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학 지식인(8)

조회 수 3353 추천 수 0 2012.09.04 22:55:07

131. 후성(胡绳, 1918-2000)

쟝쑤(江蘇) 쑤저우(蘇州) 출생. 원명은 샹즈디(項之迪). 근대사. 철학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1934년 베이징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하였고, 다음해 상해로 가서 공산당이 지도하는 문화 활동과 항일구망운동에 참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우한(武漢)으로 가서 다음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제5전구에서 문화공작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이후 충칭(重慶)으로 가서 《新華日報》 편집 위원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공 중앙 선전부 교재 편사조 조장, 중앙 선전부 비서장, 출판 총서 당조 서기, 인민출판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毛澤東) 사상, 덩샤오핑(鄧小平) 이론 등 당의 이론 연구 및 선전과 문건 작성에 참가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사회과학에 적용해 연구를 추진하면서 당의 사업에 공헌하였다.

그는 근대사연구소를 창설한 범문란과 1949년 처음 만난 후 부단히 교류하였고, 《刘大年存當代学人手札》에는 후성이 판원란(范文澜), 류다녠(刘大年)과 학술 문제에 대해 편지로 토론한 내용이 나온다. 근대사연구소는 1950년 5월 화베이대학 역사연구실을 기초로 건립하였다. 1953년 당 중앙 중국역사문제연구위원회는 중국 역사 연구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과학원에 3개의 역사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제1소는 곽말약(郭沫若)을 소장으로, 제2소는 천위안(陈垣)을 소장으로 하였으며, 근대사는 제3소가 담당하였다. 후성은 유대년과 함께 중국역사문제연구위원회의 가장 젊은 위원이었고,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에 부임할 때까지 회원으로 직무를 수행하였다. 1954년 근대사소가 역사연구소 제3소로 개편되었고, 제1계학술위원회를 성립시켜 후성 이외에도 톈지아잉(田家英), 리주(黎澍)를 회원으로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중국사회과학원 원장(1985-1998), 국무원 학위위원회 부주임 위원, 중국사학회 회장, 손중산연구회 회장,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학부위원,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사회과학 학과의 설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사회과학이 시대의 필요성에 부합하는 것 또한 강조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하방되기도 하였다. 후성청년학술장학금(胡绳青年學術獎基金)이 설립되어 있다. 1990년 유럽과학예술문학과학원에서 원사(院士)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从鴉片戰爭到五四運動》, 《中國共産黨的七十年》, 《馬克思主義與改革開放》, 《歷史和現實》, 《什么是社會主義,如何建設社會主義?》, 《中国近代史提纲》(1840—1919), 《中国近代历史的分期问题》, 《理性與自由》, 《枣下论丛》 등이 있다.

 

 

132. 훙예(洪業, 1893-1980)

푸졘(福建) 허우관(侯官) 출생. 전근대사학자. 교육자. 대외학술교류에 기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1915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2년 뒤 오하이오주 웨이쓰량(韋斯良) 대학에서 문학사를 획득하였다. 1919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고, 1920년 콜롬비아대학 협화신학원에서 신학사를 취득하였다. 이후 역사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였다. 1923년 귀국 이후, 옌징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행정 업무도 맡았다. 역사학과 교수, 주임, 교부장, 도서관 관장, 하버드옌칭학사(哈佛燕京學社)의 편집처 주임, 연구원 역사학부 주임, 연구생 지도 등을 역임하였다. 1941년 일본군에 의해 대학이 봉쇄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946년 미국으로 가서 강의도 하였다. 이후 1968년까지 하버드대학 동아어문계 연구원을 겸임하였다.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引得說》, 《中國最偉大的詩人杜甫》, 《洪業論學集》 등이 있다.

 

 

133. 쑨이랑(孫詒讓, 1848-1908)

저쟝 루이안(瑞安) 출생. 경학자, 고문자학.

그는 16개 현에 학당 3백여 개를 설립하여 저난(浙南) 근대 교육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지역 사회의 계몽운동과 쇄신에 기여하였다. 1868년부터 1879년까지 관료였던 아버지를 따라 쟝쑤, 안후이(安徽), 후베이 지역을 다니면서 강남과 강북의 유명한 문인,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았다. 남송 영가학파(永嘉學派)의 학풍을 계승해 경서의 의리와 전장제도를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저서로서 《周禮正義》, 《名原》, 《温州經籍志》, 《籀庼述林》 등이 있다.

 

 

134. 지원푸(嵇文甫, 1895-1963)

허난 지현(汲縣) 출생. 사상사.

청말 진사로 허난성에서 지현소학, 중학을 창설하여 신학문을 가르쳤던 리민슈(李敏修)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915년 베이징대학 예과를 거쳐 본과에 입학하였고, 펑유란(馮友蘭), 천중판(陳仲凡) 등과 같은 반이었다. 1926년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귀국 이후, 칭화대학, 베이징대학, 옌징대학, 중궈대학, 허난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 카이펑사범학원 원장, 정저우대학(鄭州大學) 초대 교장과 역사학과 창설,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전국정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선진제자백가와 송명이학을 오랫동안 연구하였고, 역사유물주의의 관점을 사학에 도입하는 토대를 마련한 연구자이다.

