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학 지식인(1)

조회 수 3698 추천 수 0 2012.05.15 12:26:39



1. 량치차오(梁启超, 1873-1929)

광둥 신후이(新會) 출생. 청말 개혁운동의 지도자, 언론계의 거두이자, 계몽사상가, 교육가, 문학자, 사학자. 칭화대학국학연구원, 난카이대학, 둥난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중국 ‘新史學’의 제창자다. 그는 왕조 중심의 역사학에서 벗어나 서구의 여러 국가들처럼 중국의 국가의식과 국민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國史”를 창출하려 하였다. 일찍이 옌푸(嚴復)의 《天演論》을 통해 진화론을 알고 있던 량치차오는 일본 망명 중에 서양서적을 섭렵하면서 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고, “역사란 진화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에게 사학은 중국 민족의 진보를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이기도 하였으며, 애국심의 원천이었다.

그는 서양사의 고대, 중세, 근세 구분법을 따라, 黃帝에서 秦의 통일까지를 고대사, 진의 통일에서 청대 건륭 말년까지를 중세사, 건륭 말년부터를 근세사로 나누었다. 중국사시대구분논쟁은 그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푸쓰넨(傅斯年)과 레이하이쭝(雷海宗)을 비롯하여 중국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에게 이 중국사시대구분 문제를 논했다.

사학 관련 대표적 논저로서 〈中國史敍論〉, 〈新史學〉, 《淸代學術槪論》, 《中國小史稿》, 《中國佛敎史稿》, 《墨子學案》, 《中國歷史硏究法》,《歷史統計法》, 《講評胡適之中國哲學史大綱》, 《先秦政治思想史》, 《要籍解題及其讀法》 등이 있다.

 

2.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저장 하이닝(海寧) 출생. 자는 보위(伯隅), 징안(静安),호는 관탕(观堂), 융관(永观). 중국 근현대 학술대가이자, 국학대사다. 궈무뤄(郭沫若), 둥줘빈(董作宾), 뤄전위(羅振玉)와 함께 “甲骨四堂”의 일인으로서, 문학, 미학, 사학, 철학, 고문자, 고고학 등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중국의 신사학은 량치차오가 제창하였지만, 이것을 학문적으로 수립한 것은 왕궈웨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二重證據法’는 “地下의 재료(출토물)”과 “紙上의 재료”를 함께 이용하여 사실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청화학교 국학연구원에서 1925년부터 <古史新証>을 강의하면서, 고대사에서 전설과 史實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이중증거법을 제시하였다. 청조 건륭학파의 유산을 계승한 동시에 엄밀한 과학적 방법을 훈련받았기 때문에 중국역사 분야에 처음으로 근대적인 과학적 방법을 확립하고 사학의 신기축을 세워내었기 때문에 “신사학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저작으로 《觀堂集林》, 《人間詞話》, 《曲錄》 등이있다.

 

3. 거자오광(葛兆光, 1950~)

상하이 출생. 원적은 푸젠. 1968년 산상하향과 함께 1971년 10월~1978년 3월까지 구이저우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978년에 베이징대학 중문과 입학, 1984년, 베이징대학 대학원 중문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10월~1992년 3월까지 쟝쑤성 양저우사범학원 역사과 교수로, 1992년부터는 칭화대학 인문학원 교수로 재직하였다. 2007년 푸단대학 문사연구원 원장 역임하였고, 현재 칭화대학 교무위원회 위원, 칭화대학 인문사회과학학원 교수, 박사지도교수 및 베이징대학, 안우이대학, 푸단대학, 쓰촨대학 겸직교수를 맡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 《禪宗與中國文化》(1986), 《道敎與中國文化》(1987), 《漢字的魔方: 中國古典詩歌語言學禮記》(1989), 《唐詩選注》(1994, 1999), 《中國禪思想史: 從6世紀到9世紀》(1995), 《葛兆光自選集》)1997), 《中國思想史》(1998, 2001) 등이 있다.

