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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문학가의 지역별 분포
자료출처: 梅新林, 『中國文學地理形態與演變』(復旦大學出版社, 2006)
위 지도는 『中國文學地理形態與演變』(106, 122쪽)의 자료를 토대로 송대 문학가의 지역별 분포를 그린 것이다.
‘北宋·遼/南宋·金著名文學家籍貫地域分布’는 탄정비(譚正璧)의 『중국문학가사전』과 쩡다싱(曾大興)의 『중국역대문학가의 지리분포』에 실린 양송요금시기 문학가 1,168명 가운데 출신지역이 명기된 1,079명에 대한 지역적 분포이다. 이를 북송·요와 남송·금으로 나눠 보면, 출신지역이 명기된 북송·요의 문학가는 385명이며 이중 북송이 364명, 요가 21명이다. 출신지역이 명기된 남송·금의 문학가는 695명이며 이중 남송이 502명, 금이 193명이다. 지도 상단의 표에 따라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북송·요의 385명 문학가의 지역적 분포를 보면, 하남(60명), 강서(45명), 강소·절강(각37명), 산동(34명), 복건·사천(각30명), 하북(23명), 안휘(20명), 섬서(18명), 호북(17명), 내몽고(13명), 산서(10명), 호남(6명), 요령·광동(각2명), 광서(1명)의 순이다.
남송·금의 695명 문학가의 지역적 분포를 보면, 절강(167명), 강서(111명), 복건(78명), 산서(49명), 강소(48명), 사천(47명), 하북(42명), 하남(39명), 안휘(35명), 산동(31명), 호남(11명), 섬서(10명), 내몽고(7명), 호북(4명), 천진·광동·요령(각3명), 흑룡강·감숙(각2명), 해남(1명)의 순이다.
북송 전, 만당(晩唐)의 문학가분포의 선두 5위는 섬서(51명)·절강(44명)·하북(39명)·하남·강소(각37명)이다. 북송·요와 비교해보면, 하남(60명)·절강·강소(37명)·하북(23명)은 여전히 선두를 유지한다. 그러나 하남은 북송에 이르러 더욱 증가하는 반면 섬서는 뒤로 밀려났다. 하남의 증가와 섬서의 감소는 북송이 수도를 하남 개봉으로 옮긴 것과 관련이 있다. 이전 한나라, 당나라 때에 도성의 소재지 장안, 낙양과 황하를 중심으로 분포한 점과 유사하다. 그리고 만당시기 강서(3명)·복건(5명)·사천(3명)이 북송에 이르러 각각 강서(45명)·복건(30명)·사천(30명)으로 현저하게 늘어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북송시기 강서 출신 구양수·왕안석·증공(曾鞏) 및 사천 출신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가 북송 문단의 영수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요의 문학가는 내몽고(13명), 하북(3명), 산동·요령(각3명) 등에 분포하였다.
북송 말년 정강(靖康)의 난과 이로 인해 많은 문학가들은 남쪽으로 이동한다. 남송에 이르러 문학중심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가져온다. 1127년 강왕(康王) 조구(趙構)는 남경에서 즉위하면서 남송을 건립한다. 1138년 남송 정부는 임안부(臨安府, 현 항주)로 천도를 한다. 1141년 금과 화의를 하고 1279년 원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153년을 유지하였다. 북송과 남송의 문학가분포는 모두 강서·강소·절강 세 지역이 공히 우세를 보이지만, 비교적 두드러진 차이는 북송에는 하남·산동 지역 등 북쪽지역이 우세했다면 남송에는 절강·복건 등 남쪽지역이 우세하다. 문학가의 활동이 북송에서는 수도 하남(개봉)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면 남송은 강소·절강(남경·항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中國文學地理形態與演變』(97-123쪽 참고)
이상으로 볼 때, 북송·남송 시기에는 강소·절강·강서 등 장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이 공히 우세를 보이며 이는 명청 시기에서도 지속된다. 그러나 북송의 하남은 남송에 이르러 약화되고, 북송의 강서·복건·사천 등은 만당에서 약세를 보이다가 북송을 이어 남송에 이르러 더욱 증가를 한다. 결국 남송을 기점으로 문학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보이며 강소·절강·강서·사천·복건 등의 일대에 집중으로 분포한다.
이러한 현상은 명·청 시기에도 강소·절강·강서 등 장강일대가 우세하며, 북쪽에는 산동·하북·하남 지역에, 남쪽에는 복건·광동 일대에 각각 분포하였다. 그러나 명초에 남경을 도읍으로 하다가 영락연간 북경으로 옮겼지만 여전히 장강유역에 월등이 많이 분포하고, 청대에도 북경을 수도로 정했지만 여전히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문화발전의 축적과 관성의 작용으로 인해 여전히 남방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 본 보고서의 내용은 중국인문사회연구소의 지식생산이며 인용 시 자료원을 명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