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학 지식인(6)

조회 수 3072 추천 수 0 2012.07.26 22:58:24


76. 톈쥬촨(田久川, ?~ 2011)

고대중일관계사.

랴오닝사범대학 역사계의 주요 창시인. 국무원 특수공헌전문가진첩 수혜자.

1962년 베이징대학에 입학하여 졘보짠(翦伯贊)의 지도를 받았다. 1972년에 랴오닝사범학원(遼寧師範學院, 랴오닝사범대학의 전신)에 부임하여 랴오닝사범대학의 역사계의 창시와 발전에 기여하였다. 1979년부터 96년까지 역사계(현 랴오닝사범대학 역사문화여행학원)의 주임을 맡았다. 그 외 다롄시 정협 상무위원 겸 문사와학습위원회 부주임, 다롄시 사화련 부주석 겸 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古代中日關係史》 등이 있다.


77. 졘보짠(翦伯贊, 1898 ~ 1968)

후난 타오위안(桃源) 출생. 위구르족. 중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토대 설립자.

베이징대학 부교장(1952-1968)과 역사학과 교수 및 주임을 맡았고, 옌징대학(燕京大學) 사회학과 교수, 중양민족학원(中央民族學院) 교수,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중국사학회 상무이사 겸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무원문화교육위원회 위원과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위원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16년 베이징정법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우창상업전문학교(武昌商業專門學校)로 옮겼다. 1924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으로 유학하였다. 1926년 귀국 후, 역사학자인 뤼전위(呂振羽) 등의 영향 아래 중국 사회와 역사 문제 연구에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도입하였다. 1937년 5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의 영도 하에 통일 전선, 이론 선전, 사학 연구 등에 장기간 종사하였고, 중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과학의 건립에 중요한 공헌을 남겼다. 특히 중국 고대사의 시대 구분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봉건론’을 주장하였다. 《歷史哲學教程》에서 역사유물주의를 선전하였고, 중국사회의 ‘반식민지 반봉건성’을 규정하였다. 문화대혁명 전에 역사주의파를 이끌면서 중국고대사를 연구였다. 그의 역사관점은 특히 마오쩌둥의 관점과 상치되어 문혁기간에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한다”는 죄목으로 비판받았고, 결국 1968년 이를 비관하여 음독자살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史綱要》(주편), 《中國古代史教學參考資料》(주편), 《中國近代史資料叢刊》(주편), 《中國歷史哲學教程》, 《對處理若干歷史問題的初步意見》, 《目前史學研究中存在的几个問題》, 《中國史論集》, 《中國史綱》, 《歷史問題論叢》, 《先秦史》, 《秦漢史》, 《中國歷史概要》(공저) 등이 있다.


78. 톈루캉(田汝康, 1916 ~ 2010)

윈난 쿤밍(昆明) 출생. 인류학자. 중국 화교사와 동남아사. 푸단대학 역사학과와 사회학과 건립의 중요 공헌자.

1933년 베이징사범대학 교육심리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937년 쿤밍국립서남연합대학에서 철학심리학을 전공하였고,1940년 졸업하였다. 1948년 영국 런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식민지사회과학연구회 이사회의 위임을 받아 사라와크에서 그곳 화인사회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50년에 귀국하였으나, “역사문제”로 박해 당했다. 저쟝대학 인류학과에 부임하였다. 1952년 원계조정과 함께 푸단대학에 부임하여 역사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사회학과 주임 등을 맡았다. 1979-92년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Clare College의 객좌연구원,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 태평양연구원 방문학자, 교토대학 동남아연구소, 라이덴대학 한학원, 하버드대학, 코넬대학, U.C.버클리, 프린스턴대학 동남아연구소 등의 방문교수로서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외 중국사회학회 부회장, 중국화교역사학회 부회장, 중국동남아연구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Report on a survey of overcrowding in Kuching, The Chinese of Sarawak : a study of social structure, Moslem rebellion in China, a Yunnan controversy, Religious cults of the Pai-i along the Burma-Yunnan border, Male anxiety and female chastity : a comparative study of Chinese ethical values in Ming-Cjing times, Peaks of faith : Protestant mission in revolutionary China, The early history of the Chinese in Sarawak(공저), 《芒市边民的摆》, 《十七——十九世紀中葉中国帆船在東南亞洲》, 《中國帆船貿易和對外關係史論集》, 《砂拉越華人社會的變遷》(공저) 등이 있다.


