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과학과 현학 논쟁 1

조회 수 4709 추천 수 0 2012.12.26 15:17:57

1. 린수(林紓, 1852-1924)

 

1852년 푸졘(福建) 민현(閩縣) 출생. 문학가. 번역가.

 

그는 중국 신문화의 선구자로서 중국 근대 문단과 번역계의 태두로 알려져 있다. 《畏盧文集》, 《諷喻新樂府》, 《巾帼陽秋》등 40여 편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주로 중국 근대 사회의 인간상을 묘사하였다.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여 5세부터 사숙에서 학습하였다. 쉐쩌커(薛則柯)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전통 문학을 매우 좋아하여 이때부터 문학과 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세이고 생계 때문에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1882년 수재가 되어 쟝난(江南)의 유명한 거인으로서 광범위하게 스승,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시를 짓고 책을 저술하였다. 7차에 걸쳐 베이징으로 가서 예부 회시에 참가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모친이 사망하고 부인과 자식이 병에 걸려 침울해 있을 때, 웨이한(魏翰)과 왕서우창(王壽昌) 등의 몇 몇 친구들이 책을 번역해보도록 권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1897년 40세가 넘어 번역을 시작하였다. 외국어를 몰랐던 그는 프랑스어가 유창한 왕서우창과 공역으로 프랑스 소설인 《巴黎茶花女遺事》를 번역하였고, 이것이 중국에 첫 번째로 서양 소설을 소개한 것이었다. 이 번역서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으며, 힘을 얻은 그는 문학 작품을 계속 번역하였다. 상무인서관의 초청으로 구미 소설을 번역하였고, 웨이한, 진가린 등 해외로 유학한 인물들과 함께 180여 편의 서양 소설을 번역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그리스, 독일, 일본, 스페인 등 세계 여러 국가의 유명한 작품들을 번역해 중국 민중들에게 풍부한 서양의 문화를 알려주며 시야를 넓혀주었다.

무술변법 이전에 그는 푸졘 지역에서 매일 친구들과 신정에 대해 담론을 나누며, 《閩中新樂府》 50수를 지었다. 여기에는 《村先生》, 《興女学》과 같이 당시의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하였고, 아동 교육의 개혁, 여성 교육의 창설, 애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 사상은 중일전쟁 이후에 더욱 집중적으로 묘사되었다. 이후 그는 보수적인 사상으로 전환하였는데, 이는 유신을 주장하면서 광서제에게 충성하는 입장과 관계가 있었다. 그는 자주 광서제의 능묘를 찾아갔다. 신해혁명 이후, 동성파(桐城派)였던 마치창(馬其昶), 야오융가이(姚永槪)와 베이징대학을 사퇴하였고, 혁명가인 장빙린(章炳麟)을 비판하였다. 5•4운동 시기 《新青年》이 제창하는 백화문 운동을 비판하였으며, 베이징대학 총장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에게 신문학 운동을 반대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번역의 왕이라고도 불렸으며, 외국 소설을 고문체를 사용해서 번역하였다. 소설을 번역하는 것 이외에 주요한 작품으로 문장은 《畏盧文集》, 《讀集》, 시는 《畏盧詩存》, 《閩中新樂府》, 소설로는 《京華碧血錄》 등이 있다. 고문 연구 성과로서 《韓柳文研究法》, 《春覺斋論文》, 《左孟莊騷精華華錄》 등이 있다.

 

 

2. 후셴쑤(胡先驌, 1894-1968)

 

쟝시성 난창(南昌) 출생. 식물학자.

 

저명한 식물학자로 중국 식물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고, 12세에 《史記》와 《漢書》를 통독하였다. 경사대학당 예과를 졸업한 후, 1912년 유학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농학과 식물학을 전공하고 1916년 잠시 귀국하였다가, 1923년 다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식물분류학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25년 귀국 이후, 난징에서 중국과학사 생물연구소를 창립하였고, 1928년 베이징에서 정생생물조사소(静生生物調查所)를 건립하였다. 1934년 쟝시(江西) 루산(盧山)에서 삼림식물원을 창설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정생생물연구소를 토대로 하여 중국과학원에 식물연구소와 동물연구소를 건립하였다. 1947년 정완준(鄭萬鈞)과 함게 활화석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 水杉)을 발견하였고, 다음해 중앙연구원 원사를 맡았다.

초기에는 주로 조사보고서 혹은 고증에 매달리다가, 점차 분류학을 통해 신종, 신속, 신과, 다원 분류를 체계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식물구계학(植物區系學), 고식물학, 경제 식물학 등으로 연구를 확장시켰다. 그의 연구 주제는 중국에서 학과 설립 및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고, 특히 근대 식물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19년 《東方雜誌》에 《中國文學改良論》을 발표해 중국 전통 문화의 입장에서 베이징대학의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등이 제창하는 백화문 운동과 문학 혁명을 비판하였다. 이해에 중국과학사 서기에 당선되었다. 1921년 메이광디(梅光迪), 우미(吳宓) 등과 《學衡》을 창립하였고, 1932년 정생생물조사소 소장으로서 《國風》 반월간에 《今日救亡所需新文化運動》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獨立時論社》에 참여하여 많은 정론 관련 글을 썼으며, 전국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후 사회당을 창립하기도 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기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世界植物地理》(역서), 《種子植物分分類學講義》, 《經濟植物學》, 《經濟植物學手册》, 《國産牧草植物》(공저) 등이 있다.

 

 

3. 루쉰(魯迅, 1881-1936)

 

저쟝(浙江) 사오싱부 회계현(紹興府會稽縣) 출생. 문학가. 사상가.

 

원래 이름은 저우장서우(周樟壽)이고, 1898年 저우수런(周樹人)으로 개명하였다. 필명인 루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청년 시기 진화론과 니체의 초인철학, 그리고 톨스토이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02년 일본 관비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도쿄 홍문학원에서 학습하였다. 1904년 초 센다이(仙台) 의과 전문 학원으로 옮겨 학업을 지속하다, 이후 중국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기를 희망하며 문예 창작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잡문, 단편 소설, 평론, 산문, 번역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장빙린(章炳麟)에게 배웠으며, 광복회의 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05년부터 1907년까지 혁명 활동에 참가하였고, 《摩羅詩力說》, 《文化偏至論》 등을 발표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남경임시정부와 북양정부 교육부 부원을 맡기도 하였고, 베이징대학과 여자사범대학 등에서 강의를 담당하였다. 1918년 5월 처음으로 루쉰을 필명으로 사용해 중국 현대 문학사상 첫 번째 백화문 소설인 《狂人日記》를 발표하였으며, 신문학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5․4운동을 전후하여 《新青年》 잡지 관련 업무에도 참여하여 신문화 운동의 주요한 인물이 되었다. 1926년 베이징 학생애국운동을 지지함으로 인해 북양군벌정부에 의해 지명 수배령을 받고 남하해서 사먼대학(厦門大學) 중문과 주임을 맡았다. 1927년에는 상하이로 가서 학생인 수광핑(許廣平)과 동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0년 중국자유운동 대동맹, 좌익작가연맹, 민권보장동맹에 참가하여 국민당의 독재 정치와 정치적인 박해를 반대하였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역사 소설집인 《故事新編》의 대부분을 썼고, 많은 잡문들을 서술하면서 동시에 신진 청년 작가 배양에도 적극적이었다.