연구 성과로서 《先秦諸子政治社會思想述要》, 《晚明思想史》, 《中國社會史》 등이 있다.

역사유물주의의 관점을 사학에 도입하는 토대를 마련한 연구자이다.

 

 

135. 장인린(張蔭麟, 1905-1942)

광둥 둥관(東莞) 출생. 고대사. 철학자.

칭화대학에서 졘중수(錢鍾書), 우한(吳晗), 샤나이(夏鼐)와 함께 ‘문학원 4재자’로 불렸다. 《學衡》, 《清華學報》, 《東方雜志》, 《燕京學報》 등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칭화학당 중등과 3학년에서 공부할 때, 《學衡》제21기에 량치차오(梁啓超)가 전개한 노자의 일생에 대한 고증에 의문을 제기하는 《老子生後孔子百余年之說質疑》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량치차오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1929년 칭화대학 졸업 이후, 공비 지원으로 미국 스탠포드대학으로 유학 가서 서양철학사와 사회학을 학습하였다. 철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1934년 칭화대학의 초청으로 역사학과, 철학과에서 전임강사로 강의하였고, 이후 베이징대학, 저쟝대학, 난카이대학, 쿤밍시난연합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국방설계위원회 연구원, 중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소 《中國社會經濟史集刊》의 주편 등을 맡았다.

푸쓰녠(傅斯年)의 추천으로 고등, 중등,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주편을 맡았고, 교육부의 초청으로 고등학교 역사 교재인 《中国史纲》(상고편)을 편찬하였다. 국방설계위원회 연구원, 중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소 《中国社会经济史集刊》 주편을 역임하였고, 1941년 《时代與思想》의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시대와 사상사(时代與思想社)를 창설하였다. 그는 사학 이외에도 철학,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번역 등에 광범위하고 풍부한 학식을 갖고 있어 종합적으로 융합해내면서 근대의 인문학적 방법 및 비판과 분석 능력을 결합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史綱》(상고편), 《张荫麟文集》, 《论历史哲学》, 《历史研究法》, 《宋史新编》, 《中国政治哲学史》 등이 있다.

 

 

136. 양샹쿠이(楊向奎, 1910-2000)

허베이 펑룬현(豊潤縣) 출생. 중국 고대사. 사상사.

1931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였고, 구제강(顧頡剛) 교수로부터 배웠다. 1935년 졸업 후, 구제강과 후스(胡適)의 추천으로 문과연구소 조교로 임명되었다. 1936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연구생으로 있다가 다음해 중일전쟁의 발발로 귀국하였다. 이후 시베이대학, 둥베이대학 등에서 강의하였고, 1946년 산둥대학 중문과 교수, 주임, 역사학과 주임, 역사어문연구소 소장, 문학원 원장, 《文史哲》 주편, 중국사학회 칭다오시 분회 부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에는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현 중국사회과학원)연구원 학술위원회 주임, 진한사연구실과 청사연구실 주임 등도 맡았다.

60여 년 동안 역사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중국 사회사, 경제사, 사상사 등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고,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인 발굴, 민속 조사를 서로 결부시켜 연구하자고 주장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西漢經學與政治》, 《中國古代社會與古代思想研究》, 《中國古代史論》, 《宗周社會與禮樂文明》, 《墨經数理研究》 등이 있다.

 

 

137. 양쿠안(楊寬, 1914-2005)

쑤(江蘇) 칭푸(靑浦) 출생. 고대사.

1936년 광화대학(光華大學) 중문과를 졸업하였고, 사학의 대가였던 뤼쓰몐(呂思勉)과 장웨이챠오(蔣維喬) 등으로부터 배웠다. 쑤저우중학교에 다닐 때, 왕마오주(汪懋祖) 교장은 겸임 베이핑사범대학 교장으로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사로 임명하거나 강연을 맡겼다. 교사로는 쳰무(钱穆), 루수샹(吕淑湘, 중국어), 양런폔(杨人楩, 역사학자)이, 강사로는 장타이옌(章太炎), 구제강(顧頡剛), 후스(胡適), 장치윈(张其昀), 어우양위쳰(欧阳予倩)이 초빙되어 왔으며, 그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46년 상하이박물관 관장 겸 광화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맡았고, 1953년 푸단대학 역사학과 교수에 부임하였다. 1960년 상하이사회과학원 역사소 부소장을 담당하였다. 1970년 푸단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다시 부임하였다. 상하이시문물보관위원회 주임비서, 고물정리처(古物整理處) 처장, 상하이시박물관 관장 중국선진사학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의고와 신고로 나뉘어져 3차에 걸친 고사변 논쟁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대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광화대학(光华大学) 중국문학계에서 학습하며 쟝웨이챠오(蒋维乔)의 지도 하에 《吕氏春秋汇校》를 편찬하였다. 졸업 이후, 구제강(顧頡剛)의 지도로 퉁수예(童书业)와 춘추전국사를 연구하면서 《战国史》를 저술하였다. 《中國上古史導論》은 구제강(顧頡剛)이 중국 고대사의 과학적인 연구를 주장하면서 간행한 《古史辯》의 주요한 맥락을 계승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上古史導論》, 《墨經哲學》, 《中國歷代尺度考》, 《古史新探》, 《呂氏春秋集釋》(공저), 《中國古代都城制度史研究》, 《戰國史料編年輯証》, 《战国史》,《西周史》, 《中国古代冶铁技术发展史》, 《中国古代陵寝制度史研究》, 《杨宽古史论文选集》 등이 있다.

