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학 지식인(4)

조회 수 3116 추천 수 0 2012.06.18 06:39:54

46, 왕리시(王禮錫, ? - 1939)

쟝시(江西) 안푸(安福) 출생. 원명 왕수싼(王庶三). 중국사회사논전 조직자. 神州國光社의 창립자, 《讀書雜誌》의 주편.

쟝시 신위안대학(心遠大學)에서 수학했다. 1930년에 일본에서 《독서잡지》를 편인하였다. 1931년에 상하이로 돌아와 중국사회사 논의를 조직하여,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32년 상하이에서 천밍수(陳銘樞), 메이궁빈(梅龔彬), 후츄위안(胡秋元) 등과 신주국광사를 창립하였고, 루징칭(陸晶淸)과 《독서잡지》를 함께 주편하였으며, 4期의 “中國社會史論戰” 특별호를 출판하여, 중국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은 후에 《中國社會史的論戰》으로 출판되었다. 1933년 루징칭과 함께 출국하여 유럽에서 5년간 체류하면서, 대외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Shelley Wang 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며 유럽에 문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에서 〈全英援華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1938년 루징칭과 함께 귀국하여, 인민대항전을 주장하였다. 1939년에 충칭 “文協”이 작가전지방문단을 파견할 때, 단장을 맡았고, 일기에 전지방문단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후에 《作家戰地訪問團史料選編》에 수록되었다.

저작으로 《中國社會史的論戰》, 《李長吉評傳》, 《讀書生活文選》, 《戰時日記》, 《詩聲草》(시집), 《海外雜筆》(여행기), 《海外二筆》(여행기) 등이 있다.

 

 

47, 관징쉬(管敬緖, 1930-)

안후이 난링(南陵) 출생. 중국 세계근대사 교학 기초 공헌자.

1953년 국립 안후이대학(安徽大學, 안후이사범대학의 전신) 역사계를 졸업하였다. 안후이사범대학(安徽師範大學) 역사계 교수, 홍콩국제교육교류중심 연구원, 안후이성사회과학연합위원회 위원, 중국세계근대사연구회 이사․상무이사․부비서장․학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전국세계근대사학과기초설계”에서 중국 전역과 화둥(華東)의 전문학술토론회를 여러 차례 주관하였고, 《世界近代史敎學大綱》을 임시 주도하였으며, 교육부의 표창을 받았다. 고등원교 문과교재와 참고자료 7부를 주편하였는데, 그 중 첫 번째 《世界近代史》(1991) 교재는 중국세계근대사전업위원회 우수교재 1등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世界近代史》(주편), 《世界近代史詞典》(주편) 등이 있다.

 

48. 진충지(金冲及, 1930-)

쟝쑤 칭푸(靑浦) 출생. 신해혁명사와 쑨중산 연구 권위자. 중국사학회 초대 회장. 러시아과학원 원사.

푸단대학 역사계 교수․ 단위서기․교무부 부주임․교학과학부 부주임, 상하이대학 역사계 겸직교수, 상하이시위 《未定文稿》 주편, 문화부정책연구실 연구인원, 베이징문물출판사 부총편집,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학술위원, 중국사학회 상무이사, 쑨중산연구회 비서장․회장, 중국근대군사사연구회 부회장, 국무원 학과평의조 성원, 중앙문헌연구실 부주임․연구원, 《近代史硏究》 편집위원, 쑨중산연구총서 주편 등을 역임하였다.

1951년 푸단대학 역사계를 졸업한 이래, 모교에 남아 교직에 종사하였다. 신해혁명사를 비롯한 중국근현대사와 쑨중산 연구의 권위자로서 국내외 학술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궈모뤄(郭沫若), 류다녠(劉大年)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민으로서 세 번째로 러시아과학원 외국인원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轉折年代: 中國的1947年》, 《二十世紀中國的崛起》, 《二十世紀中國史綱》, 《周恩來傳》, 《劉少奇傳》, 《毛澤東傳》(주편), 《辛亥革命史稿》(공저), 《從辛亥革命到五四運動》(공저), 《論淸末的入憲運動》(공저) 등이 있다.

 

49. 다이커라이(戴可來, 1935-)

허난 전핑(鎭平) 출생. 월남사 전문가. 정부특수진첩 수혜자(1991).