1921년 발표된 《阿Q正傳》는 중국 근대 문학의 기초가 되었고, ‘잡감(雜感)’이라고 불리는 예리한 사회문화 비평을 발표하였다. 그는 봉건적인 가족제도와 예교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여성 해방도 지지하였고, 중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 즉 공론(空論)을 비판하였다. 그는 《未名社》, 《朝花社》 등 문학 단체를 지지하였으며, 《國民新報副刊》, 《莽原》, 《語絲》, 《奔流》, 《萌芽》, 《譯文》 등의 문예 잡지에서 주편을 맡았다. 이외에 외국의 진보적인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고 국내외의 유명한 회화와 목각을 소개하였으며, 고전 문학 작품들도 수집, 연구, 정리하였다.

주요 작품과 저서로서 《呐喊》, 《彷徨》, 《故事新編》, 《狂人日記》, 《朝花夕拾》, 《中國小說史略》, 《漢文學史綱要》 등이 있다.

 

 

4. 저우쭤런(周作人, 1885-1967)

 

저쟝(浙江) 사오싱(紹興) 출생. 문학자. 평론가. 시인. 사상가.

 

루쉰(魯迅)의 동생이고, 저우졘런(周建人)의 형이다. 난징(南京)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을 졸업한 후에 1906년 리쿄대학(立敎大學)에서 영문학과 그리스어 등을 배웠고, 루쉰과 수서우창(許壽裳), 쳰쉬안퉁(錢玄同) 등과 함께 장빙린(章炳麟)에게 《說文解字》를 배웠다. 루쉰과 함께 유럽 근대 문학을 번역하였다.

1912년 귀국하여 저장성에서 영어 교육에 종사하였고, 1918년 베이징대학(北京大學) 문과 교수가 되어 그리스로마 문학사, 유럽 문학사, 근대 산문 등을 강의하였고, 동방어언문학과 주임, 옌징대학 신문학과 주임, 객좌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新青年》에 글을 발표하는 등 신문화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新潮社》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백화문을 주장 외에도 중국 전통 문학의 비인간성을 비난하며 휴머니즘 문학을 주장하였다. 《人的文學》, 《思想革命》 등 평론을 서술하였다. 1919년 중화민국교육부 국어통일준비회 회원이었고, 마위짜오(馬裕藻), 주시쭈(朱希祖), 쳰쉬안퉁, 루쉰 등과 함께 《請颁行新式標點符號議案》을 연명으로 제출하고 전국에 발표하였다.

5·4운동 이후, 정전둬(鄭振鐸), 선야오빙(沈雁冰)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고, 루쉰, 린위탕(林語堂) 등과 《語絲》 주간 창립하여 주편을 맡아 많은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그리스 문학 및 일본 문학에 대한 번역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왕징웨이 정권 당시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을 맡아 일본인과 문화적으로 연계했다는 이유로 난징 고등법원에서 한간으로 판결을 받고, 1949년 1월 석방되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 다시 박해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서 《歐洲文學史》, 《近代歐洲文學史》, 《中國新文學的源流》, 《魯迅小說里的人物》, 《魯迅的青年時代》, 《知堂回想錄》, 《周作人書信》, 《周作人散文全集》, 《周作人文類編》, 《周作人自編文集》 등이 있다.

 

 

5. 후스(胡適, 1891-1962)

 

안후이(安徽) 지시현(績溪縣) 출생. 철학자. 문학가. 시인.

 

신문화 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명이다. 미국 유학 시기, 듀이에게 배웠다. 5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숙에서 9년 동안 교육을 받아 고문 관련 기본 지식을 익혔다. 상하이 매계학당(梅溪學堂)과 징충학당(澄衷學堂)에서 학습하면서 서구의 사상과 문화를 접촉하였고, 량치차오와 옌푸(嚴復)의 영향을 받았다. 1904년 상하이 신식학교에서 《天演論》 등의 신사조를 접하며 《競業旬報》에 백화문으로 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중국공학에 입학하였으며, 1910년대 초 제2기 관비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였다. 코넬대학 농과에서 학습하다 이후 문과로 전과하였다. 1915년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듀이의 지도하에 실용주의 철학을 배우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7년 귀국 이후 베이징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新青年》 편집부에서 일을 하며 문학의 개량과 백화 문학을 보급을 주도하였으며, 《新青年》에 《文學改良芻議》를 발표해 문언문 대신 백화문 사용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嘗試集》은 중국에서 출판된 최초의 백화문 시집이었다.

5․4운동 시기 리다자오(李大釗) 등과 ‘문제’와 ‘주의’ 논쟁을 전개하였고, 장준마이(張君勱) 등과는 ‘과학’과 ‘현학’ 논쟁을 진행하였다. 1920년대부터 중국 고전 소설의 연구에 종사하며, 상하이에서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고, 이후 상하이공학 교장도 역임하였다. 중일전쟁 초기 국민당 국방참의회 참의원을 맡았고, 1938년에는 주미 대사로서 외교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46년 베이징대학 총장에 부임하였지만, 1949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水經注》의 고증에 전력하였으며, 이후 타이완에 정착하였다. 1954년 타이완 광복대륙설계위원회의 부주임 위원을 맡았고, 1957년에는 타이완 중화민국중앙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4년부터 1955년까지 각 분야에서 그에 대한 대규모적인 비판 운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사망 후 타이완에서는 《胡適選集》, 《胡適手稿》등이 출간되었고, 본토에서는 《胡適往来書信選》, 《胡適書評序跋集》, 《胡適文集》 등이 편찬되었다.

 

 

6. 류반눙(劉半農, 1891-1934)

 

쟝쑤(江蘇) 쟝인(江陰) 출생. 문학자. 언어학자. 교육자.