 

 

138. 뭐웨(繆鉞, 1904-1995)

쑤(江蘇) 리양(溧陽) 출생. 중국고대사, 위진남북조사. 중문학자.

1922년 베이징대학 문과에 입학하였다. 1924년 집안이 곤궁하여 일찍 바오딩사립배덕중학(保定私立培德中學) 등에서 교사로서 일하면서 독학하였다. 1938년 저쟝대학 중문과 부교수로 초빙 받아 2년 뒤 교수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궈빈화(郭斌龢), 쳰무(錢穆) 등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항전 승리 이후, 청두(成都) 화시협합대학(華西協合大學)의 초청으로 중문과, 역사학과 교수 겸 중국문화연구소 연구원, 쓰촨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쓰촨대학 중문학과 교수, 중국고대사교연실 주임, 역사연구소 부소장, 고적정리연구소 명예 소장, 중국위진남북조사학회 고문, 중국당사학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중국 고대사, 중국 고전문학, 역사문헌학, 위진남북조사 등을 연구하였다. 왕궈웨이(王國維), 천인커(陳寅恪) 등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았다.

주요 연구 저서로서 《詩詞散論》, 《杜牧詩選》, 《三國志選》, 《灵溪詞說》(공저), 《三國志導讀》(주편), 《詞學古今談》(공저) 등이 있다.

 

 

139. 뤄쟈룬(羅家倫, 1897-1969)

저쟝(浙江) 사오싱(紹興) 출생. 교육자. 사상가.

1914년 상하이 푸단공학에 다닐 때, 그는 량치차오를 제일 존경해 혁명파와 입헌파의 논쟁에 동조하지 않았다. 1917년 베이징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지도를 받았으며, 베이징대학의 자유로운 학문 기풍에 심취하면서 혁명 사상 및 활동에 좀 더 적극적인 면모를 드러내었다. 1919년 푸쓰녠(傅斯年), 구제강(顾颉刚) 등과 신문화 운동을 지지하면서 신조사(新潮社)를 창립해 《新潮》 월간 잡지를 간행하였다. 그는 국고(国故)를 전통 학문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리하기를 제언하였고, 반봉건반제국주의 와 민주, 민족의 자결 등을 주장하였다.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등도 지지하였다. 베이징 학생 대표로 상하이 전국학련성립대회에 참가하였고, 5․4운동에서도 《北京学界全體宣言》이라는 백화문 글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5월 26일 《每周评论》에 5․4운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921년 미국 프린스튼대학 연구원으로 유학가서 역사와 철학을 학습하였고, 1921년 콜롬비아대학 연구원으로 옮겼다. 당시 푸쓰녠이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어서, 그도 1922년 영국 런던대학 연구원으로 가서 푸쓰녠과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1923년에는 베를린대학 연구원으로, 1925년에는 파리대학 연구원으로 가서 주로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였다. 1926년 귀국 후, 장제스를 지지하는 글도 발표하였고, 칭화대학 교장으로 임명되어 국립대학으로 변경하기도 하였으며, 우한대학 역사학과 교수, 중양대학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항전 승리 이후, 국민당 중앙당사편찬위원회 부주임, 인도 대사, 고시원 부원장, 국사관 관장 등을 맡았다. 1949년 타이완으로 갔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科學與玄學》, 《逝者如斯集》, 《中山先生倫敦蒙難史料考訂》, 《蔡元培先生與北京大学》 등이 있다.

 

 

140. 뤄건저(羅根澤, 1900-1960)

즈리(直隸) 선현(深縣) 출생. 고전문학사.

1925년 허베이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하였고, 생활이 곤궁하여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1927년 칭화연구원 국학과와 옌징대학 국학연구소 두 곳에 들어가서 매월 진첩(津貼) 수혜를 받으면서 공부해 1929년 졸업하였다. 칭화연구원에서 량치차오(梁啓超)에게서 제자학을 배웠고, 량치차오가 사망한 후 천인커(陳寅恪)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국학연구소에서는 펑유란(馮友蘭)과 황쯔퉁(黃子通)에게서 중국 철학을 배웠다. 허난대학 교수에 부임하였고, 톈진여자사범학원, 중궈대학, 베이징사범대학, 난징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겸직 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제자학, 중국문학비평사, 중국문학사를 연구, 강의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樂府文學史》, 《中國古典文學論集》, 《隋唐文學批評史》, 《魏晋六朝文學批評史》, 《晚唐五代文學批評史》, 《中國文學批評史》(3권) 등이 있다.

 

 

141. 뤄전위(羅振玉, 1866-1940)

쑤(江蘇) 화이안(淮安) 출생. 농학자. 교육자. 고고학자. 금석학자. 돈황학자.

