인 사학서국(史學書局)을 창립해 구제강과 류융샹(劉熊祥)을 총편집으로 초빙하였다. 1946년 구제강이 《西北考察日記》를 출판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수락하지 못하였다. 그가 일찍 사망하여 사학서국도 출판을 중지하였고, 연구하던 《讀史分年地圖》도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는 역사지리를 연구하였기 때문에 구제강이 창립한 역사지리 학술 단체인 우공학회(禹貢學會)에 회원이 되었다. 1939년 《治史雜志》 第二期에 《丘虛通徵》을 발표하였다.

 

249. 왕유저(王玉哲, 1913-2005)

허베이 선현인(深縣人). 고대사.

1936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쳰무(錢穆)를 스승으로 삼아 중국 고대사를 배웠다. 1940년 졸업 이후, 베이징대학 문과연구소에서 사학부 연구생으로 탕란(唐蘭)의 지도를 받았다. 이외에도 펑유란(馮友蘭), 류원뎬(劉文典), 원이둬(聞一多) 등에게도 수업을 들으며 배웠다. 1943년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으며, 화중대학(華中大學), 후난대학(湖南大學), 난카이대학 역사학과에서 부교수, 교수, 박사생 지도를 맡았고, 중국선진사학회 부이사장, 중국공자기금회 부회장, 중국박물관학회 이사장, 중국은상문화학회 이사, 난카이대학 학술위원회 위원, 난카이대학 학위위원회 위원, 텐진시문물박물관계열고급직칭평심위원회 주임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3년 중국고교문과교육대표단 단장으로 독일을 방문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유물사관으로 상주사회사에 대해 연구하였고, 1978년 《歷史研究》와 《中國社會科學戰線》 잡지사가 창춘에서 개최한 중국고사분기문제학술토론회에서 서주시대가 초기 봉건사회라고 주장하였다.

주로 중국 고대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으며, 상고민족사, 역사지리, 사회형태 등에 집중하였다. 고문헌, 고문자, 고음운 등에 관심을 갖고서 상족(商族)의 기원, 상대 사회사, 선진민족사, 서주사회의 성질 등을 탐구하였다. 특히 상대사회를 연구할 때 갑골문자 재료를 이용하여 갑골문에 반영된 고대 민족, 상왕 명호, 왕위계승제도, 노예 등 은상 시대 역사의 여러 문제와 사회의 성질을 탐구하여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60여 년 동안 교학에 전념하면서 중국통사, 선진사, 진한사, 지리연혁사, 은주사, 역사문헌, 갑골사료선독, 사학명저선독, 은주사전제(殷周史專題) 등의 과목을 개설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上古史綱》, 《中國歷史大辭典·先秦史》(주편), 《古史集林》, 《中華遠古史》 등이 있다.

 

250. 류융샹(劉熊祥, 1919-1994)

후난(湖南) 헝둥인(衡東人). 중국 근대사.

1940년 시난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을 졸업하였다. 저쟝대학(浙江大學) 사지연구소(史地硏究所)에서 연구생으로 학습하였으며, 1942년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저쟝대학 사지연구실 편집, 후난국립사범학원 부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그는 《史學雜志》에 《甲午戰爭前清朝的海防建設》, 《甲午戰後李鴻章的聯俄政策》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화베이인민혁명대학 정치연구실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1951년 시베이사범학원 교수에 부임하였다. 중국민주동맹간쑤성위원회 부주임 위원, 간쑤성(甘肅省) 정협위원, 간쑤성지편찬위원회 위원, 간쑤성사학회 이사 등도 맡았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清季四十年外交與海防》, 《中國近代史》, 《中國近代史研究》 등이 있다.

 

251. 우팅츄(吳廷璆, 1910-2003)

저쟝 항저우(杭州) 출생. 아시아사.

1929년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32년 징두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서 유학하였다. 1936년 귀국 이후 산둥대학에서 강사를 맡았다. 쓰촨대학과 우한대학(武漢大學)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1949년 난카이대학 역사학과 교수, 주임, 총무장, 역사연구소 소장 등을 맡았다. 1951년 톈진시 역사학회 이사장과 1977년 톈진시 정협부주석을 맡았으며, 1980년 이후 중국대백과전서외국사권편위 겸 아시아사조 주임, 국무원학위위원회 제1계학과평의조 역사조 일원, 중국일본사학회 초대 회장, 제5, 6, 7계 전국정협상위, 《歷史教學》 총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국가학설과 혁명 및 개혁의 관점에서 명치유신을 연구해 명치유신 자산계급혁명설을 제시하였으며, 중국의 일본사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주로 아시아사와 동서교통사를 연구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일본사학과 개설에 공헌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日本史》(주편), 《日本近代化研究》(주편), 《吳廷璆史學論集》 등이 있다.