 

5․4운동 시기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중국 언어 및 촬영 이론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인 《漢語字聲實驗錄》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프랑스 콘스탄틴언어학전장(康士坦丁語言學專獎)을 획득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한 뒤, 그는 상주부(常州府) 중학당의 졸업을 1년 남겨두고 보수적 교육 체제에 불만을 가진 채, 1912년 상해로 가서 시사신보와 중화서국에서 편집을 맡았다. 이후 《小說月報》, 《時事新報》, 《中華小說界》, 《禮拜六》에 소설과 번역 작품들을 발표하며, 상해 문단에서 신예로 촉망 받는 문인이 되었다. 그는 《新青年》의 주편이었던 천두슈(陳獨秀)의 추천으로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초청을 받음으로써, 1917년 베이징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新青年》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新青年》에서 후스의 《文學改良芻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이후 적극적으로 신문화 운동에 참가하여 백화문을 제창하였다. 1918년 1월 《新青年》에 반농(半農)이라는 필명으로 《應用文之教授》를 발표하였다. 차이위안페이의 추천으로 영국 유학 시험 장학생으로서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향했다. 1920년 영국 런던대학 대학원에서 실험 언어음성학을 전공하였고, 1921년 여름 프랑스 파리대학으로 옮겨 연구를 지속하다 1925년에 프랑스 국가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0년과 1921년 차이위안페이의 유럽 및 미국 소재 중국 서북 지역 문물 조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프랑스 유학 기간 동안 종종 프랑스 국가도서관을 찾아가 그 곳에 소장된 돈황 문헌 104건을 필사하였고, 1925년 귀국 후 《敦煌掇瑣》로 출간하였다. 이후 베이징대학 국문과 교수에 부임하여 언어음성학을 강의하였으며, 차이위안페이의 지원으로 중국에서 처음으로 언어음성학 실험실을 설립하였다.

그는 서북 지역 문물 보호 작업에 계속 종사하였고, 1927년에는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등이 참여하여 결성한 중국학술단체협회 창립에 기여하였으며, 국내의 고물, 고적, 미술품, 그리고 과학적으로 중요한 자료 보호와 관련된 규정을 만드는데 참여하였다. 1926년 말 스웨덴과 중국이 연합하여 제5차 서북 지역의 중앙아시아 답사를 진행할 때, 그는 중국학술단체협회가 주도하여 스웨덴과 담판을 벌여 다음 해 베이징대학 연구소 국학문에서 서명한 연합 규정에 의거하도록 노력하였다. 이후 서북과학고찰단 이사회 상무이사 및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외에 그의 신시는 통속적인 언어를 통해 노동자들의 생활과 질곡들을 묘사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初期白話詩稿》(주편), 《中國文法通論》, 《四聲實驗錄》, 《法國短篇小說集》(역서), 《揚鞭集》(시집), 《瓦釜集》(시집), 《半農雜文》 등이 있다.

 

 

7. 장쥔마이(張君勱, 1887-1969)

 

쟝쑤 쟈딩현(嘉定縣) 출생. 정치가. 철학자. 중국 민주사회당 지도자.

 

12세에 상하이 강남제조국 광방언관에 합격하고, 16세인 1902년에는 수재가 되었으며, 190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0년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 학사로서 졸업하였다. 귀국한 뒤 한림원 서길사(翰林院 庶吉士)가 되었다. 이후 량치차오의 도움으로 소련을 거쳐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유학하고, 정치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량치차오(梁啓超)와 스승과 친구 관계로 교류하였고, 이후 량치차오가 조직한 정문사(政聞社)에 참여하였다. 1917년 이후 유심론 철학을 연구하다, 1918년 량치차오를 따라 유럽 시찰을 갔고, 독일에서 오이켄(Eucken)에게 철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정치대학(政治大學), 학해서원, 민족문화서원을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베이징대학과 옌징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23년 《인생관 논전》과 《文化宣言》의 발기인으로 활동하며 딩원쟝(丁文江),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와 논쟁을 벌였다. 《人生觀》, 《民族復興之學術基捶》, 《明日之中國文化》, 《新儒家思想史》 등의 저서를 통해 현대 신유가 사상가로 인정받았다.

5·4운동 이후, 중국 지식계는 덕(德, 민주)과 새(賽,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장쥔마이는 1923년 우원짜오(吳文藻)의 초청으로 칭화대학 유학준비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였는데, 이 강연은 뜻하지않게 중국 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 강연의 주제는 오이켄을 중심으로 한 《大思想家的人生觀》였는데, 주요 내용은 과학은 결코 만능이 아니고, 천하의 모은 일이 과학적 인과 법칙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강연은 《清華周刊》 제272기에 실렸는데, 그 내용들은 당시 중국 내 민주 및 과학에 대한 객관적 흐름과 부합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였던 딩원쟝은 그 글을 읽고 분노하여 《努力周報》에 《玄学與科學—評張君勱的“人生觀”》과 《玄學與科學—答張君勱》를 발표하였는데, 그는 현학과 달리 과학적 방법은 만능이며 만약 과학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이는 정치가와 교육자로부터 유발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후 현학의 정신은 장쥔마이의 신상에 덧붙여져, 그는 현학귀(玄學鬼)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동방문화가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논리로 딩원쟝에 반박하였고, 점차 논쟁의 범위가 확대되며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며 이는 과현논전 혹은 인생관논전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양 측 입장은 점차 극단화되어 어느 쪽도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이 논쟁으로 장쥔마이는 사상 및 정치적 입장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바오산현(寶山縣) 의회 의장을 맡았고, 탕화룽(湯化龍) 등과 공화건설토론회를 조직, 이후 민주당으로 전환시켰다. 1916년 독일에서 귀국한 후, 《時事新報》의 총편집자가 되었고, 돤치루이(段祺瑞) 내각의 국제정무평의회 서기장과 펑궈장(馮國璋) 총통부의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1933년 장둥쑨(張東蓀)과 국가사회당을 조직, 중앙 총무위원 겸 총비서를 맡았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국민참정회 참정원으로 활동하며 황옌페이(黃炎培) 등과 중국민주동맹을 조직하였다. 또한 천부레이(陳布雷)와 민족문화학원을 창립하여 원장을 맡았다. 항전 승리 후, 국가사회당과 민주당을 결합하여 중국민주사회당을 창립주석에 선출되었고, 국민당 업무에도 관여하였다. 1946년 정치협상회의의 대표가 되었고 중국민주동맹을 조직하였다. 1947년 《中華民國憲法》 제정을 위한 기초 작업을 주관하고, 쑨원(孫文)의 오권(五權)헌법을 토대로 내각제의 오원제로 변경하여 쟝졔스(蔣介石)의 권력 제한하에 노력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에 반대했지만, 쟝졔스가 헌법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 또한 비판하였다. 1949년 도미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西印哲學文集》, 《新儒家哲學發展史》, 《思想與社會序》, 《民族復興之學術基础》 등이 있다.