왕궈웨이(王國維)와는 저쟝(浙江) 동향으로 모두 15세에 수재가 되었고, 학부에서 직무를 맡았다. 이후에도 그는 왕궈웨이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두 사람 모두 문학, 경사, 고증, 목록, 판본 등 전통학문의 제 방면에서 뛰어났으며, 저술도 100여 권이나 되는 국학대사였다. 그는 학부 자의관, 참사관, 경사대학당 농과감독 등을 역임하였다. 무술변법 이후 신사조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배웠고, 《农学报》와《教育世界》를 창립하였으며, 농무학당에서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다시 국학으로 바꾸어 갑골학, 돈황학 등을 연구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일본으로 가서 고증학을 전하였고, 귀국 후 1921년 돈황경적집존회(敦煌經籍輯存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선통제 푸이(溥儀)의 스승으로 있었으며, 만주국에서 참의, 감찰원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자를 연구해 《은허서계전고석》등을 출간하였다.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문서 등을 연구해 둔황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流沙墜簡》(공저), 《雪堂校刊群書敘錄》, 《瓜沙曹氏年表》 등이 있다.

 

 

142. 미이즈(芈一之, 1925- )

허난 안양시(安陽市) 출생. 칭하이민족사(靑海民族史).

1949년 난징정치대학 정치경제학원 정치학계를 졸업하였다.

1958년 칭하이대학사범학원(靑海大學師範學院) 역사계 교원이 되었고, 1980년 칭하이민족학원 민족연구소 부교수, 교수에 부임하였다. 주로 칭하이민족사 연구 등구에 전념하였다.

주요 연구 저서로 《青海蒙古族歷史簡編》 등이 있다.

 

 

143. 쑤솽비(蘇雙碧, 1933- )

푸졘 난안(南安) 출생. 정부특수진첩 수혜자.

1961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베이징시역사학회 비서,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사, 중국사학회 이사, 중국공자기금회 이사, 베이징시태평천국사연구회 회장, 중국기실문학연구회 부회장, 《光明日報》 이론부 주임, 고급 편집, 《求是》 부총편집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評姚文元的評新編歷史劇海瑞罢官》, 《歷史科學的理論和方法》, 《吴昭传》(공저), 《洪秀全傳》, 《中國史學家評傳》(주편), 《社會主義理論叢書》(주편) 등이 있다.

 

 

144. 룽멍위안(荣孟源, 1913-1985)

즈리(直隸) 닝진(寧津) 출생. 중국 근대사.

1931년 베이핑중궈대학에 입학하였다. 만주사변 발발 이후, 학생들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산시성(山西省)으로 가서 팔로군 총병참 위생부 부장을 맡았다. 1950년 화베이대학 역사연구실에서 중국과학원 근대사연구소로 옮겨 연구하였고, 연구원, 학술위원, 국무원고적정리규획소조 성원, 중국현대사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근대사연구소에서 판원란(范文瀾) 소장이 제창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중국 근대사를 연구하였고, 1954년부터 1985년까지《近代史资料》의 주편을 맡아 58집을 출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사학회가 근대사에 관한 자료 총간을 편찬할 때, 그도 《太平天国》, 《义和团》, 《辛亥革命》 등을 편집하였으며, 쑨원(孫文)의 저작과 서신 등을 수집하여 1956년 《孙中山选集》을 출간하였다. 주로 중국 근대사를 연구했는데, 태평천국운동, 의화단운동, 신해혁명 등의 주제에 집중하였다.

주요 연구 저서로서 《蔣家王朝》, 《中國近代史歷表》, 《歷史筆記》 등이 있다.

 

 

145. 샤오이산(蕭一山, 1902-1978)

쑤(江蘇) 퉁산(銅山) 출생. 원명 구이선(桂森). 청사.

주로 청사를 연구하였고, 미국 파견 기간에 모았던 태평천국운동과 비밀결사에 관련 사료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였다.

샤오이산은 사숙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글을 읽었고, 역사에 흥미를 보이면서 사서오경을 거의 외웠다고 한다. 1919년 산시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는데, 이때부터 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베이징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명청사의 전문가였던 주시쭈(朱希祖), 멍썬(孟森) 등으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1925년 졸업 후 칭화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정치사를 강의하였다. 칭화대 재임시절, 량치차오(梁啓超)는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었다.

베이핑문사정치학원을 설립해 원장이 되었고, 인재 배양과 학제 개편에 힘썼다. 1931년 난징중양대학 청사 교수로 초빙되었다. 다음해 교육부에 의해 미국으로 파견되었고, 태평천국운동에 관련된 자료를 많이 모았다. 1934년 귀국 이후, 다음해 허난대학 문학원 원장, 둥베이대학 문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중일전쟁 종전 이후, 국민정부 제1계 감찰원 감찰위원을 맡았고, 1948년 타이완으로 가서 타이완 근대사연구소 전임연구원, 중앙연구원 원사, 중국사학회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清代通史》, 《太平天國叢書》, 《太平天國詔諭》 등이 있다.

 

 

146. 샤오차오란(蕭超然, 1929- )

후난 린강(臨港) 출생. 중국혁명사. 5.4문화사상사, 중국정당사.