1959년 베이징대학 역사계를 졸업하였다. 1976년 정저우대학(鄭州大學)으로 임용된 후에 초대 역사계 주임을 지냈고, 그 외 초대 문박학원 명예원장, 월남연구소 소장, 역사학원 교수, 중국사학회 이사, 중국동남아연구회 부이사장, 허난사과련 부주석, 베이징대학 아태연구중심 연구원, 중국인민해방군외국어학원 객좌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評越南有關西,南沙群島歸屬問題的兩個白皮書》(허난성1983년도 우수논저2등상 수상), 《南沙群島史志硏究》(1993년 중국사회과학원 1회 우수성과상 수상), 《越南古籍中“黃沙”, “長沙”不是我國籍西,南沙群島》, 《撒拉族簡史》(공저, 1885sys 칭하이성 우수저작 일등상 수상), 《世界歷史辭典》(공편, 상하이 1975-1985년도 철학사회과학저작상 수상), 《宋代早期中越關係》, 《越南歷代疆域》(역), 《越南通史》(역), 《越南》(역) 등이 있다.

 

50. 둥차이스(董蔡時)

 

쟝쑤사범학원(江蘇師範學院) 역사계 교수, 중국근대사, 근대정치사 연구자.

1942년 중양정치대학(中央政治大學)에 입학하여 3학년에 통역원으로 차출되어 항일전쟁에 참여하였다. 종전 후 복교하여 1946년에 졸업하였다. 1958년 쟝쑤사범학원 역사계에 임용되었고, 부교수,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江蘇大學學報》 주편, 쟝쑤성사과련 이사, 《江海學刊》 편집위원, 중국태평천국사학연구회 고문, 쟝쑤성태평천국사연구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근대정치사, 태평천국사, 신해혁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저서로서 《孫中山與辛亥革命》《太平天國在蘇州》, 《左宗棠評傳》, 《太平天國史料專輯》(주편), 《何桂淸等書禮》(주편), 《江浙豫皖太平天國史料選編》(주편) 등이 있다.

 

51.멍썬(孟森, 1869-1937)

쟝쑤 양후(陽湖) 출생. 중국 명청사학의 기초를 세운 청사학자. 자는 춘쑨(蒓莼孫), 호는 신스(心史).

초년에 상하이난양공학(上海南洋公學)에서 교육에 종사하거나 역학관(譯學管)에서 번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광시변무독판(廣西邊務督辦) 정샤오쉬(鄭孝胥)의 도움으로 동경정법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일본에서 근대학술문화와 사회정치경제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후에 메이지유신 후의 정법서적들을 비롯하여 법학과 경제학 관련 저작들을 번역하였다. 귀국 후에 《東方雜誌》를 주편하였다.

난징중양대학, 베이징대학에서 명청사 관련 강의를 하였다. 특히 청사 관련 연구와 교학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그는 사료의 고증이라는 전통적 연구방법에 근대사론 연구방법을 흡수하여 명청사 연구를 개창하였다.

대표적 연구성과로서 《明史講義》, 《淸史講義》, 《明元清系通紀》,《心史叢刊》,《满洲開國史》 등이 있다.

 

 

52. 멍원퉁(蒙文通, 1894-1968)

쓰촨 옌팅(鹽亭) 출생. 중국고대사와 고대학술문화학자. 위진남북조수당사의 권위자.

청두대학(成都大學), 청두사범대학(成都師範大學), 청두국학원(成都國學院), 중양대학(中央大學), 허난대학(河南大學), 베이징대학, 허베이여자사범학원(河北女子師範學院), 화시대학(華西大學), 쓰촨대학(四川大學) 교수를 비롯하여, 쑤촨성도서관장(四川省圖書館長),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학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멍원퉁은 심후한 국학적 기초 위에서 사학 연구를 하였다. 그는 쓰촨 존고학당(四川存古學堂)에서 국학의 기초를 훈련받았다. 그 외, 청말 국학대사인 랴오핑(廖平)과 류스페이(劉師培)로부터 경학을, 근대 불학대사인 어우양징우(歐陽竟無)로부터 불학과 고대학술사상을 배웠다.