79. 톈창우(田昌五, 1925 ~ 2001)

하남성 옌청현(郾城縣) 출생.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경제사

1947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였고, 1951년 졸업 후 학교에 남아 강의하였고, 베이징대학 단위 부서기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연구하였고, 1978년 연구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산둥대학 역사학과 교수, 박사생 지도, 산둥대학 역사연구소 소장,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 박사생 지도, 중국사회과학원 고대문명연구중심 학술 고문, 중국문화서원 지도교수, 시베이대학 겸직교수, 중국은상문화학회(中國殷商文化學會) 회장, 중국농민전쟁사연구회 회장, 중국진한사연구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항일 원정군으로 인도, 미얀마로 가서 일본군과 항전하였고, 1947년 공산당원이 되어 제4당 지부 서기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 중국 역사의 발전 규칙을 탐구해 중서 역사발전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하였다. 사학 이론, 문명기원, 중국고대사회형태, 고사분기, 농민전쟁과 농민문제, 봉건사회경제 구조, 중국고대 사상문화 및 사회 구조의 상호 작용 등의 분야에서 중대한 학술적인 공적을 남겼다. 50년대 말 60년대 초, 사학계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던 아시아적 생산양식 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찰, 분석하여, ‘농촌공사’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 관점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고, 영국, 프랑스, 소련,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 번역되었다.

주요한 연구 성과로서 《王充及其論衡》, 《中國農民革命史》(第1卷), 《古代社會形態研究》, 《古代社會形態析論》, 《論衡導讀》, 《中國古代社會發展史論》, 《中華文化起源志》, 《中國歷史體系新論》, 《周秦社會結构研究》(공저), 《秦漢史》(공동 주편), 《中國封建社會經濟史》(공동 주편), 《華夏文明》 등이 있다.


80. 딩졘훙(丁建弘, 1936~  )

저쟝 진화(金華) 출생. 독일사 권위자.

1953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세계사를 전공해 치쓰허(齊思和), 양런폔(楊人楩), 저우이량(周一良) 등 유명한 학자들로부터 수업을 들었고, 당시 베이징대학에 초빙되었던 서독 출신 사학자의 전공 제자로서 독일사를 배웠다. 1958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 모교에 남아 강의하였. 1978년 항저우대학(杭州大學) 역사학과에 초빙되어, 1981년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서독에 유학하여 독일 사학계의 태두이고 전 국제역사학자협회장인 칼 디트리히 어트만( Karl Dietrich Erdmann) 교수의 지도 아래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독일어로 작성한비스마르크와 독일통일운동〉은 국내외 학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1984년 귀국 이후 항저우대학 역사학과 부주임으로 임명되어 1986년 정교수로 승진하였으며, 대학도서관 관장을 겸임하였다. 1991년 항저우대학독일연구중심의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중국독일사연구회의 부회장, 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주로 서양사와 구미근대화사, 독일사를 연구하였다. 특히 독일사를 연구하면서 중국 학계의 독일관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사의 연구 방향을 이끌었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德國通史簡編》, 《普鲁士的精神和文化》,《戰後德國的分裂和統一》, 《發達國家的現代化道路》, 《德國通史》, 《德國文化:普鲁士精神和文化》 등이 있다.


81. 청광위(程光裕, 1918~ )

안후이 지시(績溪) 출생. 화교사.

1944년 저쟝대학(浙江大學)을 졸업해 문학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47년 저쟝대학 연구원을 졸업하고,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 취안저우국강전과학교(泉州國疆專科學校) 사학과 부교수에 임명되었다. 1954년 대만성 교육청 주임 비서, 1957년 국립대만사범대학 사학과 부교수를 맡았다. 1958년 싱가포르 난양대학(南洋大學) 초빙으로 역사지리학과 부교수로 1961년까지 재직하였고, 후에 말레이시아대학과 싱가포르대학에서 지리학과 강사를 맡았다.