 

252. 왕수민(王樹民, 1911-2004)

우칭현(武淸縣, 현 톈진에 속함) 출생. 중국 사학사.

1929년 베이징대학 문예과에 입학하였으며, 1931년 역사학과에서 학습하였다. 구제강에게 배우며 영향을 받았고, 양샹쿠이(楊向奎), 후호우쉬안(胡厚宣), 장정랑(張政烺) 등과 《史學論叢》을 출판하였다.

1937년부터 1951년까지 산간칭바수(陝甘靑巴蜀) 등 13개 지역에서 주로 강의, 편집, 사지 연구, 논문 발표 등을 진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허베이톈진사범학원 사지계에서 교사를 담당하였다. 주로 고증을 기초로 청대 학술사를 연구하였고, 청대 학자들의 문집을 편집, 정리하며 청대 학자와 학술 사상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는 경학을 주로 하고 사학을 종으로 하는 건가학자들의 연구 방법에 대해 긍정하였으며, 청말 금문학파가 정치, 학술에 끼친 영향에 대해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하였다.

주로 중국 고대사, 사학사, 고적 정리, 역사 문헌 연구, 사학 이론 등을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宋史紀事本末》(點校), 《元史紀事本末》 (點校), 《史部要籍解題》, 《甘青見聞記》(공저), 《中國史學史綱要》 등이 있다.

 

253. 왕충우(王崇武, 1911-1957)

1932년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덩광밍(鄧廣銘), 왕유촨(王毓銓), 장정랑(張政烺), 푸러환(傅樂煥) 등과 함께 학습하였다. 1937년부터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서 장기적으로 명사를 연구하였다. 연구소에서 《明實錄》의 교감 작업에도 참여하여 《明實錄校勘記》를 출간하였다. 1948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청사와 중서교통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953년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제3소 연구원을 맡았다. 1954년 마오쩌둥이 지시한 《資治通鑒》의 교감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주로 명청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으며, 고대 인구사, 원사, 중프전쟁사 등의 분야도 연구를 진행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明初屯墾政策與井田說》, 《明靖難史事考證稿》, 《明代的商屯制度》, 《明朝商人殖民制度》, 《戚繼光》, 《太平天國史料譯叢》(공역), 《秦漢之户口與政治》 등이 있다.

 

254. 우샹샹(吳相湘, 1912-2007)

후난 창더인(常德人). 중국 근현대사.

베이징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明實錄》 교감 책임을 맡았다. 중일전쟁 시기 그는 국민당 제9전구 사령부에서 업무를 맡았고, 전쟁사를 편찬하기 위해 전쟁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여러 차례 군을 따라 전선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第三次長沙會戰》을 편찬하였다. 일본 군부 및 외교 당안을 참고하면서 중일전쟁 관련한 대량의 자료를 수집하여 1970년대 《第二次中日戰爭史》(상, 하권)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중국인의 장기항전에 대한 저술로 권위 있는 연구서이다. 항전 승리 이후, 베이핑고궁박물원 편찬, 란저우대학(蘭州大學) 부교수, 타이완대학 역사학과 교수, 싱가포르 난양대학 역사학과 주임, 타이완시 중국문화학원 사학연구소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학의 초청으로 《中國革命同盟會史實研究計劃》을 주도하였으며, 뉴욕 콜롬비아대학의 《中國民國時期人名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주로 중외 각 국가의 제1차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며 객관적으로 사실을 추구하였으며, 중국 근대사, 현대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晚清宫廷實紀》, 《清宫秘談》, 《孙逸仙先生傳》, 《民國百人傳》, 《民國政治人物傳》, 《中國現代史料叢書》(주편), 《中國現代史叢刊》(주편), 《中國史學叢書》(주편) 등이 있다.

 

255. 왕더자오(王德昭, 1914-1982)

쟈싱스포쓰인(嘉興石佛寺人). 중서 역사.