 

4. 궈무뤄(郭沫若, 1892~1978)

쓰촨성 러산시(樂山市) 출생. 한족. 원명은 궈카이전(郭開貞), 자는 딩탕(鼎堂), 필명은 무뤄, 마이커양(麥克昻), 궈딩탕(郭鼎堂) 등. 중국공산당 우수당원. 시인, 극작가, 고고학가, 사상가, 고문자학가, 역사학가, 서예가로 활약하였으며, 학자이자 사회활동가였다. 중국 맑스주의사학의 “五老” 중의 최고위다.

왕궈웨이(王國維)로부터 직접 사사받은 적은 없으나, 그의 《觀堂集林》를 접하고서 고대사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초기 성립자 중의 일인이다. 고문헌, 갑골문자, 청동기명문 등을 통해 중국의 노예제를 고증해내었다. 그의 《中國古代社會硏究》는 중국 역사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파악한 인류사회발전법칙을 역사학에 학술적으로 결합시켜낸 결과물로서,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론을 중국사에 적용시켰다.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사를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의 사회형태가 순차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서술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인류사회발전의 일반규칙론을 중국에 완전하게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중일전쟁 시기에 충칭에서 첸보짠(翦伯贊) 허우화이루(侯外廬), 리전우(呂振羽), 화강(華崗), 위쩌(吳澤), 천쟈캉(陳家康) 등과 함께 “新史學會”를 조직하였다.

저서로 《中國古代社會硏究》, 《甲骨文字硏究》, 《中國史稿》, 《甲骨文字合集》, 《郭沫若全集》38권 등이 있다.

 

5. 탕란(唐蘭, 1901~1979)

저장 자흥(嘉興) 출생. 중국 고문자연구에 공헌이 크다. 戰國文字와 戰國史를 연구하였다. 일찍이 상하이에서 왕궈웨이(王國維)의 지도를 받고, 갑골문과 金文 연구를 시작하였다. 청동기명문과 갑골문자 연구에 두각을 나타내, 뤄전위(羅振玉), 왕궈웨이로부터 인정받았다. 1936년 고궁박물원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이 베이핑을 점령하자 쿤밍으로 가서 1939년부터 서남연합대학에서 중문계 부교수로 재직하였고, 1940년에 문과연구소 지도교수로 재직하였다. 1949년 이후 베이징대학교수 겸 중문과 대리주임을 맡고, 고궁박물원 겸임 설계원을 맡았다.

고대사 시대구분논쟁에서노예사회와 봉건사회의 분기를 서주와 춘추 교체기를 주장했고, 商, 夏, 周의 紀年 추산에 독창적 견해를 제출했다. 저서로 《說文注》4권, 《故宮學導論》, 《中國文字學》, 《黃帝四經》, 《戰國縱橫家書》, 《春秋事語》, 《西周靑銅器銘文史征》, 《殷墟文字記》, 《古文字學導論》 등이 있다.

 

6. 다이이(戴逸, 1926~)

장쑤 창수(常熟) 출생. 청사, 중국근현대사 전문가.

1940년 중국인민대학 중국혁명사연구생 졸업. 1954년 공산당 가입. 1949년부터 중국인민대학 교수로 재직, 인민대학 淸史硏究所 소장, 역사계 주임. 국무원학위위원회 제2회 學科評議 구성원, 북경시역사학회 제4,5대 회장, 북경시사회과학연합회 제3대 부주임을 역임하였다. 1986년 전국교육계통노동모범칭호와 인민교사 훈장을 받았다. 2011년 4월 중국문사연구관 관원으로 초빙되었다.

인민대학에서 淸史硏究所 조직하여, 《簡明淸史》제1,2책 주편하였고, 國家社科基金 “六五”계획 항목의 《淸代人物傳稿》(下)10권과 《中國歷史大辭典․淸史》(上), 《中國大百科全書․中國歷史卷》淸史부분을 주관하였다. 《履霜集》. 《步入近代的歷程》, 《乾隆帝及其時代》, 《二十六史大辭典》(주편), 《甲午戰爭與東亞政治》 등을 저술하였으며, “211”공정의 청사 항목 《十八世紀的中國與世界》와 《淸統鑒》 등을 주편하였다.