일생을 송사(宋史), 중국 역사와 지리 및 화교사의 연구에 종사하였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화교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여 《香山集》과 《安溪集》에 일부 수록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世界史》, 《中國歷史地图》, 《中馬中星文化論集》, 《星馬華僑中之傑出人物》, 《香山集》 등이 있다.


82. 딩밍난(丁名楠, 1917~ )

저쟝 사오싱(紹興) 출생. 근대 중외관계사.

1943년 시난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역사학과 졸업. 1950년 칭화대학연구원(淸華大學硏究院)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중국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보조 연구원을 맡았고,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부연구원, 연구원, 의화단운동사연구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의화단운동과 근대 중외관계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帝國主義侵華史》,《臺灣歷史概述》등이 있다.

83. 딩산(丁山, 1901 ~ 1952)

안후이 허현(和縣) 출생. 중국 고대사. 고문자학.

1924년 베이징대학연구소 국학문 연구생에 합격했고, 1926년 사먼대학(廈門大學) 조교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중산대학(中山大學) 교수에 임용되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소 전임연구원을 담당하였고, 이후 20년 간 중양대학(中央大學), 산둥대학(山東大學) 교수를 역임하였다.

처음에 딩산은 고문자 및 음운에 관한 연구에 중점을 두었으나, 1920년대 말 갑골문 고증, 해석으로 변경하였다. 갑골학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고, 상주(商周)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두고 갑골문, 금문의 고증, 해석도 함께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吳雷考》, 《新殷本紀》, 《商周史料考證》, 《甲骨文所見氏族及其制度》 등이 있다.


84. 청쑤뤄(程溯洛, 1913 ~ 1992)

원저우(溫州) 융챵신허(永强新河) 출생. 민족사학자. 위구르족사.

1938년 쿤밍(昆明) 시난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역사학과에서 공부를 했고, 졸업한 후 1941년 베이징대학 문과연구소 사학조의 연구생으로 입학하였다. 베이징대학(쿤밍 소재)의 샹다(向達)와 야오충우(姚從吾)의 두 교수로부터 송, 요, 금, 원사에 관한 지도를 받았다. 1944년 졸업 후, 베이핑연구원 사학연구소(쿤밍 소재)에서 송, 요, 금, 원사를 연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 일하였고, 1952년 중양민족대학(中央民族大學)에서 연구하였으며, 1956년에 역사학과 교수에 임명되어 민족사와 송, 요, 금, 원사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시작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維吾爾族史料簡編》(상하, 공저), 《維吾爾族簡史》(주편), 《中國通史》(第七卷), 《唐宋回鶻史論集》, 《維吾爾族源考》, 《中國大百科全書·民族卷》(공저), 《民族辞典》(공저), 《回鶻文契約文书》(역저) 등이 있다.


85. 딩서우허(丁守和, 1926 ~ 2008)

허베이 왕두(望都) 출생.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문화사.

1948년 말 화베이대학(華北大學) 사회과학과(社會科學科)를 졸업하였고, 오랫동안 중국 근대사와 중국 문화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61년 중국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에서 《역사연구》편집부 주임 겸 근대문화사연구실 주임을 맡았다. 1977년 《근대사연구》와 《중국문화》의 출판 책임을 맡았다. 1979년 12월 연구원으로 승진하였고, 《근대사연구》의 주편 겸 근대문화사연구실 주임에 임명되었다. 1989년 4월 중국현대문화학회 회장을 담당하였고, 2002년에는 명예회장이 되었다. 베이징대학과 허난대학(河南大學)의 겸직교수였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중국근대사와 문화사를 연구하였다. 초기에는 러시아10월혁명이 중국에 끼친 영향, 5.4계몽운동,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전파 등을 연구하였다. 1980년대 이르러서는 중국문화사 방면에 마르크스주의이론을 도입하였다. 중국전통문화의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비판적인 계승을 도모하거나, 현대신문화의 창조와 그 핵심적 가치 등에 관련된 주제에 대한 연구성과를 다수 남였다. 또한 사회주의의 민주적 건설에도 관심을 가져 고대민주주의와 근대민주주의의 본질에 관한 차이점을 강조하였고, 고대 정치문화 중에서 민주적인 요소를 발굴해내고자 노력하였다. 군주전제주의를 비판하였고, 5․4운동 이후 민주와 과학에 관한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는 데에 노력하였고, 민주와 과학을 중국 신문화 건설의 핵심 이념으로 보았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現代史論》, 《從五四運動到馬克思主義傳播》, 《瞿秋白思想研究》, 《民主科學在中國的命運》, 《中國歷史文化概述》 등이 있다.