베이징중파대학 화학과에서 1년 학습하다가 그 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집이 넉넉하지 못해 원고를 쓰고 번역을 해 생활을 유지하였다. 1935년 12․9 운동에 참가하여 체포되기도 하였고, 항적후원회의 업무에도 참여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윈난 쿤밍 시난연합대학에서 대학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觀察日報》 주필, 충칭 《益世報》 국제판 편집을 맡았으며, 《中華日報》를 창립하였다. 1942년 국립구이저우대학(貴州大學)의 초빙으로 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1947년 타이완사범대학의 초빙으로 사지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5년 미국 하버드대학연구원으로 가서 1년 만에 석사학위를 획득하였으며, 1957년 다시 타이완사범대학으로 돌아왔다. 1962년 이후, 싱가포르 난양대학(南洋大學)의 초빙으로 역사학과 교수, 주임, 문학원 원장을 맡았으며, 샹강 중원대학(中文大學) 신아서원(新亞書院)의 초빙으로 역사학과 교수, 주임, 중국문화연구소 부주임을 역임하였다. 1977년 퇴임 이후에도, 중원대학 중국문화연구소에서 고급연구원을 담당하였고, 연구생들을 지도하였으며, 1980년 난카이대학의 명청사토론회에도 참가하였다.

주로 중서역사와 중서교통사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明季之政治與社會》, 《清代科擧制度研究》, 《中原歸來》, 《戊戌政變》, 《各國在華领事裁判權》, 《國父革命思想研究》, 《西洋近代思想史》(역서) 등이 있다.

 

256. 진바오샹(金寶祥, 1914-2005)

저쟝 샤오산(蕭山) 출생.

모친이 역사연의 소설가인 차이둥판(蔡東藩)을 그의 선생으로 모셔와서, 그는 어릴 때부터 역사적인 소양과 흥미를 배양할 수 있었다. 1938년 베이징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쓰촨대학 강사, 잉스대학(英士大學) 부교수를 역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시베이사범학원 교수, 역사계 주임, 간쑤성(甘肅省)역사학회 제3, 4계 회장, 중국돈황투르판학회 고문, 당사연구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간쑤성 5계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주로 수당오대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唐史論文集》, 《隋史新探》, 《吐蕃的形成發展及其和唐的關係》 등이 있다.

 

257. 옌겅왕(嚴耕望, 1916-1996)

안후이(安徽) 퉁청현인(桐城縣人).

1941년 국립우한대학(武漢大學)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쳰무(錢穆)가 그의 스승이었다. 치루대학연구소(齊魯大學硏究所) 보조연구원,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연구원, 샹강 중원대학(中文大學) 교수, 중원대학 중국문화연구소 고급연구원, 미국 하버드대학 방문학자, 예일대학 객원교수, 신아연구소(新亞硏究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 중앙연구원 원사가 되었다.

주로 중국 역사지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으며, 방대한 문헌 및 사료와 세밀한 고증 작업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唐代交通圖考》, 《两漢太守刺史表》, 《中國地方行政制度史》,   《唐史研究叢考》 등이 있다.

 

258. 리쭝둥(李宗侗, 1895-1974)

베이핑시 청샹후퉁(丞相胡同) 출생. 허베이(河北) 가오양인(高陽人). 중국 고대사.

삼촌인 리스쩡(李石曾)을 따라 프랑스로 유학 가서 파리대학을 졸업하였다. 1924년 귀국 이후, 베이징대학의 초청으로 프랑스어과 주임에 부임하였고, 중파대학(中法大學)에서도 강의하였다. 국민정부 재정부 전국주책국(全國注冊局) 국장, 고궁박물원 비서장, 중앙정치회의 북평 분회 위원, 베이핑연구원 사학연구회 주임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고궁의 문물을 충칭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았고, 운송하지 못한 중앙도서관의 도서를 자신의 집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중파대학 교수 겸 문학원 원장을 맡았으며, 1948년 타이완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후 국사관 사료심사위원, 편역관 편심위원, 타이완성문헌위원회 고문, 중화문화부흥운동추행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古代社會史》, 《歷史的剖面》, 《中國史學史》, 《李宗侗自傳》, 《李宗侗文史論集》 등이 있다.

 

259. 우펑페이(吳豊培, 1909-1996)

베이징 출생. 현대 장학자(藏學者). 판본목록학. 문헌학.

1930년 베이징대학연구소 국학문의 연구생으로 주시쭈(朱希祖), 멍썬(孟森)에게 명사를 배웠다. 1935년 졸업 이후, 다음해 베이핑연구원 사학연구회 편집으로 초빙되어 명사를 계속 연구하면서 서장사지(西藏史地)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공학회(禹貢學會)에 가입하여 《記班禪達賴失和事》를 발표하였고, 《邊疆叢書》 6권을 편집하였다. 중일전쟁 시기에도 각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민족학원 연구부에서 문헌 자료의 정리와 서장사지 연구를 진행하였다. 쑤진런(蘇晋仁)과 함께 《清實錄》 중 장족 사료를 편집하였다. 이후 《中國歷史地圖集》, 《中國地方志聯合目錄》 등 주로 서북 지역에 대한 자료 조사와 연구서를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고, 1957년부터 중앙민족학원 도서관에서 민족 고적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연구, 편찬에 종사하였다. 중국지방지집성편집지도위원회 위원, 서장사회과학원 서장학한문문헌편집 고문,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학술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明馭倭錄校補》, 《清實錄》, 《中國歷史地圖集》(편집), 《中國歷史地圖集》(편집), 《明代西北區圖幅說明書》, 《辭海》, 《中國地方志聯合目錄》(편집) 등이 있다.