 

 

8. 숑스리(熊十力, 1885-1968)

 

후베이 황강현(黃岡縣) 출생. 철학자.

 

어린 나이인 14세에 종군하였고, 그 경험에 기반하여 1905년 후베이 육군특별소학당에 입학, 우창(武昌) 과학보습소에와 일지회(日知會) 등 반청 혁명 단체에 가입하였다. 무창기의 이후, 황저우(黄州)의 광복 활동에 참가하여 후베이군정부 참모를 맡았고, 1917년 광저우로 가서 쑨원(孫文)의 호법운동에도 참가하였다. 운동이 실패하자, 그는 철학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이후 우창문화대학, 톈진 난카이대학, 베이징대학, 저쟝대학에서 강의하며 연구하였다. 제1계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초청되어, 2계, 3계, 4계 위원에 선출되었지만, 이후 문화대혁명에 반대하여 단식을 통해 저항하다 사망하였다. 그의 학설은 철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大英百科全書》에는 그를 펑유란(馮友蘭)과 같이 중국 당대 철학의 걸출한 인물으로 소개되었다.

숑스리는 한 민족의 생존은 자기 철학과 문화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유가학설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물은 《讀經示要》로 출판되었다. 따라서 그는 후스 등의 전반서화(全盤西化) 주장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성현들이 남긴 경전에 전념하기보다 전통 유학에 대해 철저한 비판과 성찰을 시도하여 유학 및 불교 등의 사상을 융합하여 중국화된 철학을 창조하기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그의 주요 철학 저서는 중국철학회 중국철학총서갑집의 제1부로 《新唯識論》을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十力語要》 및 《十力語要初續》와 함께 그가 추구한 신유가 철학의 요체를 담고 있다.

1949년 10월 옛 친구였던 둥비우(董必武)와 궈모뤄(郭沫若)의 초청에 따라 1950년 3월부터 베이징에서 활동하였고, 그 곳에서 옛 친구인 량수밍(梁漱溟), 린짜이핑(林平), 장선푸(張申府), 허린(賀麟) 등과 교류를 하였다. 이후 다시 연구 및 저술에 전념하면서 신중국의 문화 건설에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둥비우 등 중공 인사들과 여러 차례 담화를 가지기도 하였다. 1954년 북방의 차갑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그는 다시 상하이로 이전하여 활동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新唯識論》, 《原儒》, 《體用論》, 《明心篇》, 《佛教名相通釋》, 《乾坤衍》 등이 있다.

 

 

9. 량수밍(梁漱溟, 1893-1988)

 

베이징 출생. 몽고족. 사상가. 철학자. 국학대사.

 

현대 신유가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이면서 중국 최후의 유가사상가라고도 불려진다. 어려서부터 부친 량지(梁濟) 영향을 받았고, 청년 시기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의 개량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이후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유재산제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고, 1913년 《社會主義粹言》라는 소책자를 저술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불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순톈중학(順天中學)을 졸업하고 베이징 및 톈진 동맹회 기관보인 《民國報》의 편집 겸 기자로 활동하였다. 1916년 남북통일내각 사법총장 비서를 맡았고, 1917년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초청으로 베이징대학 인도 철학과에서 강의하였다. 1921년 신유교적 입장에서 《東西文化及其哲學》을 출판했다. 1924년 산둥 차오저우중학(曹州中學) 고중부를 주관하였다. 1931년 량중화(梁仲華) 등과 함께 쩌우핑(鄒平)에서 산동향촌건설연구원을 창립해 연구부 주임 및 원장을 담당하였고 이후 향촌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국방참의회 참의원 및 국민참정회 참정원을 역임하였다. 1939년 통일건국동지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1941년 황옌페이(黃炎培), 장쥔마이 등과 상의해 중국민주정단동맹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그는 중앙상무위원 자격으로 홍콩에서 기관보인 《光明報》를 창간하여 이후 사장이 되었다. 홍콩 점령 이후, 공산당의 도움으로 구이린(桂林)으로 철수하여 서남민맹을 주관하였다. 1946년 민맹의 대표로서 정협회의에 참가하여 1938년에 이어 다시 옌안을 방문하였으며, 민맹 비서장으로서 국공간의 제 3자적 조정 역할에 종사하였다. 1947년 민맹 탈퇴 이후 인문학원(仁文學院)을 창립해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신중국 성립 이후 1950년 베이징으로 와서 제1, 2, 3, 4계 전국정협위원, 제5, 6계 전국정협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55년 정부의 농업협동화 정책에 반대하다가 1956년 비판을 받았다. 1980년 다시 학술적 복권이 이루어져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수개위원회 위원, 중국공자연구회 고문, 중국문화서원 원무위원회 주석, 중국문화서원발전기금회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작으로 《東西文化及其哲學》, 《印度哲學概論》, 《鄕村建設論文集》, 《中國民族自救運動之最後覺悟》, 《鄕村建設理論》, 《我的自學小史》, 《中國文化要義》, 《人心與人生》,《我的努力和反省》 등이 있다.

 

 

10. 펑유란(馮友蘭, 1895-1990)

 

허난(河南) 난양탕허(南陽唐河) 출생. 철학자.

 

1915년 베이징대학에 입학 이후 1919년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유학하며 베르그송, 듀이, 러셀 등의 저서를 탐독하였고, 1924년 콜롬비아대학교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귀국 이후 중저우대학(현 허난대학), 광둥대학, 옌징대학 교수, 칭화대학 문학원, 시난연합대학 철학과,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33년에는 영국의 초청을 받아, 영국 각 대학에서 중국 철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중국인 최초로 《중국철학사》를 출간하였다. 1939년 발표한 《新理學》에서는 송학(宋學)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특히 송과 명 시기 이학(理學)을 현대 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송학의 인성설(人性說)에 근거하여 사유하였다. 당시 대학에서는 주로 듀이, 러셀, 베르그송, 칸트 등 서양 철학이 범람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를 동양 철학과 종합하여 중국 철학의 주체성 회복을 시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향하였다. 196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의 관점에서 《중국철학사신론》을 새롭게 저술해 발간했으며, 철학 유산의 계승 문제 등에 대해 논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그의 철학사 연구는 지주 계급과 봉건 제도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민주동맹 대표), 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등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人生的境界》, 《我所認識的蔡孑民先生》은 중학교 교재로도 사용된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中國哲學簡史》, 《三松堂自序》, 《人生的境界》, 《新理學》, 《新事論》, 《新事訓》, 《新原人》, 《新原道》, 《新知言》 등이 있다.

 

 

11. 머우쭝싼(牟宗三, 1909-1995)

 

산둥 치샤(栖霞) 출생. 철학자. 철학사가.