1953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중국사 전공과 런민대학(人民大學) 중국혁명사 전공 연구생반을 졸업하였다. 1950년대 초 베이징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해 교수가 되었고, 베이징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교연실 주임, 정치학과 행정관리계 주임, 베이징대학 학술위원, 중공베이징대학 당위위원, 베이징시 중공당사학회 부회장, 중국차이위안페이연구회(中國蔡元培硏究會)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외 교류에도 활발히 활동하여 미국, 홍콩, 한국 등의 국가에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政治發展與多黨合作制度》(주편), 《幗民革命的興起》(공저), 《北京大學與五四運動》, 《北京大學校史》(공저) 등이 있다.

 

 

147. 샤오즈즈(蕭致治, 1929- )

후난 우펑시(武風市) 출생. 중국 근대사. 중서관계사.

1960년 중산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우한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황싱연구실(黃興硏究室) 주임, 후베이신해혁명연구중심 상무이사, 신해혁명사연구회 이사, 후베이성사회과학원 연구원, 화중사범대학 중국근대정치사상사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阿片戰爭研究》, 《林钦差與阿片戰爭》, 《外國學者論阿片與林則徐》, 《阿片戰爭史》 등이 있다.

 

 

148. 쟝융징(蔣永敬, 1922- )

안후이(安徽) 딩윈(定運) 출생. 중국현대사.

1942년 안후이사범전과학교 교육과에 입학하였고, 둥베이대학 교치대학(敎治大學) 교육연구소 석사를 졸업하였다. 선양사범전과학교(瀋陽師範專科學校)에서 강의하였다. 1949년 타이완으로 가서 학당당사위원회(學黨黨史委員會)에서 일하다가 편집 일을 맡았다. 《國父全集》을 편찬하였고, 정즈대학(政治大學) 역사학과에서 중국 현대사를 강의하였고, 석사생들을 지도하였다. 정즈대학 역사연구소 교수 겸 소장이었다.

 

 

149. 쟝팅푸(蔣廷黻, 1895-1965)

후난 바오칭(寶慶) 출생. 근대 대외관계사. 중소관계사. 외교가.

1911년 교회의 지원을 받아 미국 콜롬비아대학 연구원으로 유학 가서 역사를 공부해 철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23년 귀국 이후, 난카이대학(南開大學)과 칭화대학 교수, 칭화대학 문학원 원장, 역사계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과학적인 관점으로 연구하여 사학계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근대 중외관계가 중국 역사의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로 인해 근대 대외관계사 당안 자료의 정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만주사변 이후, 그는 후스와 《独立评论》을 창립하여 정부의 정책에 대하여도 제언하였으며, 장개석이 그를 불러 정견을 경청하기도 하였다. 1935년 비국민당원인 학자로서 남경정부 행정원 정무처장에 임명되었고, 외교계의 일을 시작하였다. 1945년 국제연합 중국 상임대표가 되었고, 1961년 타이완 주미 대사 겸 국제연합 대표를 맡았다. 《淸華學報》, 《中國社會政治學報》, 《獨立評論》 등에도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난카이대학 역사학과에서 최초로 중국 근대외교 사료의 수집과 연구를 시작하였고, 근대 외교문제를 강의하였다. 그의 책은 대학 교재로도 사용된다.

주로 중국 근대사와 대외관계사에 관해 연구하였고, 중소관계 및 만주를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近代史》, 《近代中國外交史資料輯要》(2권), 《蔣廷黻選集》, 《蔣廷黻回憶錄》 등이 있다.

 

 

150. 쟝멍인(蔣孟引, 1907-1988)

후난 사오양시(邵陽市) 출생. 원명 쟝더헝(蔣德恒). 세계사. 영국사.

1929년 난징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하였다. 1933년 졸업 후, 다음해 영국 런던대학 역사학과에 유학하여 《論1856一1860年的中英關係》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39년 중일전쟁 기간 중 귀국하여 시난대학, 중양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난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영국사를 가르쳤고, 중국에서 영국 역사학과의 개척자가 되었다. 개혁개방 시기 세계사에 관한 연구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고, 1980년 영국사연구회가 성립되었을 때, 그는 《英国历史研究动态》라는 논문에서 영국사 연구에 관한 새로운 관점 및 동향을 제시하면서 권위자의 면모를 보였으며,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第一次世界大戰》, 《第二次阿片戰爭》, 《羅馬帝國衰亡史》(역서) 등이 있다.

 

 

151. 쟝짠추(蔣贊初, 1927- )

쑤(江蘇) 이싱(宜興) 출생. 남경지방사.

1950년 난징대학을 졸업하였다. 남징에서 六朝의 유적지와 묘의 발굴과 고찰에 전념하였다. 난징대학 역사학과 고고학 교수, 난징시 문물관리위원회 위원, 난징역사학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남경지방사에 대해 40여 년 동안 연구하였다. 남경을 ‘육조고도(六朝古都)’에서 ‘십조고도(十朝故都)’ 혹은 ‘십대고도(十代故都)’라고 보는 그의 관점이 학술계에서 광범위하게 인정을 받았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南京城的歷史變遷》, 《南京地名考略》, 《我國東南地區原始文化的分布》, 《長江中下游歷史考古論文集》 등이 있다.