 

260. 추솬영(瞿宣穎, 1894-1973)

후난 산화인(善化人, 현 長沙市).

청말 군기대신 추훙지(瞿鴻禨)의 아들이다. 상하이 푸단대학을 졸업하였다. 북양정부 국무원 비서, 국사 편찬처 처장, 인주국(印鑄局) 국장, 후베이성 정부 비서장 등을 맡았다. 이후 난카이대학, 옌징대학, 칭화대학, 푸런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상하이시 정협 위원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시, 사(詞), 서, 화에 모두 능숙하였으며, 문학과 역사의 일화도 잘 이해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漢代風俗制度史前編》, 《漢魏六朝賦選》, 《北平史表長編》, 《同光間燕都掌故輯略》、《中國社會史料叢鈔》, 《方志考稿甲集》, 《長沙瞿氏叢刊》 등이 있다.

 

261. 허스지(何士驥, 1893-1984)

저쟝 주지(諸暨) 출생. 고대사.

1925년 칭화연구원 졸업 이후, 고고연구소, 시베이사범대학, 베이징대학, 중파대학(中法大學), 베이징사범대학 강사를 맡았고, 국립시베이사범대학 교수 및 주임에 부임하였다. 사범대학연구원 편집과 국어대사전편찬처 특약 편집, 국립베이핑연구원 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部曲考》는 학계에서 찬사를 받았고, 여러 차례 고고학적 발굴에도 참여하였다.주요 연구 성과로서 《南北響堂寺及其附近石刻目錄》, 《唐大明興慶及太极宫圖殘石發掘報告》, 《西北考古記略》 등이 있다.

 

262. 야오충우(姚從吾, 1894-1970)

허난 샹청현인(襄城縣人). 요금원사.

1917년 베이징대학 문과 사학문에 입학하였다. 1920년 졸업 이후, 베이징대학 문과연구소 국학문연구생이 되었다. 1922년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유학하여 역사 방법론, 흉노사, 몽고사, 중서교통사를 전공하였으며, 1931년 베를린대학 한학연구소 강사를 맡았다. 1934년 귀국 이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역사 방법론, 흉노사, 요금원사, 몽고사 등을 강의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시난연합대학 역사학과 교수에 부임하였으며, 1946년 허난대학(河南大學) 교장을 맡았다. 1949년 타이완으로 가서 타이완대학 역사학과 교수에 부임해 요금원연구실을 창립하였으며, 1958년 타이완 중앙연구원 인문조 원사에 임명되었다. 타이완 송사연구회(이후 송사좌담회)를 조직하였으며, 송사와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면서 송몽관계의 연구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주로 현대 송요금원사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들 중의 한 명이다. 서구 사학 사상과 방법을 학습하여 중국 전통 사학의 현대 사학으로의 전환에 공헌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蒙古秘史》(제1부, 역서), 《東北史論叢》, 《耶律楚才西游錄校注》, 《漢字蒙音蒙古秘史新譯校注》 등이 있다.

 

263. 장유위(張友漁, 1899-1992)

산시 링스(靈石) 출생.

부 장잉난(張映南)은 청말 수재였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1918년 산시성립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5․4운동 시기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성학생연합회 집행위원을 맡았고, 《共鳴》을 창립하였다. 여러 간행물에 봉건사상을 비판하고 애국주의를 선전하는 글을 썼다. 1923년 사범학교 졸업 이후, 베이징법정대학에 입학하였으며, 타이위안(太原)《并州新報》, 베이징 《世界日報》, 상하이 《申報》, 한커우(漢口) 《中山日報》 등에 주베이징 기자 혹은 계약 집필인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공산당이 1930년, 1932년, 1934년 일본으로 파견하여 유학과 혁명 활동을 병행하였다. 귀국 전후로 톈진(天津) 한문태어사만보(漢文泰晤士晚報)의 총편집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世界日報》, 《民國晚報》, 《大同晚報》의 총주필을 맡았다. 옌징대학, 중궈대학, 민궈대학, 중파대학, 베이핑대학법상학원 교수를 역임하였고, 헌법학, 노동법학, 신문학, 일본 문제 등을 강의하였다. 당의 지도 하에 문화 관련 통일전선 업무도 진행해 《世界論壇》과 《時代文化》(이후 《文化動向》)를 창립하였다. 1941년 이후, 샹강(香港) 《華商報》 총주필, 충칭 《新華日報》 사론위원회 위원, 총편집 대리, 사장, 생활서점 총편집, 중공 쓰촨성(四川省)위 부서기 겸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마르크스주의 정치학, 법학, 신문학 이론을 중국에 전파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1939년 충칭에서 중국구국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민주헌정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국공담판에도 공산당 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베이징과 톈진시 부시장, 중국정법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베이징시위, 시정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중국사회과학원 등에서 베이징시의 건설과 발전, 중국사회주의 민주와 법제 건설, 중국 특색 있는 사회주의 이론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憲政論》, 《五五憲草批判》, 《關于社會主義法制的若干問題》, 《張友漁新聞學論文選》, 《中國大百科全書》(편집), 《中國大百科全書·政治學》(편집), 《海法學卷》(주편), 《世界議會詞典》(주편), 《歷史大地圖集》(주편), 《中華人民共和國法律全書》(주편) 등이 있다.