 

현대 신유가의 대표적 인물 및 집대성자이다. 1927년 베이징대학 예과 입학, 2년 후 철학을 전공하였다. 1933년 졸업 이후, 화시대학, 중산대학, 진링대학(金陵大學), 저쟝대학(浙江大學) 등에서 주로 논리학과 서양 철학을 강의하였고, 1949년 타이완으로 옮겨 타이베이사범대학, 둥하이대학에서 논리학과 중국 철학 등을 강의하였다. 1958년 탕준이(唐君毅), 수푸관(徐復觀), 장준마이(張君勱)와 연명으로 현대 신유가를 연구한 《爲中國文化敬告世界人士宣言》을 발표하였다. 1960년 홍콩으로 가서 홍콩대학, 홍콩중문대학 신아서원(新亞書院)에서 중국 철학, 칸트 철학 등을 강의하였다. 1974년 퇴직 이후, 신아연구소 교수에 부임하였고, 1976년 타이완 교육부에서 객좌교수로 초청해 타이완대학 철학연구소 등에서 강의하였다. 1987년 홍콩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그는 슝스리(熊十力)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철학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중서 및 고금을 융합해 중국 유학을 창조적, 체계적으로 수립해 도덕적 형이상학을 재건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유가 철학과 칸트 철학을 융합하려기 위해 노력하였다. 펑유란(馮友蘭)이 중국 유학을 논리적으로 건립했다면, 그는 철학적으로 성립시켰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는 과학 문명이 주도하는 서양 문화는 인류에게 복음을 가져올 수 없고 재난을 가져오므로, 유학이 부흥하고 중국 문화가 재건되기를 바라면 학통과 도통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邏輯曲範》, 《理性的理想主義》, 《歷史哲學》, 《佛性與般若》, 《才性與玄理》, 《康德的道德哲學》(역서) 등이 있다.

 

 

12. 딩원쟝(丁文江, 1887-1936)

 

쟝쑤(江蘇) 타이싱현(泰興縣) 출생. 지질학자. 지질 교육자. 과현 논전의 발기자이다.

 

중국 지질 사업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1902년 15세에 일본으로 유학, 1904년 영국으로 건너 가 1906년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수학, 1907년부터 1911년까지 글래스고우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에서 동물학과 지질학을 전공하였다.

1911년 귀국 이후, 윈난성과 구이저우성 등에서 지질 광산을 조사하였다. 중국에서 첫 번째 지질조사소를 창립하였으며, 초기 지질 조사와 과학적인 연구를 주도하였다. 지질조사소에 중국 신생대, 지진, 토양, 연료 등의 연구실 건립을 추진하였다. 1929년 서남부 지역의 여러 성에서 지질 조사를 진행하는 책임을 맡았고, 지질조사소 신생대연구실 명예 주임이 되었다. 1931년 베이징대학 지질학과 교수에 부임하였다. 중국지질학회 창립 회원이고, 1923년에는 제2차 회장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1922년 후스(胡適) 등과 《努力周報》를 창립해 당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담론을 발표, 《少数人的責任》에서 정치의 개혁이 우리들의 유일한 의무이고, 그것은 실업 교육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중국 정치의 혼란은 국민이 유치하기 때문도, 정치가와 관료들이 부패했기 때문도, 군벌이 전횡하기 때문도 아니고, 소수인이 책임감도 없고 책임을 지는 능력도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주사변 발발 이후, 후스 등과 다시 《獨立評論》을 창립하여 편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어떠한 당파에 기울지 않고 독립되고 자유롭게 정치를 평론하기를 희망하였다. 《假如我是張學良》에서는 장학량을 위해 군사 작전을 짜고, 《假如我是蔣介石》에서는 쟝졔스에게 국민당 내부의 단결과 군사 지도자들과 연합 도모, 공산당과 휴전 협의, 그리고 협의의 조건을 항일 기간 내에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하는 것으로 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13. 왕싱궁(王星拱, 1888-1949)

 

안후이 화이닝현(懷寧縣) 출생. 화학자. 철학자. 교육가.

 

영국 런던대학 제국과학기술학원을 졸업하였다. 영국 유학 기간 쑨원(孫文)이 영도하는 반청 혁명 활동에 참가하였고, 1910년 중국 동맹회 유럽 지부에 가입하였다. 1916년 석사 학위를 획득하고 귀국한 후에 베이징대학 교수에 부임하였으며, 《新青年》 등에 과학 지식에 관한 글을 발표하면서 종교 및 미신을 반대하였다. 1925년 과학과 현학 논전 중에 과학이 만능이라고 주장하였다. 1929년 성립안후이대학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왕스졔(王世杰), 리쓰광(李四光) 등과 함께 국립 우한대학(武漢大學) 창립하는 책임을 맡았다. 우한대학 화학과 초대 과주임이었다. 1933년 우한대학 총장에 부임하였으며, 1945년 중산대학(中山大學) 총장을 맡았다. 1948년 3월 그는 사직하고 안칭(安慶)으로 갔다. 국민당 정부가 여러 차례 타이완으로 올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자연과학자로서 유물주의와 변증법 사상을 갖고 있었고, 철학자로서 제2대 실증주의 대표인 마허(馬赫)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학적으로 우주 사이에 초자연이 주재하는 역량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으나, 외부 물질 세계가 주관적인 나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과학의 구조가 우주 현상 중의 인과율의 기초가 되지만, 인과 관계는 자각에 의해서도 획득될 수 있으며, 모든 사물은 지(知)가 있어 사람의 인식은 미지에서 지(知)로 가는 과정이라고 인정하였다. 과학이 인생관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科學槪論》, 《科學與人生觀》, 《什么是科學方法》, 《哲學方法與科學方法》 등이 있다.

 

 

14. 탕위에(唐鉞, 1891-1987)

 

실험 심리학자. 심리학사가.

 

1911년 베이징 칭화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 졸업 이후, 미국 코넬대학교에 유학하여 심리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1917년 하버드대학 철학부 심리학과에서 수학 및 연구하여 1920년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21년 귀국 이후, 베이징대학 철학과와 칭화대학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상하이 상무인서관 편집부 철학교육조 조장, 중앙연구원 심리연구소 제1 소장, 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칭화대학, 베이징대학 심리학과 교수, 중국심리학회 베이징 분회 제1계 이사장, 제2-제6계 전국 정협위원 등을 맡았다.

그는 중국에서 심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서구에서 유명한 심리학과 철학에 관련된 저서를 많이 번역하였다. 《功用主義》(Mill,J.S.), 《道德形上学探本》(Kant,I.), 《心理學原理》(James,W.)등이다.