86. 청잉리우(程應鏐, 1916 ~ 1994)

위진남북조사. 송사.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 광화대학(光華大學) 및 정치학원 역사학과 교수였다. 상하이사범학원 건립 후 바로 역사학과 교수를 맡았고, 역사학과 주임 등의 직에 임명되었다. 1946년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하여 민맹상해시위원회 위원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57년 우파로 지목되었고, 문화대혁명 후에 복권되었다. 다시 역사학과 제1부주임 겸 고적정리연구소 소장 등을 담당하였고, 중국위진남북조사연구회 고문, 중국송사연구회 부회장 겸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南北朝史話》, 《范仲淹新傳》, 《司馬光新傳》, 《流金集》, 《中國歷史大辞典 宋史卷》 (주편), 《宋史研究論文集》(주편) 등이 있다.


87. 주제친(朱杰勤, ? ~ 1990)

화교사.

1933년 중산대학(中山大學) 문사연구소 연구생으로 입학하였다. 1936년 졸업 후, 광저우미술학교와 중산대학에서 강의하였다. 1940년 윈난(雲南) 중산대학, 중칭남양연구소(重慶南洋硏究所), 윈난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1952년 광주로 돌아와 중산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8년 지난대학(暨南大學) 역사학과 교수와 과주임을 담당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70년에 지난대학 교수에서 해임되었으나, 1978년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복권되었다. 1981년 지난대학 화교연구소가 설립되어 소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전체 연구인생에서 특히 중국 화교사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중국사학회 상무이사, 중국해외교통사연구회 회장, 중국동남아연구회 이사장, 중외관계사학회 명예이사, 중국화교역사학회 고문, 중국사회과학원 남아시아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秦漢美術史》, 《王羲之評傳》, 《亞歷山大故事》, 《龔定盦研究》, 《微雨集》, 《鄭成功收復臺灣事迹》, 《亞洲各國史教學大綱》, 《亞洲各國史》, 《中國古代史學史》, 《中外關係史論文集》, 《中國和伊朗關係史稿》, 《東南亞華僑史》, 《東南亞華僑史叢書》(주편), 《世界華僑史叢書》(주편) 등이 있다.


88. 저우구청(周谷城, 1898 ~ 1996)

후난성 이양현(益陽縣) 출생.

1921년 베이징사범대학 영어부에 입학하였다. 졸업 전부터 후난 제1사범학교 사범부에서 영문과 윤리학을 가르쳤다. 1942년 가을부터 푸단대학(復旦大學) 교수와 역사학과 주임, 교무장 등을 역임하였다.

사학, 철학, 미학, 정치학, 사회학, 교육학 등에도 박식하였고, 고금을 통달하여 중외의 역사를 논하였다. 각각의 역사적 사건을 모든 역사 과정에 필연적인 요소로 보면서 독특한 중국 역사 시대사구분법을 제시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生活系統》, 《農村社會新論》, 《中國社會史論》(三卷), 《中國通史》(两卷), 《中國政治史》, 《中國史學之進化》, 《世界通史》(三卷), 《黑格爾邏輯大綱》(역서), 《古史零證》, 《形式邏輯與辨證法》, 《史學與美學》, 《詩詞小集》, 《周谷城史學論文選集》, 《中國文化史叢書》(주편), 《世界文化叢書》(주편) 등이 있다.