 

7. 다이쉐지(戴学稷, 1928-)

푸젠 셴여우(仙游) 출생. 푸단대학 졸업. 푸단대학, 베이징대학, 네이멍구대학(內蒙古大學). 광저우 지난대학(暨南大學)에서 중국 근대사를 가르쳤다. 1984년 福建社會科學院으로 옮겨가 소장으로 재직하였다. 주요 연구방향은 중국근대대외관계, 민족관계, 즁요인물 유학생사, 화교의 중국민주혁명 지원 등이다.

 

8. 타오시성(陶希聖, 1899-1988)

후베이 황강(黃) 출생. 본명 후이정(汇曾), 자 시성(希聖), 필명 팡쥔펑(方峻峰). 베이징대학 졸업. 중국 사회사논전에서 “新生命派”의 대표 논자.

1941년 태평양전쟁 폭발 후 충칭에서 장제스의 비서가 되어, 《中國之命運》을 기초하고 《中央日報》의 주필을 맡는 등, 국민당의 핵심이론가로 활동하였다. 1949년 대만으로 옮겨가 총통부 국책고문 역임하였다.

1931년 중앙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중국정치사상사, 중국법률사상사 등을 가르쳤고, 1931년 여름부터는 북경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중국정치사상사, 중국사회사 과정을 가르치면서, 칭화대학, 옌징대학, 베이징사범대학 등에서 함께 가르쳤다.

1930년대 중국사회사 논전을 이끌었던 대표적 논자로서, 중국고대사회가 노예제를 거치지 않고 봉건제사회로 진입했다고 보고, 아편전쟁 이전에 이미 상업자본주의사회였다고 주장하였다.

연구성과로서 《中國政治思想史》, 《西漢經濟史》, 《中國封建社會史》, 《秦漢政治制度》(공저), 《明淸政治制度》(공저), 《唐代經濟史》(공저) 등이 있다. 중국사회경제사 잡지인 《食貨半月刊》 주편하였다.

 

9. 둥수예(童書業, 1908-1968)

안후이 우후(芜湖) 출생. 자 피성(丕繩), 호 용안(庸安).

先秦史, 중국회화사, 瓷器史, 역사지리 전문가로서, 광화대학(光華大學)교수, 상하이박물관 역사부, 총무부 주임 역임하였다. 1949년 이후 산둥대학(山東大學) 교수, 역사과 부주임 역임하였다. “八馬同槽산”의 일인으로서, 산둥대학 역사학 발전에 기초를 닦았다. “西周封建論”의 대표적 학자다.

1920-30년대에 구제강(顧頡剛)과 “古史辨”의 이론과 사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교조적 유물사관을 비판하며, 주대 봉건설과 西周에서 春秋前期를 ‘봉건사회’의 전성기라고 주장하였다. 1951년 〈論亞細亞生産方式〉(《文史哲》제1권제4기)를 통해,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관련해서, 동방이 관계농업, 토지국유, 전제정치 등 아시아국가의 특징을 갖는다는 것을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구분하여, 아시아적 생산방식의 노예사회설을 부정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중국의 역사를 결합하여 중국고대사회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여, 고사분기문제 해결하고자 하였다. 반우파운동 시기에 그의 연구시각은 “수정주의”로 비판받았다.

연구성과로서 《春秋史》, 《中國疆域沿革史略》, 《中國手工業商業發展史》, 《先秦七子思想》 등이 있고, 《禹公》 편집하였다.

 

10. 리둥팡(黎東方, 1907-1988)

허난 정양(正陽) 출생. 원명 즈롄(智廉),

량치차오와 함께 프랑스의 마띠에(Albert Mathiez)에서 수학하였고, 1937년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중산대학, 둥베이대학, 푸단대학 등에서 역사, 철학을 강의하였다. 푸스녠(傅斯年)과 리지(李濟) 등과 함께 中國史學會를 발기했다. 린위탕(林語堂)과 함께 싱가폴에 난양대학(南洋大學)을 창립했다. 그 외 주로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그의 역사서술방식인 “細說體”는 중국 민간 구두문학의 “說三分” 형식을 차용하였는데, 각종 사서 자료에서 소재를 수집하여 역사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린위탕으로부터 “幽默大師”라는 이름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細說三國》, 《細說元朝》, 《細說明朝》, 《細說淸朝》, 《細說民國創立》 등이 있다.