 

 

152. 셰번수(謝本書, 1936- )

쓰촨 츙샤(邛峽) 출생. 국무원정부특수진첩 수혜자.

윈난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윈난성대학 역사학과 부교수, 윈난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 연구원, 윈난민족학원 역사계 주임과 교수, 윈난민족학원 민족연구소 연구원 및 교수, 충칭시연구중심 특별연구원, 광시민족학원 한족연구중심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강의와 연구 성과 면에서 20여 차례나 상을 획득하였고, 윈난성 인민정부가 ‘걸출한 공헌을 한 전문 기술인재’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1997년 영국켐브리지국제인물전기중심에서 ‘20세기 성과장’을 수여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世界名人录》, 《亚洲太平洋地区名人辞典》, 《中国社会科学家大辞典》 등에도 서술되어 있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袁世凯與北洋軍閥》, 《護國運動史》, 《蔣介石與西南地方實力派》, 《近代雲南各族人民的愛國主義鬪爭》, 《雲南近代史》, 《近代昆明城市史》 등이 있다.

 

 

153. 셰청런(謝承仁, 1924- )

후베이 쑹쯔(松滋) 출생. 근대사상문화 연구. 정부특수진첩 수혜자.

1950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우두사범대학(首都師範大學) 역사학과 교수, 중국근대사상사 연구실 주임, 중국근현대사교연실 주임, 석사 연구생 지도 등을 역임하였다.

‘회헌재교육기금회 1993년 고등사범학교 교사장 2등장’을 수여하였다. 우한(吴晗)이 《中国历史小丛书》를 주편할 때 참가하기도 였다.

주로 중국 고대사와 근대사상문화를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1645年江陰人民守城的故事》, 《戚繼光》, 《李自成新傳》, 《中国传统思想文化渊源》 등이 있다.

 

 

154. 셰텐유(謝天佑, 1932-1988)

후베이 황메이(黃梅) 출생. 중국 고대사.

1958년 화둥사범대학 역사학과 중국통사 연구반을 졸업하였다. 화둥사범대학 중국고대사 교연실 주임, 역사학과 교수, 중국농민전쟁사연구회 제2계 이사장 겸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중국 농민전쟁사, 고대 경제사, 봉건주의 비판 등에 관해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秦漢經濟政策與經濟思想史稿》, 《專制主義統治下的臣民心理反思》 등이 있다.

 

 

155. 셰궈전(謝國楨, 1901-1982)

허난(河南) 안양(安陽) 출생. 명청사.

1926년 칭화학교(淸華學校) 연구원 국학과에 입학하여 량치차오(梁啓超)에게서 배웠고, 다음해 졸업하였다. 이후 국립베이핑 도서관, 중양대학, 윈난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난카이대학과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역사연구소에서 강의하고 연구하였다.

명청사와 문헌학, 금석학, 한대 사회 등에 대해 연구하였고, 특히 명청 교체기에 관심을 가졌으며, 문헌 자료 이외에 소설을 보충 자료로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淸開國史料考》, 《晚明史籍考》, 《明清之際黨社運動考》, 《清初農民起義史料輯錄》, 《明代社會經濟史料選編》 등이 있다.

 

 

156. 셰줴민(謝覺民, 1918- )

저쟝(浙江) 상유(上虞) 출생. 역사지리.

국립저쟝대학을 졸업하였다. 중국지리연구소와 타이완사범대학에서 일하였다. 이후 미국 수라쿠즈 대학(Suracuse University)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고, 콜롬비아 대학 등에서도 강의하였다. 1964년 영국 리즈 대학에 초청을 받아 1년 정도 강의하였다. 1972년 미국인문과학연구장학금을 받았고, 샹강대학(香港大學) 지리학과 명예교수, 타이완사범대학 강좌교수, 타이완지리학협회 회장, 베이징대학 방문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국제지리학회와 태평양과학회의에 출석하였으며, 1968년 인도에서 개최된 제21차 국제지리학회에서 인구지리조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7년 출간된 《中国的土地和人民》은 대학에서 많이 교재로 사용하고 있으며, 1973년 미국 Mcgrau Book Company가 출판한 《中国地图集》은 《뉴욕시보》가 2번씩이나 당대의 서적으로 추천하였다. 《臺灣寶島》도 미국 ‘도서계간’에서 그 해의 가장 훌륭한 과학도서 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았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臺灣寶島》, 《中國的土地和人民》, 《中國地圖集》 등이 있다.

 

 

157. 탄커성(譚克繩, 1933- )

광시(廣西) 환쟝(環江) 출생.

1957년 화중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모교에서 역사학과 조교, 강사, 부교수, 교수, 과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鄂豫皖蘇區歷史簡編》, 《鄂豫皖革命根据地鬪爭史》, 《中國現代史普及讀本》 등이 있다.

 

 

158. 탄치양(譚其驤, 1911-1992)

저쟝(浙江) 쟈산(嘉善) 출생. 역사지리학자. 정부특수진첩 수혜자.