 

264. 중펑녠(鐘風年, 1888-1987)

안후이 퉁청인(桐城人). 역사지리학.

1911년 베이징역학관 법문반을 졸업하였다. 일생 동안 《水經注》 교감과 춘추전국 시대 지리 연구에 전념하였다. 항전에서 승리한 후, 베이핑연구원 사학연구소에서 초청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부연구원을 맡았다. 그는 고증학파의 력학자이기도 하며, 역학(酈學)에 대한 논문 《評我所見的各本水經注》 등이 있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國策勘硏》, 《水經注校補》, 《春秋列國最初疆域圖說》, 《戰國疆域變遷考》 등이 있다.

 

265. 장전졔(張振鶛, 1926- )

허베이(河北) 정딩인(正定人). 중국 근대사. 근대 중외관계사.

1949년 중양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베이징대학 정치학과 연구생으로 입학하였다. 1952년 졸업 이후, 베이징행정위원회 문교국 1953년 중국과학원 근대사연구소 (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로 옮겨 근대 중외관계사와 중국 근대사의 연구에 오랫동안 종사하였다. 특히 중불전쟁사와 청말 10년 동안의 역사에 집중하여 연구하였다. 근대사연구소에서 실습 연구원, 보조 연구원, 부연구원, 연구원, 중외관계사실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淸末十年間中外關係史的几個問題》, 《辛亥革命期間的孫中山與法國》, 《帝國主義侵華史》, 《第二卷部分章節》 등이 있다.

 

266. 탕융퉁(湯用彤, 1893-1964)

간쑤(甘肅) 웨이위안현(渭源縣) 출생.

부친이 1889년 진사 출신으로 그가 3세 되는 어느 날 《哀江南》을 암송하여 어려서부터 부친의 교관에서 교육을 받았다. 베이징 순톈학당(順天學堂)에서 신식 교육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량수밍(梁漱溟)과 함께 인도 철학과 불교 전적을 학습하였다. 1912년 칭화학당에 입학하여 우미(吳密), 류즈정(柳治徵)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1917년 칭화학당을 졸업하고, 관비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였다. 미국 미네소타주 Hamline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1919년 미국 하버드대학 연구원에서 천인커와 함께 범문, 불학, 서양 철학 등을 학습하였다. 우미, 메이광디(梅光迪), 탕융퉁은 하버드의 3걸로 불리기도 하였다. 우미와 메이광디가 Babbit 교수를 소개하였으며, 그 교수는 미국의 저명한 신인민주의자로 중서문화의 전통이 인문학에서 서로 표리 관계에 있다고 말하며 공자를 칭찬하였다. 그는 이 Babbit 교수에게서 문화관과 학문 태도에 대해 영향을 받았다. 1922년 철학 석사 학위를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둥난대학(東南大學), 난카이대학, 베이징대학, 시난연합대학 교수에 부임하였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베이징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1년 베이징대학 부총장을 맡았고, 1953년 이후 중국과학원 역사고고위원회 위원, 철학사회과학부 학부 위원, 《哲學研究》와 《歷史研究》의 편집위원 등을 담당하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계전국위원회 위원, 제3계 상무위원, 제1, 2, 3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그는 범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였고, 중국 철학, 인도 철학, 서양 철학을 잘 이해했으며, 중국 불교사, 위진현학과 인도 철학을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그는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후 각 대학에서 인도 철학을 강의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漢魏两晋南北朝佛教史》, 《隋唐佛教史稿》, 《湯用彤學術論文集》,《往日雜稿》, 《印度哲學史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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