 

11. 레이하이쭝(雷海宗, 1902-1962)

허베이 융칭(永淸) 출생. 자 룬(伯倫).

1922년 칭화대학 졸업 후, 미국 시카고 대학으로 유학, 1927년 철학박사학위(역사) 취득 후 귀국하였다, 중앙대학 사학계 교수 및 사학계 주임을 역임하였고, 1931년 우한대학 사학계와 철학교육계 교수, 1932년 칭화대학 역사계 및 서남연합대학 역사계 교수 및 문학원 대리원장 역임하였다. 1952년부터 난카이 대학에서 역사계 교수로 활동하였다. 1957년 우파분자로 몰린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62년에 사망하였다.

칭화대학 쟝팅푸(蔣廷黻)교수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모두 중시하고, 역사에서 중국과 서양사를 함께 중시하여, 중국사 안에 종합과 고증을 모두 중시”한다는 방침에 따라 1932년 칭화대학에 초빙되어, 칭화대학과 외국 일류대학간의 교류를 추진하는데 힘썼다.

독일 역사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문화형태사관”의 영향을 받아 역사 생성, 발전의 다원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역작 〈中國的兵〉(1935)은 춘추전국시대에서 한대까지의 병역제도를 고찰하여 국민개병만이 자주독립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연구성과로서 〈中國的兵〉, 《中國通史》, 《中國通史選讀》, 《西洋通史》, 《西洋通史選讀》, 《中國文化與中國的兵》, 《世界上古史交流講義》 등이 있다.

 

 

12. 리지(李濟, 1896-1979)

후베이 중샹(鍾祥) 출생. 중국 고고학의 거목, 중국 고고학의 아버지.

1911년 칭화학당에 입학, 1918년 도미유학, 클라크대학(Clark University) 심리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 인구학으로 전과하였다. 1920년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하바드 대학에서 인류학으로 전과하여, 롤란드 딕슨(Roland Dixon)과 어니스트 후통(Ezrnest Hooton)의 지도를 받아 《中國民族的形成》을 완성하고, 1923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난카이대학에 초빙되어 인류학과 사회학 교수 역임하였다.

1928-37년 허난 안양 은허 발굴을 지휘하여, 殷商이 전설이 아닌, 실제 역사임을 밝혀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The Formation of Chinese People, The Beginnings of Chinese Civilization: Three Lectures Illustrated with Finds at Anyang, 《殷虚出土青铜爵形器之研究》, 《殷虚出土青铜斝形器之研究》, 《殷虚出土青铜鼎形器之研究》, 《殷虚出土五十三件青铜器之研究》 외 다수.

 

13. 바이서우이(白壽彛, 1909-2000)

허난 카이펑(開封) 출생. 회족. 回族史와 이슬람사 전문가. 중국사학, 이슬람교사, 회족사 및 관련 영역의 연구의 개척자이자 큰 공헌자. 중국민족사, 중국사학사 및 중국통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1925년 상하이 원즈대학(文治大學) 입학하였으나, 곧 허난 중저우대학(中州大學) 문과 2학년으로 옮겨 펑여우란(馮友蘭)으로부터 직접 지도받았다. 1932년 베이핑 옌징대학 국학연구소에서 중국철학사 석사 학위 취득, 베이핑연구원 역사연구소 및 우공학회 편집을 맡았다. 1940년 이후 윈난대학, 충칭중양대학(重慶中央大學), 난징대학 등 교수 역임하였다.

1949년 7월 궈무뤄, 판원란 등과 新中國史學會 창립하였다. 같은 해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역사계 교수로 임직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 중국과학원 전문위원으로 초빙되어 허우와이루(侯外廬) 등과 중국과학원 역사연구2소 건설 준비 및 연구원을 맡았다. 1971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배려 아래, 《二十四史》 교점 작업을 맡았다.