1930년 상하이 지난대학(暨南大學) 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베이핑 옌징대학(燕京大學) 연구원에서 구셰강(顧頡剛)에게 배웠고, 1932년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32년 칭화대학, 베이징대학 등의 역사학과 동학들과 중국역사학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황셴판(黃現蟠), 주스쟈(朱士嘉)가 서기를 맡았으며, 구셰강, 천인커(陳寅恪), 타오시성(陶希聖), 천위안(陳垣), 후스 등 18명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구셰강과 우공학회(禹貢學會)를 조직하여 이사를 맡았고, 중국지리학회 이사, 역사지리전업위원회 부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푸단대학 역사학과 교수에 부임해 중국역사지리연구실을 설립하였고, 나중에 연구소로 승격된 중국역사지리연구소 주임, 소장 등을 맡았다. 1980년 중국과학원 지리학부 위원, 원사(院士), 문과학부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1년 이후, 중국역사학회 상무이사, 상하이사학회 부회장, 상하이시 철학사회과학연합회 부회장, 중국역사지리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950년대부터 30여 년 동안 《中国历史地图集》(1—8권)을 편찬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는 중국 국경 지역에 관한 담판과 외교, 국방,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국무원에서 그에게 특수진첩을 수혜하였고, 중국과학원에서 영예장(荣誉章)과 영예장상(荣誉奖状)을 수여하였다. 그는 198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中华人民共和国国家历史地图集》의 편집을 담당하였고, 이 지도집은 역사인문학과 자연지리 두 개의 면을 포괄하고 있다. 제3, 4, 5계 전국인민대표협회 대표, 상하이시 제8계정협 위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주로 역사, 인문지리와 자연 지리를 포괄해 중국 역대 영토와 구역, 민족의 변천, 문화 구역 등을 연구하여 황하, 장강수계, 해안 변천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歷史地图集》(주편), 《長水集》(2권), 《長水集續編》, 《中國自然地理歷史自然地理》(주편), 《中國歷史大辞典歷史地理》(주편) 등이 있다.

 

 

159. 탄잉화(譚英華, 1917-1996)

중국 당사(唐史), 서장사(西藏史), 세계사, 서양 사학사 등.

1940년대 우한대학에서 역사학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50년대 초에 쓰촨대학 역사학과 정교수가 되었다. 1985년 교육부의 위탁으로 《西方史學史》에 관한 전국고등학교 교재 편찬을 위한 부주편을 맡았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两唐書食貨志校續記》, 《十六․十七世紀西方史學思想的更新》, 《試論馬考莱的史學》 등이 있다.

 

 

160. 자오얼순(趙尔巽, 1844-1927)

만주족. 《清史稿》주편.

자 공양(公镶), 호 차산(次珊), 무보(無补). 또 이름을 차산(次山)이라고도 하였다. 청말 한군정감기인(汉军正蓝旗人)이었다. 1874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翰林院) 편수(编修)가 되었고, 이후 안후이, 산시(陝西) 등의 안찰사, 후난순무, 성경장군(盛京將軍), 쓰촨총독 등을 역임하였다. 1911년 동삼성 총독이었을 때 신해혁명이 발발하였고, 동삼성보안회를 조직해 저지하려고 하였다. 1914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청사관 관장으로 임명해 《清史稿》의 주편을 맡겼다. 1925년 돤치루이(段祺瑞) 집권 시기 선후회의 의장과 임시 참의원 의장 등도 역임하였다.

 

 

161. 덩광밍(鄧廣銘, 1907-1998)

산둥 린이현(臨邑縣) 출생. 당송요금사. 송사 권위자.

1932년 25세의 나이에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36년 베이징대학 사학과를 졸업하면서 제출한 졸업 논문인 《陳龍川傳》이 후스(胡適)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1923년 산둥성립제1사범학교에 다닐 때 신문화운동을 하던 왕주천(王祝晨) 교장 덕분에 계몽 교육의 영향을 받았고, 그때 구졔강(顧頡剛)이 주편한 《古史辨》과 《崔東壁遺書》를 읽고서 고대사에 대한 의고학적인 사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일전쟁 이전 베이징 대학 재학 중에 유멍썬(有孟森), 천위안(陳垣), 구졔강, 쳰무(錢穆), 후스, 푸쓰녠(傅斯年), 저우줘런(周作人), 타오시성(陶希聖) 등으로부터 수강할 수 있었다.

1954년 이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중국 고대사 교연실 주임, 역사학과 주임, 중국중고사연구중심 주임, 국무원학위위원회 임원, 전국고교고적정리위원회 부주임, 전국정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0년에는 중국사학회 회장단 임원과 중국송사연구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중국 고대사를 주로 연구하면서 특히 당송요금사에 전념하였으며, 송사 연구의 권위자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岳飛传》, 《陳亮集》, 《王安石》 등이 있다.

 

162. 덩즈청(鄧之誠, 1887-1960)

쟝쑤 쟝녕(江寧) 출생. 명청사.

청두외국어전문학교 프랑스어과와 윈난양급사범학당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 전보사(滇報社)에서 편집 일도 하였다. 1917년 베이징대학의 초청으로 국사편찬처에서 민국사 서술과 편집을 담당하였다. 1921년 베이징대학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이후 베이핑사범대학, 베이핑대학 여자문리학원, 옌징대학, 푸런대학(輔仁大學) 사학과 겸임 교수를 맡았다. 1952년 이후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교수, 명청사연구지도,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역사고고 전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 초 그가 강의 교재로 사용한 《中國通史講義》상중 2권은 대학총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華二千年史》, 《骨董瑣記》, 《明斋題識》, 《東京梦華錄注》 등이 있다.