멍원퉁의 사학연구의 특징은 경(經)과 사(史)를 역사의 경위(經緯)로서 보고, 경사와 문학의 상호교차로써 역사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저술은 항상 경으로써 사를 연구하고 사로써 경에 주를 다는 것을 함께 하였다. 예를 들어 《越史叢考》는 120여 종의 고문헌 자료를 가지고서 경사를 서로 증명함으로써, 월남의 기원과 흥망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그에게 역사는 변화발전하는 것이고, 사학가의 임무는 역사변화의 흔적을 찾아내 발전의 원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경제사 연구에서 역사발전의 원인을 탐색하곤 하였다. 《中國歷代農産量的擴大和賦役制度及學術思想的演變》은 역사로써 변화를 밝힌다는 관점이 잘 드러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 저술로서, 《古史甄微》, 《輯校李榮老子注》, 《輯校成玄英老子義疏》, 《周秦少数民族研究》、《經學扶原》 등이 있다.

 

 

53. 퍄오창위(朴昌昱, 1948-)

지린 옌지(延吉) 출생. 조선족. 옌볜대학 사학계 교수. 중국 조선족사 권위자.

옌볜대학(延邊大學)을 졸업한 후, 모교에 임용되었다. 옌볜대학 역사계 부주임, 민족연구소 주임, 연구소계통 당총지서기, 국제고려학회 이사, 베이징대학 조선문화연구소 겸직교수, 중국조선족역사족적편찬위원회 부총편, 중국조선족고적정리위원회 이사겸부총편, 지린성사회과학원 규획소조 성원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 독립기념관 민족독립운동연구소 겸직연구구원, 한국역사문제연구소 자문위원으로도 초빙되었던 것을 비롯하여 일본,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도 학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역사 연구에서 과학적 관점을 제출하였다고 평해진다. 그는 조선족이 이주해 온 역사상한이나 ‘이중사명’과 같은 역사적 특징을 논증해냄으로써, 조선족 역사연구에 탁월한 공헌을 남겼다.

대표적 저술로서 《中國朝鮮族歷史硏究》, 《朝鮮族革命熱士傳》1,2,3(질린성 사회과학 가작상 수상), 《朝鮮族簡史》(공저, 지린성사회과학우수상 수상), 《中國朝鮮族歷史足跡叢書》1,2(주편) 등이 있다.

 

 

54. 판스셴(潘世憲, 1910-1990)

쟝쑤 난징 출생. 내몽고대학 몽고사연구소 교수.

1933년 국립 베이핑대학 법학원 법률계를 졸업하고, 1936-37년에 일본 큐슈제국대학 법문계 문학부에서 법학을 수학하였다. 1946년부터 상하이 다샤대학(大夏大學, 법률계 부교수). 푸단대학을 거쳐, 1957년 이후부터는 내몽고대학 역사계, 몽고사연구소 부교수,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논저로서 《唐努烏梁海與中原地區的關系》,〈群巫初探〉,〈东亚史研究·蒙古篇〉, 그외《明代蒙古史论集》(역서),《清代蒙古社会制度》(역서) 등이 있다.

 

 

55. 팡궈위(方國瑜, 1903-1983)

윈난 리쟝시(麗江市) 출생. 라시족(納西族). 라시 역사문화연구의 아버지.

징스대학(京師大學), 베이징대학,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서 쳰쉬안퉁(錢玄同), 장타이옌(章太炎), 류반눙(劉半農), 위쟈시(余嘉錫), 마쑤핑(馬叔平), 천위안(陳垣), 량치차오(梁啓超), 자오위완런(趙元任), 리팡구이(李方桂) 등으로부터 음운, 훈고, 목록, 교감, 명물, 금석, 사지, 언어 등을 배웠다. 졸업 후 징스대학연구원, 민궈대학(民國大學), 뤄양사범학원(洛陽師範學院), 윈난대학(雲南大學) 역사계에서 봉직하였다.