89. 저우포하이(周佛海, 1897 ~ 1948)

후난 위안링(沅陵) 출생. 국민당 정부 요원. 삼민주의 이론가.

쩡궈판(曾國藩)의 사숙 제자였고,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22년 3월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경제과에 입학하였다. 1921년 중공 1대(一大) 대표로 창당자들 중의 한명이었지만,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1924년 공산당을 탈퇴하였다. 다이지타오(戴季陶)의 초청으로 국민당 선전부 비서가 되었고, 광둥대학 교장이었던 쩌우루(鄒魯)의 초청으로 겸임 광둥대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다이지타오와 쩌우루는 모두 국민당 우파로 후에 서산회의파가 되어 공산당을 비판하고 국공합작도 반대하였다. 저우포하이는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광둥대학 교수들과 함께 《사회평론》을 창설하여 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9년 국민당 3대에서 국민당 정부훈련총감부 정치훈련처 처장 겸 총사령부 훈련 주임에 임명되었다. 1931년 국민당 제4차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장개석의 시종실 부주임 겸 국민당 중앙선전부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삼민주의의 이론가로도 유명하다. 중일전쟁 시기 1938년 반공화평운동에 참가하였고, 1940년 왕징웨이(汪精衛)의 난징국민정부에서 행정원 부원장 겸 재정부장을 역임하였다. 항전에서 승리한 후, 다시 국민당의 접수대원이 되었고, 1945년 군사위원회 상해행동총대 사령에 임명되었으나, 여론의 압력으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저술로서 《三民主義的理論體系》, 《往矣集》, 《物價問題》, 《周佛海日記》, 《互助論》(역서), 《社會問題槪論》(역서) 등이 있다.


90. 주스쟈(朱士嘉, 1905 ~ 1989)

후베이성 우스현(無錫縣) 출생. 지방지 연구.

1924년 옌징(燕京大學) 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우공학회에 참가하였고, 구셰강(顧頡剛)이 주편이고 반월간인 《禹貢》에 중국 지방지 관련 연구를 발표하였다. 1932년 옌징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도서관 중문편목부 주임 겸 푸런대학(輔仁大學) 역사학과 강사였다. 북평사학회의 발기인이었고, 지리학회에도 참가하였다. 석사 연구생일 때, 지도교수의 지도로 광범위하게 전국 각 지방지를 섭렵하고 자료를 모았다. 1935년 《中國地方志綜錄》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국내 사지학계(史地學界)와 미국 국회도서관의 주목을 받았다.

1939년 미국 국회도서관 동방부 주임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중국 지방지를 연구하였다. 이때 미국 국가당안관이 소장하고 있던 화공(華工) 관련 당안과 근대 중미관계에 관한 당안 자료를 복사해 귀국한 후 중국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1942년 9월 콜롬비아대학 연구원에 박사생으로 입학하였다. 졸업 후, 1947년 시애틀의 워싱턴대학 극동학과의 초빙으로 부교수를 역임하였다. 1950년 신중국의 건설을 위해 귀국하여 우한대학(武漢大學) 역사학과 교수 겸 도서관 관장에 임명되었다. 1983년 중국사회과학원의 지도 하에 중국지방지지도소조가 성립되었고, 회원 및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사회주의 시대 지방지의 편찬은 구 지방지를 계승하면서도 독창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원칙이 정해졌다. 1979년 후베이성(湖北省) 문사관 부관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地方志聯合目錄》, 《中國天象記錄總表》, 《中國天文史料匯編》, 《整理研究地方志芻議》, 《中國地方志的起源特徵及其史料價値》, 《中國地方志淺說》, 《顧炎武整理研究地方志的成就》, 《談談清代學者論述修志的問題》 등이 있다.


91. 주신판(朱新繁, ? ~ 1945)

저쟝 하이닝(海寧) 출생.