 

 

163. 덩추민(鄧初民, 1889-1981)

후베이 스서우(石首) 출생. 사회과학자. 사회사. 국가급 특별 공헌 교수.

1912년 우창쟝한대학(武昌江漢大學)에 입학하였고, 다음해 일본으로 가서 도쿄 호세이대학(東京法政大學) 정치학과에서 학습하였다. 1915년 중국유일학생총회의 평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리다자오(李大釗) 등과 《民彝》을 창립하였다. 1917년 귀국 이후, 산시성정서(山西省政書) 총편집, 산시학술연구회, 우한법정대학 교무장 등을 맡았다. 1933년 이후, 지난대학, 광시대학 등에서 강의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양학원 정치계 주임 등을 맡았다. 1941년 충칭에서 전국각계구국연합회에 가입하여 중국민주혁명동맹의 창립에 참가하였으며, 중국민주정단동맹에도 가입하였다. 1925년 무한에서 둥비우(董必武)의 소개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후베이성 당부집행위원과 청년부장에 임명되었고, 장개석의 4․12 반공 쿠데타 등 국민당 우파의 분열을 반대하였다. 그는 많은 공산당원들과 함께 일하였는데, 그들의 반제반봉건주의 혁명 사상 및 활동에 감동하였다. 마오쩌둥과 함께 국민당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에서 일할 때도 그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으로 중국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통찰하고 해결하는 것을 보고 존경심을 갖기도 하였다. 공산당 성립 초기 리다자오, 둥비우, 마오쩌둥 등과 교류하면서 사상에 대한 영향을 받았고, 체포의 위협 속에서도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그는 수더헝(许德珩), 리다(李达) 등과 상해에서 《本社》를 창립해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였고, 공산당이 지도하는 사회과학자연맹의 회장을 맡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선전하면서 혁명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고, 《政治科学大纲》, 《国家论之基础知识》, 《政治学》을 출판하였다. 그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에 의해 국민당 고위층의 통일전선 관련 업무에 종사하였고, 1945년 중국민주동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충칭정치협상회의에도 참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산시성인민정부 부주석 겸 산시대학 교장, 산시성정협 부주석, 중국민주동맹 중앙 부주석, 전국정협 상무위원, 전국인대 상무위원, 중국정치학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사회과학과 사회사의 연구와 강의에 오랫동안 전념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政治科學大綱》, 《世界民主政治新趋势》, 《中國社會史教程》, 《社會進化史綱》, 《民主理論與實踐》, 《政治学》, 《社会史简名教程》, 《社会科学常识讲话》 등이 있다.

 

 

164. 덩루이링(鄧銳齡, 1925- )

기인(旗人) 출신. 장족사(藏族史). 중국근대사.

1947년 베이징대학 문학원 역사계를 졸업하였다. 1949년 베이징대학 연구부 문학원 역사계에 입학하여 샹줴밍(向覺明)의 지도를 받으면서 중국근대사를 전공하였다. 1952년 졸업 후, 국무원 민족사무위원회 정책연구실 정책과 문자 관련 업무를 연구, 정리하였고, 광시장족자치구성립(廣西壯族自治區成立), 시장공작문제좌담회(西藏工作問題座談會) 등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였다. 1960년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에서 《辞海》와《當代歐美民族學人類學概况》 등을 출간하기 위해 편집, 번역 일을 하였다. 1962년 장족사(藏族史)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어 왕썬(王森)을 도와 책을 쓰기도 하였다. 1983년 이후,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부주임, 일본 동징제경대학 국제문화학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우파로 지목되어 하방되기도 하였다.

주요 연구성과로서 《中国历史地图集》(西北边疆), 《辞海》(世界民族),《當代欧美民族学人类学概况》(편역) 등이 있다.

 

 

165. 정톈팅(鄭天挺, 1899-1981)

푸졘(福建) 창러(長樂) 출생. 고대사. 명청사 연구 토대 건설자.

1917년 베이징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 베이징대학 졸업 이후, 베이징대학 연구소 국학과 연구생으로 입학하여 고문자학을 연구하였다. 청대내각대고당안정리회(淸代內閣大庫檔案整理會)에 가입하여 명청 시대 당안 정리 관련 업무에 종사하여 명청사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24년 졸업 후, 베이징대학, 저쟝대학 등에서 강의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시난연합대학 교수, 베이징대학 교수, 문과연구소 부소장 등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난카이대학 교수, 역사계 주임, 중국사학회 상무 이사, 국무원 학위위원회 역사조 책임자, 중국당안학회 고문, 《中國歷史大辞典》 주편 등을 역임하였다.

황칸(黃侃), 류스페이(劉師培)등의 학문 연구 방법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고대사와 명청사를 오랫동안 연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列國在華领事裁判權志要》, 《清史簡述》, 《中國通史参考資料》(공저), 《史學名著選讀》(주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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