 

 

15. 등중하(鄧中夏, 1894-1933)

 

후난(湖南) 이장현(宜章縣) 출생. 혁명가.

 

1917년 베이징대학 중문과에 입학하여 1920년 졸업하고, 이후 철학과로 전과하여 수학하였다. 1919년 5․4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베이징학생연합회 총무 간사를 맡았다. 베이징대학 재학 시절 1919년 평민교육강연단을 조직하였고, 1920년 리다자오(李大釗)의 지도 하에 가오쥔위(高君宇) 등과 마르크스학설연구회를 창립하였다. 《中國青年》 잡지 창간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 베이징의 초기 공산당의 조직에 참여 핵심적인 간부가 되었다. 1922년 제2계 사회주의 청년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중앙국 임시 위원장, 중앙국 위원, 조직부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20년부터 그는 장기적으로 노동 운동에 종사하여 1922년 5월 광저우 제1차 전국노동대회에 참석하였고, 이후 중국노동조합 서기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중공 중앙 8·7회의(八七會議)에 참가하여 임시 중앙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모스크바로 가서 중공 중앙 6차 대표회의를 준비하고 출석하였으며, 공산국제 대표단의 임원과 중화전국총공회 적색직공 국제대표를 맡았다. 1930년 상하이로 돌아와 중앙 대표로 상악서(湘鄂西)의 근거지에서 활동, 상악서특위 서기, 홍군군단 정위, 전적위원회 서기,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여 무장 투쟁을 지도하였다. 1932년에는 상하이에서 비밀 투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1933년 5월 39세에 국민당에 체포되어 9월 난징 우화태(雨花臺)에서 처형되었다.

주요 저서로 《少年同學會改組委員會調査表》, 《省港罷工槪觀》, 《罷工與東徵》, 《烈士傳》, 《廖仲恺先生哀思錄》, 《鄧中夏文集》 등이 있다.

 

 

16.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

 

쟝쑤 창저우(常州) 출생. 문학가. 공산주의 혁명가와 이론선전가.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를 두 번이나 역임한 초기 주요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다. 상하이대학 교무장 겸 사회학과 주임을 역임하였다.

1917년 베이징대학에 입학하려고 희망하였으나 학비 부족 때문에 외교부의 러시아어 전수관에 입학해 러시아어를 학습하였다. 1919년 5·4운동 시기에 학생들의 거리 강연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당시 체포된 178명에 포함되었다. 이후 리다자오와 장쑹녠(張崧年)이 조직한 마르크스주의연구회에 가입하여, 1920년 《北京晨報》의 모스크바 주재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소련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표대회 및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중국 공산당 제3기 중앙 위원 겸 선전부 부부장,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후보 중앙집행위원(1924년), 공산당 제4기 중앙위원(1925년), 제5기 중앙 위원 및 정치국 위원(1926년)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 결렬 후에 중공 중앙의 8·7회의에 천두슈(陳獨秀)를 우경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고, 이후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그는 《中國革命中之爭論問題》에서 천두슈(陳獨秀), 펑수즈(彭述之)와 혁명의 주도권과 농민 관련 문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서술하였다. 1928년 중공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좌경 모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총서기직을 박탈당했다. 모스크바로 소환되었으나, 1930년 중국으로 다시 돌아와 중공 코민테른 주재 대표, 코민테른 집행 위원 등 중앙 지도부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조화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이후 1935년 국민당에 의해 푸졘(福建) 창팅현(長汀縣)에서 체포되어 36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주요 저서로서 《餓鄕紀程》, 《赤都心史》, 《多餘的話》, 《俄鄕紀程》, 《現實-馬克思主義文藝論文集》(편역) 등이 있다

 

 

17. 천두슈(陳獨秀, 1879-1942)

 

안후이(安徽) 화이닝(懷寧) 출생. 사상가, 혁명가, 정치가.

 

5·4운동과 신문화 운동의 지도자이자 중국 문화 계몽 운동의 선구자이다.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이고 초기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다.

1905년 반청 비밀 혁명 조직인 악왕회(岳王会)를 조직해 총회장을 맡았다. 1907년에는 일본으로 가서 도쿄 소재 영어 학교에 다니다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다. 귀국 이후, 1909년 저쟝성 육군학당에서 강의하였고, 1911년 신해혁명 직후 안후이 도독부 비서장을 담당하였다. 1913년 위안스카이를 토벌하는 제2차 혁명에 참가했다가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14년 일본으로 가서 장스자오(章士釗)를 도와 《甲寅》을 창립하였다. 1915년 상하이에서 《青年》(이후 《新青年》으로 변경)을 창간하고 주편을 맡았다. 1917년 초에 베이징대학 문과 학장으로 초빙을 받았고, 후스(胡適)와 함께 백화문(白話文)을 제창하며 유교 사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8년 리다자오(李大釗) 등과 《每周評論》을 창간하였다. 이때 그는 《新青年》과 《每周評論》에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봉건적인 사상, 문화, 예교, 유교 등을 반대하면서 문화 혁명을 주장하였다. 1917년 2월 《新青年》에 발표했던 ‘문화혁명론’은 귀족, 고전, 산림(山林)문학 대신에 사실적, 사회적인 문학에 의한 합리주의를 주장하면서 진화론과 자연과학을 강조하였다.

1919년 5·4운동 후기에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초에 상하이로 가서 공산국제의 도움 하에 각 지역의 혁신적인 인물들과 연계해 공산당 조직을 성립시켰다. 1921년 상하이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비록 출석하지 못했으나, 중앙국 서기로 선출되었다. 그는 중공 중앙 위원, 중앙국 서기, 중앙국 집행위원회 위원장, 중앙위원회 총서기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한 후에 국민당과 합작을 진행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 결렬 이후 중앙 정치국을 개조하면서 ‘우경 기회주의자로’로 비난을 받고 중앙 지도부에서 물러났다. 1929년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에 ‘당 동지들에게 고하는 글(告全黨同志書)’을 발표해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지도와 중공 중앙의 오류를 비판하였으며, 마오쩌둥의 농촌 중심의 조직 강화를 반대하였다. 그의 트로츠키적 입장은 이후 비난받았다. 1932년 상하이에서 국민당에 의해 체포되어 난징에서 투옥되었다. 1937년 8월 출옥하였고, 우한, 충칭, 쓰촨 쟝진(江津) 등지를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주요 저서로서 《獨秀文存》, 《陳獨秀文章選編》, 《題西鄕南洲游猎圖》 등이 있다.

 

 

 

18. 우즈후이(吳稚暉, 1865-1953)

 

쟝쑤(江蘇) 우진현(武進縣) 출생. 정치가. 서법가. 교육자.