팡궈위는 중국민족사, 중국서남변강의 역사와 지리, 윈난사료목록, 동파(東巴) 문화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지도교수인 류반눙(劉半農)의 지지 속에 전통문화를 발굴, 정리하는 꿈을 키웠고, 동파문으로 기록된 라시전설 《人類起源》과 경서의 몇몇 장절을 번역해내었으며, 《納西象形文字譜》의 초고를 완성했다. 1934년 6월 그는 라시상형문자자료를 가지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류반눙 선생이 투병중이서 둥쭤빈(董作賓)선생의 소개를 통해 난징으로 가서 자오위안런(趙元任), 리팡구이(李方桂) 선생에게서 언어학을 배웠다. 그는 국제음성자모를 가지고 라시상형문자를 표음하여 《라시상형문자보》를 편성해냈다. 그 결과 팡궈위는 장타이옌(章太炎)으로부터 라시역사문화의 “선구자”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궈무뤄(郭沫若), 우안(吳暗), 후허우쉬안(胡厚宣), 저우유광(周有光) 등으로부터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팡궈위는 사료가 사학 연구의 기초라는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1950년대에 부르주아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그는 사료의 수집과 정리가 사학연구의 전제라는 관점을 견지하며 이후에도 계속 윈난사료목록 연구에 매진하였다.

연구성과로서, 《納西象形文字譜》, 《雲南史料目錄槪說》, 《中國西南歷史地理考釋》, 《彛族史稿》, 《漢晉民族史》, 《方國瑜文集》 등이 있다.

 

 

56. 팡스밍(方詩銘, 1919-2000)

쓰촨 청두(城都) 출생. 저명 중국 중고사 전문가.

1945년 지루대학(齊魯大學) 역사계를 졸업하였다. 구졔강(顧詰剛), 천인커(陳寅恪), 쳰무(錢木)로부터 수학하였다. 상하이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 명예소장과 《史林》 주편 등을 맡았다.

주요연구성과로서 《上海小刀會起義》, 《古本竹書紀年輯證》(공저), 《冥報記․廣異記》輯校, 《曹操․袁紹․黃巾》 등이 있다.

 

 

 

57. 스녠하이(史念海, 1912-2001)

산시(山西) 핑루(平陸) 출생. 중국 역사지리학의 대가.

《우공(禹貢)》의 필자이자 우공학회(禹貢學會) 회원. 국립편역관 부편심, 푸단대학(復旦大學) 역사계 부교수, 란저우대학(蘭州大學) 역사계 교수 , 시베이대학(西北大學) 역사계 교수, 산시사범대학(陝西師範大學) 역사계 교수 및 부교장, 당사연구소(唐史硏究所), 역사지리연구소 소장, 시베이역사환경과 경제사회발전연구중심 명예주임 및 역사문화학원 명예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 베이핑 푸런대학(輔仁大學) 역사계에 입학하였다. 푸런대학에서 건가학파(乾嘉學派)의 영향뿐만 아니라 교장인 천위안(陳垣)으로부터도 깊은 영향을 받아 고거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 4학년에 쓴 논문들이 당시 베이징대학과 옌징대학에서 중국고대지리연혁사 과정을 가르치던 구제강(顧詰剛)의 눈에 띄어 그의 소개를 통해 우공학회에 가입할 수 있었고, 《우공》의 주요 필진 중 하나가 되었다. 1936년 푸런대학 졸업 후에는 구제강의 《우공》 출판을 도왔으며, 그의 지도를 받으며 중국 최초의 연혁지리서인 《中國疆域沿革史》(1937년 출판)를 완성하였다.

그는 1949년 이후 시안사범학원(西安師範學院, 산시사범대학의 전신)에 부임하여 <중국역사지리>과정을 개설하여, 중국현대역사지리학 이론체계를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습득하여, 역사지리학은 역사시기 지리현상과 사람과 지리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대에서 60년대간의 연구가 주로 사적자료에 의지하였다면, 70년대부터는 실지조사도 중시하게 되었다. 그는 산시성 군사역사지리 연구와 중국과학원의 청약에 응하여 탄치샹(譚其驤)과 《中國歷史自然地理》를 주편하기로 하면서 실지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후 그의 역사지리연구는 문헌고증과 실지로사를 결합함으로써, 중국 역사지리학에 중요한 지향점을 제시하게 되었다.

대표 연구성과로서 《中國疆域沿革史》(구제강과 공저), 《中國的運河》, 《河山集》, 《黃土高原森林與草原的變遷》, 《中國人口地理和歷史地理》, 《中國歷史地理綱要》상,하, 《西安歷史地圖集》(주편), 《唐代歷史地理硏究》, 《中國古都和文化》, 《黃河流域諸河流的變遷與治理》 등이 있다.