192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노동자 운동에 참여하였다. 제1차 국공합작 동안 국민당에 참가하라는 명을 받고 광둥혁명정부 소련고등고문의 번역을 맡았고,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정치부에서 일하였다. 1926년 북벌에 참가하여 제4군 정치부 선전과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국공분열 이후, 중공중앙정치국 비서를 맡았고, 《八一宣傳革命大綱》을 기초하였으며, 八•七회의에도 참가하였다. 1929년 트로츠키주의파로 지목되어 공산당을 탈당하였다. 1932년 《讀書雜誌》에 필명으로 글을 쓰기도 하고, 1937년 예칭(葉靑)과 함께 시안에서 《抗戰與文化》의 주편을 맡았다. 1941년 공산당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주요 저술로서 《中國資本主義之發展》, 《中國農村經濟關係及其特質》, 《中国革命與中國社會各階級》, 《紅色舞臺》, 《一个無産者的自傳》 등이 있다.

92. 주중전(朱宗震, 1941~  )


쟝수(江蘇) 출생. 중화민국사. 국무원 정부특수진첩 수혜자.

푸단(復旦大學)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장기간 중화민국사 연구에 종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民國初年政壇風雲》, 《孫中山在民國初年的决策研究》, 《真假共和》, 《孤獨集》, 《黄炎培與近代中國的儒商》 등이 있다.


93. 주시쭈(朱希祖, 1879 ~ 1944)

저쟝(浙江) 하이옌(海鹽) 출생. 남명사(南明史).

17세에 수재(秀才)였고, 1905년 국비로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하여 사학을 전공하였다. 1908년 루쉰(魯迅) 등과 함께 동경에서 장타이옌(章太炎)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1918년 베이징대학 중국문학과 주임에 임명되어 중국문학사를 가르쳤고, 곧 사학과 주임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백화문 운동에 참여하였다. 베이징대학, 베이징사범대학, 칭화대학, 푸런대학(輔仁大學), 중산대학(中山大學), 중양대학(中央大學)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중국사학 원리 및 사학 이론 등의 과목을 개설하여 중국사학사의 초기 연구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2년 광저우 중산대학(中山大學) 교수 겸 문사연구소 소장이었고, 남명사 연구에 전념하여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었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僞楚錄輯補》, 《僞楚錄輯补及僞齊錄校补補》, 《中國史學通論》, 《六朝陵墓調査報告》, 《汲冢書考》, 《楊幺事迹考》, 《明季史料題跋》 등이 있다.


94. 주즈신(朱執信, 1885 ~ 1920)

광둥 판유(番禺, 현재 광주시) 출생. 근대 자산계급 혁명가. 사상가.

1904년 국비로 일본으로 유학 가서 쑨원(孫文), 랴오중카이(廖仲愷) 등의 혁명당 인물들과 결집하였다. 1905년 8월 성립된 중국 동맹회의 평의부 의원 겸 서기로 선출되어 《民報》, 《建設》 등 간행물의 편집을 담당하여 삼민주의 등 자산계급 혁명 이론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民報》 제1호에 《論滿洲雖欲立憲而不能》이라는 논문을 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소개하며 사회주의에 관한 글을 번역해 실었다. 1920년 9월 21일 후먼(虎門)에서 계계(桂系) 군벌에 의해 살해되었다.

저서로 《朱執信集》(2권), 《朱執信文鈔》, 《中國國民黨叢書·朱執信文存》, 《朱執信先生自書詩遺墨》(전집) 등이 있다.


95. 주웨이정(朱維錚, 1936  ~ 2012)

쟝수(江蘇) 우시(無錫) 출생. 경학사(經學史).

1960년 푸단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경학사 전문가인 저우위퉁(周予同)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천서우스(陳守實) 교수의 조교 일을 하기도 하였다. 제도사와 명사 연구에서 천서우스를 계승하여 성과를 남겼다. 이후 푸단대학 역사학과 교수 겸 중국사상문화사연구실 주임이었다. 중국사학회 이사, 국제유련(國際儒聯) 고문, 공자기금회 고문, 상해해협양안문화촉진회 상무이사, 샹강청스대학(香港城市大學) 강좌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87년 이후, 캐나다 토론토대학, 미국 인디애나대학, 독일 뮌헨대학, 한국 고려대학, 샹강 중원대학, 타이완대학 등의 유명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강좌교수로서 활동하였고, 학술 교류에서도 공헌하였다.