 

1894년 쑤저우 자양서원(紫陽書院)에 입학하였다. 1898년 상하이 난양공학(현 상하이교통대학, 시안교통대학)에서 강의하였다. 1901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02년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과 애국학사를 창립하였고, 학감 겸 국문 교사를 맡았다. 그는 당시 혁명 사상에 심취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후 청조의 명령으로 상하이 공공조계 공부국(工部局)의 체포 압박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영국으로 도피 유학을 떠났다. 1905년 쑨훙저(孫鴻哲)의 소개로 런던에서 쑨원(孫文)과 만나 삼민주의를 듣고,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06년 프랑스에서 장징쟝(張靜江)과 리위잉(李煜瀛) 등과 세계사(世界社)를 창립하고, 《新世紀》 주간을 발간하였다.

1911년 이후, 국어주음과 국어운동을 제창하는 등 문화 운동에 종사하였고, 1915년 프랑스에서 근공검학회(勤工儉學會)를 조직 모임에 참가하였다. 1916년 상하이에서 《中華新報》 주필을 맡았으며, 《補救中國文字之方法》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18년 교육부에서 정식으로 주음자모를 공포하였다. 1918년에는 탕산철도광산학교(唐山路礦學校, 당산교통대학, 현 시난교통대학)에서 국문 교사를 맡았다. 1919년 리스쩡(李石曾)과 근공검학회를 조직하였고, 리양중파대학(里昻中法大學)을 창립해 프랑스 유학을 위한 근공검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중파대학 총장에 부임하였으며,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차이위안페이(蔡元培)와 공동으로 베이징세계어전문학교를 건립해 적극적으로 주음식자운동을 주도하였다. 1924년 국민당 중앙 감찰위원, 국민정부 위원 등을 맡았고, 1927년 쟝졔스(蔣介石)의 반공청당 활동을 지지하였다. 그는 중공이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중국의 미래와 발전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1930년대 중국에서 과학 과정을 중요하게 교육하는 학교가 적다고 평가하였다. 1949년 타이베이로 옮겨갔다.

 

 

19. 장둥쑨(張東蓀, 1886-1973)

 

저쟝 항현(杭縣) 출생. 철학자. 정치가.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중국공학(中國公學) 대학부 학장, 정즈대학(政治大學), 광화대학(光華大學), 베이징대학, 옌징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어용 정당인 진보당에 참가하였다. 5․4운동 시기 북양군벌에 의존하여 연구계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그 기관지인 《時事新報》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1912년 남경임시정부 대총통부 비서를 맡았다. 1921년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 회의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신사상과 신문화를 소개한다는 기치 하에 량치차오 등과 길드사회주의를 선전하여 사회주의에 관한 논전을 일으켰다. 장준마이(張君勱)가 조직한 국가사회당에 가입하였으며, 《再生》을 출간해 국가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 《自由評論》을 편집하였으며, 쟝졔스(蔣介石)의 문화정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41년 중국민주정단동맹에 참가하여 화북지부 위원, 주임 위원을 맡았다. 1944년 9월 개조된 중국민주동맹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6년 민맹 대표 중의 한 명으로 충칭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였다. 1946년 국가사회당과 민헌정당이 연합하여 중국민주사회당을 조직하였으며, 그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쟝졔스의 독재를 반대하고 중간 노선을 주장하였다. 1948년 베이핑 평화 해결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전국 정협위원, 정무원 문화교육위원, 민맹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1년 미국 스파이로 몰려 투옥되었다.

제1차 과현 논쟁, 즉 인생관 논쟁에서 당시 구미로 유학한 지식인들은 중국이 부강해지려면 중국 문화에 부족한 과학 정신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19년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인 존 듀이가 중국에 와서 중국 문화의 단점으로 과학이 사회의 근본 문화와 분리되어 있고, 중국 지식인들이 서구 근대과학의 관념을 개인의 도덕, 인생관, 민족 정신 등 모든 문화 영역으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연한 뒤 강화되었다. 이에 1923년 2월 장둥쑨은 칭화대학에서 과학이 인생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므로, 과학의 한계점을 알고 과학과 인생관을 구별해야 하며, 인생관 문제는 인류 그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인생관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은 과학주의자 딩원쟝(丁文江, 지질학)의 격렬한 반격을 받았다. 딩원쟝은 중국의 출로는 과학 이성의 방법으로써 중국 문제를 연구하는 것에 달려 있고, 과학은 인생관에 최대의 장애인 개인 주관의 선입관에 대한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유럽 문화의 파산 원인은 과학에 있지 않고 정치가와 교육자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1923년 《勞而無功》에 과학적 인생관을 비판하였고, 《科學與哲學》에도 과학적 철학은 진정한 철학이 아니라는 글을 썼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중국에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데에 대해서는 《大公報》에서 간행하는 《現代思潮》에 《我亦談談辨證法的唯物論》을 서술해 1930년대 유물변증법 논쟁(철학논쟁)을 일으켰다. 2년여 정도 지속된 이 논쟁에서 그는 유물변증법을 비판하는 글을 서술하였다.

 

 

20. 린짜이핑(林宰平, 1879-1960)

 

푸졘(福建) 민허우(閩侯)인. 철학자. 불학자, 서법가. 국학대사.

 

법률학, 국학, 철학, 불학, 시사, 서화에도 정통하였고, 사회와 문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동경제국대학으로 유학하여 법정과 경제학을 학습하였고, 선쥔루(沈鈞儒), 천쭝판(陳宗蕃)과 같은 과였으며 함께 거주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베이징대학 철학과와 경제학과 강사로 민법요론 등을 강의하였다. 1927년에는 칭화국학연구원의 초청을 받아 인생철학, 중국정치사상사 등을 강의하였다. 1932년에는 칭화대학에서 철학과 강사로 중국철학문제 등을 강의하였다.

그는 사상 및 정치적으로 량치차오, 차이어(蔡鍔)에 가까왔고, 청말민국 초기 왕카이윈(王闓運), 린친난(林琴南), 량치차오 등과도 자주 시를 지으며 술을 마셨다. 1910년 상지학회(尙志學會)의 성립을 주관하였다. 이 학회는 학술과 사회 사업에 관련된 개혁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으며, 법정, 직업, 보통 학교, 의원, 문화 사업의 영역에서 40여 종의 과학 서적을 편역, 출간하였다. 차이어를 기념하는 송파도서관(松坡圖書館)의 설립에도 참가하였고, 1927년 불학 관련 조직인 삼시학회(三時學會)에도 참여하였다. 량치차오의 사망 이후, 그의 가족들의 초청으로 1932년 《飮冰室合集》을 편집, 주관하여 상하이 중화서국에서 출간하였다. 이외에 슝스리(熊十力) 및 량수밍(梁漱溟)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주요 저술로서 《帖考》, 《林宰平先生書畵集》, 《北雲集》(시집) 등이 있다.