《伊斯蘭》 창간을 비롯하여, 《月華》, 《雲南淸眞鐸報》 등 잡지를 주편하였고. 류다녠(劉大年)과 《歷史硏究》 창간하였다. 저서로 《學步集》, 《歷史敎育和史學遺産》, 《白壽彛史學論集》, 《白壽彛民族宗敎論集》, 《中國史學史論集》, 《中國史綱要》, 《史學槪論》, 《回族人物志》, 《中國史學史敎本》, 《中國通史》 등이 있다.

 

14. 판원란(范文瀾, 1893-1969)

저장(浙江) 산인(山陰) 출생. 자 仲雲, 호는 蕓台, 필명은 “武波”. 중국 마르크스주의사학의 “五老”. 마르크스주의 중국통차 체계의 창건자.

1913년 북경대학 예과에 합격, 일년 후 國學門에 들어가 음운훈고학자 황칸(黃侃), 천한장(陳漢章)과 경학자 류스페이(劉師培) 등으로부터 수학하며, 건가학을 추종하고 전통학문관련 소양을 깊이 쌓았다.1917년 북경대학을 졸업한 후, 남개대학, 북경대학, 북경사범대학, 중국대학, 조양대학의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북평대학 여자문리학원 원장, 하남대학 교수 등을 맡았다. 중일 전쟁 후, 신사군에 참가하였고, 1940년 연안에 도착하여 마르크스레닌학원 역사연구실의 주임을 맡았고, 중앙연구원 부원장 겸 역사연구실 주임을 맡았으며, 북방대학교장, 화베이대학부교장 겸 연구부주임, 역사연구실 주임 등을 맡았다. 중화인민공공화국 성립 후에는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 학부위원, 역사연구소 3소 소장, 근대사연구소 소장 등을 맡았다.

郭沫若, 翦伯贊, 呂振羽, 侯外廬와 함께 맑스주의사학의 “五老”에 속하는데, 이 중 판원란의 지위는 궈무뤄에 이은 2순위다. 옌안에서 맑스주의사학연구의 핵심은 판원란이었다. 그와 인다(尹達), 진찬란(金灿然), 천보다(陳伯達) 등의 유물사관파의 중국통사연구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 역사 편찬의 경전적 모델이 되었다. 주요저작 가운데 《中國通史簡編》, 《中國近代史》(上冊)이 가장 영향력이 있다. 2002년 11월에 《范文瀾全集》이 출판되었다.

 

15. 푸쓰넨(傅斯年, 1896-1950)

산둥, 랴오청(聊城) 출생. 자는 멍쩐(孟真).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창립자다.

1916년 베이징대학 본과 국문문(國文門)에 입학하였고, 후스(胡適)의 영향 아래 백화문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1918년 뤄자룬(羅家倫), 마오준(毛準) 등과 新潮社를 창립, 《新潮》를 창간하였으며, 5.4운동 학생지도자 중의 일인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말부터 유럽에서 유학하여, 1923년부터 베를린대학 철학원에서 비교언어학 등을 수학하였다. 1927년 중산대학 교수 겸 문학원 원장, 역사계와 중문계의 주임을 맡았다. 1928년 11월부터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소장을 맡았고, 《歷史語言硏究所集刊》을 창간, 주편을 맡았다. 1937년에 중앙연구원총간사가 되었다. 1945년 베이징대학의 대리교장을 맡았다. 1948년 남경국민정부의 입법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9년 1월 역사어언연구소와 함께 타이베이로 이주, 타이완대학의 교장을 겸임하였다.

고증학 전통을 신봉하여 객관과학연구를 주장하여, 사료의 발현과 고증을 중시하였다. 안양의 은허발굴을 지휘하였으며, 역사어언연구소 소장시절에 수많은 인재를 발굴하고 많은 성과를 쌓았다.

주요 저작으로 《东北史纲》(第一卷), 《性命古训辨证》, 《古代中国与民族》, 《古代文学史》, 《傅孟真先生集》(六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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