중국 경학사에 대한 조예가 깊고, 그 맥락을 인식, 이해하기 위한 입문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중국의 사상문화사, 특히 청대 이후 자료의 정리와 편집에 힘을 기울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孔子思想體系》(공저),《周予同經學史論著選集》, 《梁啓超論清學史二種》(校注), 《清代學術概論》(校注), 《中國近三百年學術史》,《走出中世紀》, 《十大史學家》, 《音調未定的傳統》, 《求索真文明——晚清學術史論》, 《維新舊梦錄》(대만판 《未完成的革命》), 《走出中世纪二集》, 《重讀近代史》 등이 있다.


96. 주쳰즈(朱謙之, 1899 ~ 1972)

푸졘(福建) 푸저우시(福州市) 출생. 역사학자. 철학자. 동방학자.

베이징대학 법예과(法預科)에서 공부하다가, 1916년 철학과로 전입하였다. 당시 베이징대학은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학장으로 있어 학술적인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고,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중외철학문화 서적을 탐독하였는데, 당시 주임이었던 리다자오(李大釗)가 사회과학 책을 모두 읽을까봐 염려하였다고 한다. 1919년 5․4운동에도 참가하여 선전 전단을 살포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영향력 있는 잡지였던 북경대학학생주간《北京大學學生周刊》과 무정부사상을 선전하는 분투《奮鬪》의 편집을 담당하여 사회와 교육에 관한 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1921년 항저우(杭州) 두솔사(兜率寺)에서 불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1923년 샤먼대학(厦門大學)에서 강의하였고, 1929년 일본으로 가서 철학을 연구하였다.

1931년 귀국한 후, 지난대학(暨南大學) 교수를 역임하면서 《歷史哲學》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남방문화운동’과 ‘현대문학운동’을 주창하였다. 1951년까지 항저우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교수에 임명되었고, 철학과 주임, 역사학과 주임, 문학원 원장, 문학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였고, 1964년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연구원이었다. 그는 강의와 연구 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에도 활발하였다. 중국 철학사와 중외관계사, 동방철학을 주로 연구하였다. 역사, 철학, 문학, 음악, 희극, 고고(考古), 종교, 정치, 경제, 중외문화관계 등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여 연구하였고, 전문 서적만 42권이나 저술하였다.

주요한 연구 성과로서 《中国哲學對歐洲的影響》, 《中國景教》, 《歷史哲學大綱》, 《文化哲學》, 《孔德的歷史哲學》, 《中國哲學史簡編》, 《老子哲學》, 《李賀》, 《中國古代樂律對于希腊之影響》, 《王充著作考》, 《日本哲學史》 등이 있다.

97. 옌링펑(嚴灵峰, 1903 ~ 1999)

푸졘(福建) 푸저우(福州) 출생. 중국 공산당 초기 당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대가.

1928년 모스크바 둥팡대학(東方大學) 졸업. 1931년 사회학사 논전에 참가하였고, 동력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천두슈(陳獨秀)를 수장으로 하는 트로츠키주의파의 임시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전부장이기도 하였다. 1934년 포로로 잡혀 트로츠키주의파를 탈퇴하였고, 1937년 군통(軍統)에서 암살 등의 일을 담당하여 공산당 지하당원을 많이 살해하였다. 이후 중칭(重慶) 군통국 정보처 부처장 겸 중공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푸저우시 시장이 되었다.

1949년 대만으로 온 이후, 중화민국 주일본 대표, 국가안전국판공청 주임, 주샹강(駐香港) 대표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푸런대학(輔仁大學) 철학연구소 강좌교수 겸 타이완대학(臺灣大學) 철학연구소 교수였다. 1990년에는 중국에서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동방국제역학연구원 명예원장을 맡았다.

98. 챠오밍순(喬明順, 1916 ~ 2001)

허베이(河北) 훠루현(获鹿縣) 출생.