 

 

21. 쑨푸위안(孫伏園, 1894-1966)

 

저쟝 사오싱(紹興) 출생. 현대 산문작가.

 

1918년 저우쭤런(周作人)의 소개로 동생 쑨푸시(孫福熙)와 함께 베이징대학에서 청강하다, 2년째에 정식 학생이 되었다. 루쉰(魯迅)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때 문학 단체인 신조사(新潮社)에 가입하였다. 1912년 베이징 《晨報》 부간편집(副刊編輯)을 맡았고, 1920년 마오둔(茅盾), 정전둬(鄭振鐸) 등과 공동으로 문학 단체인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 베이징대학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晨報》의 부간편집 일을 하였다. 루쉰의 《阿Q正傳》이 첫 회에 발표되었고, 빙신(冰心)의 《寄小讀者》, 저우쭤런의 《自己的園地》 등 많은 작품들이 실렸다. 서구 문화와 과학 저서, 역서들도 소개되어 실제로 신문화 운동의 선전지 역할을 하였다. 1924년 《晨報》의 부간편집을 그만두었고, 1925년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하였다. 1926년 사먼대학(廈門大學) 문학원 원장인 린위탕(林語堂)의 초청으로 국학원 편집부 간사 겸 (南普陀寺) 부설 남불학원(南佛學院)에서 교직을 담당하였다. 이 학교에서 강의하던 루쉰과도 계속 교류하였다. 《京報》 부간 주편과, 《中央日報》 부간 편집(1927년), 《當代》 주편(1928년) 등을 담당하였고, 전후로 6개의 신문과 잡지의 주편과 편집을 맡아 ‘부간대왕’이라고도 불렸다. 상하이에서 앵앵서옥(嚶嚶書屋)을 창립해 《貢獻》 반월간을 출간하였다. 프랑스로 가서 유학하였고, 1931년 귀국하였다. 중일전쟁 시기 충칭 중외출판사 사장을 맡았으며, 중화전국문예계 항적협회 이사,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설계위원 겸 《士兵月報》사 사장, 치루대학(齊魯大學) 국문과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청두에 가서 화시대학과 명현학원(銘賢學院)에서 강의하였으며, 청두 《新民報》의 주편을 담당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정무원 출판총서 판본도서관 관장에 임명되었다.

주요 저술로서 《伏園游記》, 《魯迅先生二三事》 등이 있다.

 

 

22. 주징눙(朱經農, 1887-1951)

 

저쟝 푸쟝(浦江) 출생. 교육자. 대학 총장, 시인.

 

1905년 동맹회에 가입하여 혁명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1912년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1904년 일본으로 유학하였고, 1905년 상하이로 귀국하여 중국공학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10년 후난고등실업학당의 초청을 받아 영문 교수 겸 농업학 통역을 맡았다. 1916년 미국 워싱턴대학으로 유학했다가 다시 콜롬비아대학 사범학원으로 옮겨 교육학을 학습하였고,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21년 귀국 이후, 베이징대학 교육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3년 상무인서관 편집을 담당하였다. 1925년 장서우융(張壽鏞) 교장이 광화대학(光華大學)을 창립하는 것을 도왔고, 부교장, 교무장을 맡아 교무를 주관하였다. 이후 그는 광화대학의 이사가 되었다. 그는 학술의 자유를 존중하고 제창하였다. 1930년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국민정부 교육부장일 때 상무차장을 담당하였고, 치루대학(齊魯大學) 총장, 후난성 교육청장, 중양대학 교육장, 국민정부 교육부 정무차장, 광화대학 총장, 상무인서관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국제연합 문교회의 중국 수석 대표를 맡았으며, 이후 미국에 머물렀다.

1923년 상하이 상무인서관에서 중소학 교과서를 주편하였고, 타오싱즈(陶行知)와 함께 중국에서 첫 번째 《平民千字課本》을 공저하였다. 주치후이(朱其慧), 옌양추(晏陽初), 타오싱즈, 황옌페이(黄炎培) 등과 중화평민교육촉진회를 조직하였으며, 이 촉진회가 《平民千字課本》을 교재로 채택하여 농촌에서 좋은 효과를 얻었다. 1932년부터 43년까지 후난성 교육청장으로서 소학 의무 교육과 소학, 중학, 전문학교의 창립 및 증설을 추진하여 후난성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1923년 아동도서관(亞東圖書館)이 과학과 인생관 논전에 관한 글을 모아 《科學與人生觀》으로 출간하였고, 이 논전은 1924년 말까지 계속 되었다.

주요 저술로서 《明日之學校》(존 듀이 저, 역서), 《教育大辭書》, 《現代教育思想》, 《教育思想》 등이 있다.

 

 

23. 루즈웨이(陸志韋, 1894-1970)

 

저쟝 우싱현(吳興縣) 출생. 언어학자. 심리학자.

 

1913년 둥우대학(東吳大學)을 졸업하였다. 1915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20년 콜롬비아대학 심리학과를 졸업 및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귀국 이후, 난징고등사범학교(국립 둥난대학, 중양대학, 1949년 난징대학으로 변경) 심리학과 교수, 과주임을 역임하였다. 생리 심리학, 계통 심리학, 실험 심리학, 비교 심리학, 종교 심리학, 심리학사, 심리학 대강 등을 강의하였고, 중국에서 최초로 파블로프의 학설을 소개하였으며, 서양 현대 심리학의 이론과 방법을 가르쳤다. 1927년 옌징대학 심리학과 교수에 부임하였다. 1933년 시카고대학 생물학부 심리학과에서 연수하였으며, 1934년 귀국하여 옌징대학 총장을 맡았다. 중일전쟁 시기 학생들의 항일 활동을 지지하다가 1941년 투옥되었다. 항전 승리 이후, 옌징대학의 복교 관련 활동을 주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옌징대학 관련 업무를 주도하였고, 1952년 고등원교 원계 조정 이후 중국과학원(현 중국사회과학원) 어언연구소에서 언어학 연구를 하였고, 1급 연구원과 철학사회과학부 위원을 담당하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계 전국위원회 위원, 중국과학원 심리연구소 준비위원회 주임, 한어병음방안위원회 위원, 중국문자개혁위원회 위원, 중국어문잡지사 편집위원, 어언연구소 한어사연구조 조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성과로서 《漢語构詞法》, 《北京話单音詞詞匯》, 《陸志韋近代漢語音韵論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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