 

 

58, 쉬쯔밍(徐子明, 1988-1973)

싱청(興城) 출생. 원명 쉬페이시(徐佩銑), 자는 쯔밍(子明).

14세에 상하이에 가서 난양공학(南洋公學), 푸단공연(復旦公演)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동학 중에 천인커(陳寅恪)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영어, 수학을 중심으로 배웠지만, 그는 여가 시간에 선진제자전적이나 양한사를 읽는 데 할애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훗날 쉬쯔밍이 서양 유학을 하고 서양사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國粹를 지키는 데 주력하여 오히려 5.4운동과 백화운동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예견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08년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 진학하여 유럽근대사와 독일문학을 전공하였고, 1911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유럽 중고사를 전공하여 1913년에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차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푸단대학에서 독일어 강사를 하다가, 1915년 베이징대학에 초빙되어 그리스로마문학사와 영국, 독일문학을 가르치면서, 류스페이(劉師培), 황칸(黃侃) 등과 교류하였다. 천두슈(陳獨秀)와의 의견 불일치로 베이징대학을 떠난 후, 1929년에 중양대학(中央大學)에 서양사교수로 초빙되었다.

1948년 타이완으로 건너가 타이완대학(臺灣大學)에서 서양사 교수가 되었다. 후에는 둥우대학(東吳大學) 교수를 겸임하여 주로 《左傳》, 《史記》를 강의하였으며, 리아오(李敖)와 왕룽쭈(汪榮祖)를 비롯한 타이완의 수많은 사학자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다.

저술로서 《胡祸叢談》, 《胡適與國運》, 《宜興徐子明先生遺稿》등이 있다.

 

 

59. 아이저우창(艾周昌, 1930-)

후베이 쑹쯔(松滋) 출생. 화둥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 역사계 교수. 세계근대사, 아시아아프리카사 전문.

1953년 둥베이사범대학(東北師範大學) 역사계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화둥사범대학에 임용되었다. 세계근대사교연실 주임, 아시아아프리카연구실 주임, 중국아프리카사연구회 부회장, 중국아시아아프리카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93년에 국무원 특수진첩을 수여받았다.

주요 연구성과로서 《早期植民主義侵略史》(1984년 상하이시철학사회과학우수성과3등상 수상), 《中非關係史》 , 《中非關係文選》, 《非洲通史》 등이 있다.

 

 

60, 왕줴페이(王覺非, 1923-2010)

허난 안양(安陽) 출생. 영국근대사 전문가. 영국역사협회 명예회원.

난징대학(南京大學) 역사계 세계사 전공 교수, 박사 지도교수를 비롯하여, “中共七學院助敎聯合會” 초대 이사, 《助聯》(반월간) 주편, 난징대학 구미연구중심 주임, 난징대학 학술위원회 회원 및 역사계 학술위원회 주임, 중국영국사연구회 회장, 쟝쑤성세계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중양대학(中央大學) 역사계를 졸업하고, 이후 학교에 남아 교직에 종사하였다. 1949년 중양대학이 난징대학으로 개편한 후에도 계속 교직에 남았다. 1957년 반우파운동시기에 학생들의 요청에 응하여 “정치민주는 학술번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보고를 했던 덕분에, 사상우경이라는 질책과 함께 오랫동안 비판을 받았으며, 문혁에 이르러서는 농촌과 공장 등에 보내져 “재교육”과 “노동단련”을 받아야 했다. 문혁이 종결된 후 다시 난징대학에 복귀하였고, 이후 석사, 박사 연구생을 지도하였다.

왕줴페이는 특히 해외역사학계와 왕성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였다. 1982년 영국의 요청에 따라 방문하여 여러 영국사학자들과 학술교류를 하여, 중영 양국 학계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왕줴페이는 중영학술교류를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하여 영국역사협회에 명예회원을 선출되기도 하였는데, 이 학회의 10여 명의 명예회원 가운데 유일한 아시아학자이기도 하였다. 저작으로 《歐洲史論》(1995년 국가교위우수교재일등상 수상), 《歐洲五百年史》(주편), 《克倫威爾傳》(공역), 《歐洲歷史大辭典》(주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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