1935년 푸런(輔仁大學) 사학과에 입학하였고, 1939년 푸런대학 사학연구소에 진학하였다. 당시 유명한 역사학자였던 천위안(陳垣)으로부터 배웠다. 1944년 푸런대학 강사가 되었다. 1947년 미국 대학교 역사연구원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인이 중미관계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첫 번째의 인물이었다. 귀국하여 1956년 톈진(天津師範大學)(허베이대학의 전신)에서 강의하였고, 부교수를 거쳐 1979년 교수로 승진하였다.

사학 분야에서 60여 년 동안 연구하면서 중서 학문을 관통하고 박식하였으며, 중미관계사 미국사, 세계근현대사 등의 분야에서 독창성 있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中美關係第一頁》에서 미국 당안에 실려 있는 중미 양국 관련 인물의 공문, 보고, 편지, 기록 등과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300여 종의 제1차 사료를 참고하였고, 청사관 관련 중문당안, 중외전저, 잡지 100여 종에 이르는 광범위한 자료를 참조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美關係第一頁》, 《世界近代史》, 《世界現代史》, 《簡明世界史》, 《世界史學習手册》, 《八国聯軍在天津》(역저), 《1901年美國對华華交檔案》 등이 있다.


99. 챠오즈챵(喬志强, 1928~  )

산시(山西) 쟈오청(交城) 출생. 중국 근대사. 정부특수진첩 수혜자.

1951년 산시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고, 1953년 중궈런민대학(中國人民大學) 연구생반을 졸업하였다. 산시대학 역사학과 강사와 부교수를 맡았고, 산시대학 역사학과 교수 겸 역사연구소 소장과 사회사연구중심의 주임을 역임하였다. 중국사학회 이사, 중국사회사연구회 부회장, 산시성 사회과학계연합회 부회장, 산시성 역사학회 이사장, 산시성정협문사자료위원회 부회장 등도 담당하였다.

1978년 산시성 고등학교 1급 우수 교사로 평가되었고, 1991년 산시성 우수 전문가 칭호를 받았다. 1998년 국가교위인사부가 전국교육계의 모범으로 평가하였고, 인민교사 표창을 수여하였다.

40여 년 동안 중국 근대사를 가르치면서 연구에 종사하였고, 1970년까지 주로 신해혁명 이전 10년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1984년 전국근대문화사연토회에서 체계적인 사회사의 지식을 제공하였고, 대상, 범위, 방법, 목적 등 이론의 기초를 발표하여 중국 근대 사회사의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曹順起義史料匯編》, 《東方各國近代史》(공역), 《中國近代史稿》(上下, 공저), 《山西制鐵史》, 《中國近代社會辞典》(주편), 《山西通史》(주편), 《中華文化通志·晋文化志》(주편), 《近代華北農村社會變遷》(주편) 등이 있다.


100. 쩡자오주(曾昭橘, 1909 ~ 1964)

후난 샹샹(湘鄕) 출생. 여성. 고고학.

1933년 중양대학(中央大學) 외교학과 졸업. 1935년 영국으로 유학 가서, 1937년 런던대학 연구원에서 고고학 석사학위를 획득하였다. 학교에서 조교를 맡았고, 독일로 가서 유물과 유적의 발굴에 종사하면서 박물관을 고찰하였다. 1938년 9월 귀국 후, 윈난(雲南) 다리(大理)로 가서 고고학을 연구하였다. 1940년 중앙박물관 주비처전문설계위원에 임명되었고, 1941년 중앙박물원 총간사 대리와 주임 대리, 연합국박물관협회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이후 난징박물원 원장, 치회문물공작대(治淮文物工作隊) 대장, 난징대학 겸직 교수, 난징역사학회 부회장, 쟝수성문관회(江蘇省文官會) 부주임, 쟝수성철학사회과학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大理發掘工作》, 《南唐二陵發掘報告》, 《中國铜器銘文與花紋》, 《論周至漢之首飾制度》, 《博物館》, 《試論湖熟文化》, 《江蘇省出土文物選集》, 《社會發展史展覽》(주편), 《中國歷史文物陳列》(주편), 《江蘇歷史陳列》(주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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