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문인(文人)에서 무관(無冠)의 황제”로:

근대중국 저널리스트 직업화 연구

(원제: 从"末路文人"到"无冕之王": 近代中国报人职业化研究) 

 

발표자: 王 敏 (上海社会科学院)

 

 

 

Ⅰ. 근대 저널리스트 개설

 

저널리스트는 신문의 주필자, 편집인, 기자 등으로 주체적인 신문업계 종사자를 말한다. 중국의 근대 저널리스트는 1858년 홍콩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그러나 안정적인 직업군으로 형성된 것은 1872년의 「신보(申報)」가 창간되면서부터 이다. 1872년부터 1949년까지 80여년 간에 걸친 저널리스트의 기본상황은 3단계로 나누어 서술할 수 있다.

 

1. 존문각(尊聞閣) 저널리스트 시대

이 시대는 1872년 「申報」가 창간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해 영국인 어니스트 메이저(Ernest Major)가 출자하여 상해에서 중문신문인 「申報」가 창간되었다. 「申報」는 “외국인이 출자하고 중국인이 제작하는” 방식으로 경영되어 중국인이 신문과 관련된 업무를 주관하였다. 「자림보(字林報)」(1882)과 「신문보(新聞報)」(1893)도 이러한 방식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신보의 저널리스트들은 근대 신문 산업사에서 30년을 풍미했으며 그들의 사무실은 “尊聞閣”으로 불렸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이 시대의 저널리스트들을 “尊聞閣의 저널리스트”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를 “尊聞閣의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 주요 저널리스트로는 장지상(藏芷湘), 전흔백(錢盺伯), 하가생(何佳笙), 황협훈(黃協塤), 원조지(袁祖志), 채이강(蔡尔康) 등이 있다.

 

2. 식루 저널리스트(息樓報人)의 시대

이 시대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시보(時報)」의 편집부가 식루(息樓)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時報」는 1904년 창간되었다. 주요 경영자였던 적초청(狄楚靑), 진경한(陳景韓), 뇌분(雷奮) 등은 웅대한 뜻을 가지고 여론과 언론계를 혁신하려고 하였다. 「時報」는 내용부터 레이아웃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했다. 먼저, 새로운 신문 형식인 “시평(時評)”을 게재함으로써 전통적인 신문 논설 시대에 종식을 고했다. 또한 「時報」에 이르러 신문이 당시의 정치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時報신문사의 편집부가 위치한 息樓는 당시 입헌파가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고 시정을 논의하던 장소였다. 狄楚靑 등은 당시 헌정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時報」를 빌려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언어로 당시의 정치를 분석하였다. 「時報」의 등장은 당시 신문계에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申報」,「新聞報」가 잇달아 “시평”을 모방하여 관련 지면을 만들었다. 「時報」의 영향을 받아 「申報」역시 1905년에 조직 개편을 감행하였다. 이로써 구세대 인물인 黃協塤가 사퇴하면서 “尊聞閣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時報」의 등장은 저널리스트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즉 신문은 저널리스트들이 자신의 재기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時報」의 저널리스트들이 자신의 집필란에 서명을 넣게 되면서 독자들이 지지하고 추앙하는 저명한 저널리스트들이 나타났다. 陳布雷, 黃遠生가 이 시기에 명성을 쌓은 저널리스트이다.

 

3. 대공 저널리스트(大公報人)의 시대

20세기 20년대 초부터 중국 상업신문의 황금시대가 시작한다. 우선, 상업신문발행부수가 증가하여 「申報」,「新聞報」의 발행량은 1930년대에는 역사상 최고점인 15만부에 이른다. 둘째, 중국근대역사상 가장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대공보(大公報)」가 창간한다. 셋째, 중국근대역사상 가장 저명한 저널리스트들이 이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장계란(張季鸞), 호정지(胡政之), 과공진(戈公振), 고집중(顧執中), 번장강(番長江), 왕운생王芸生, 徐鑄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여러 신문들 중 「大公報」와 大公 저널리스트들이 이 시기에 가장 주목받았다. 이런 까닭에 본고에서는 이 시기를 대공 저널리스트(大公報人) 시대라고 칭하였다.

「大公報」는 1902년에 영렴지(英斂之)에 의해 창간되었으며 1926년 9월 오정창(吳鼎昌), 호정지(胡政之), 장계란(張季鸞) 3인이 함께 이어받았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일본 유학자(留學者)로 서방 신문의 자유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방의 타임지(The Times)를 높이 평가하며 역할 모델로 삼기도 하였다. 「大公報」는 “문인이 정치를 논한다(文人論政)”라는 신문의 역할을 정립시켰으며, 상업적인 경영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항전시기에 크게 빛을 발하여 전체 6개 신문사에서 10개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Ⅱ. 전업화와 전문화: 저널리스트의 직업화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등과 같이 저널리스트는 중국 근대 사회로의 전환 시기, 즉 현대화의 과정 중에 새롭게 나타난 직업군이다. 현대화는 다양한 층위에서 진행되며 이러한 변화가 개인의 직업으로 표출되고는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업화, 전문화의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1. 전업화 비율의 증가

저널리스트란 직업은 기사를 쓰고, 편집하고 취재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尊聞閣 시대, 息樓 시대, 大公報 시대를 지나면서 통신원과 기자에 한에서 저널리스트의 이러한 능력이 현저하게 제고되었다.

통신원은 외지에 있는 신문사에서 고용된 사람으로 현지의 소식을 신문사에 제공하는 사람이다. 탐방 기자라고도 불린다. 초기 신문사가 탐방 기자에게 요구하는 능력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예를 들어 「申報」의 조건은 “박식하며 사무에 능숙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실사구시하는 자”였다. 민국초기에는 탐방 기자에게 일정한 전문성이 요구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아시아신문」의 고용 조건은 “정치관이 뚜렷하고, 소식에 영통하며, 문필이 명쾌한 사람”이다. 황원생(黃遠生)은 통신원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능력을 (1) 의식이 있고 (2) 발이 빠르며 (3)들을 수 있고 (4) 쓸 수 있는 사람 4가지로 보았다. 이것은 비교적 전반적인 요구로 볼 수 있다. 통신원은 독립적인 사고능력, 사교능력, 추론능력, 작문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기사의 직업능력은 통신원과 비슷하나 기자는 상대적으로 늦게 출현하였다. 20세기 2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상해의 「申報」, 「新聞報」, 「時報」는 외근 기자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김웅백(金雄白), 고집중(顧執中), 김화정(金華亭)은 상해에서 활동한 중국 초기 외근기자이다. 1929년 서주성(徐鑄成)은 정식으로 「大公報」의 기자로 고용되었다.

기자는 신문사에서 파견되어 기사를 취재하는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탐방 기자나 통신원과는 그 신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초기의 기자는 전문적인 직업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아 어떻게 기사거리를 찾고, 취재할 것인가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느끼고는 했다. 김웅백(金雄白) 역시 당시 기자 생활을 할 때 이러한 곤란함을 격었다.

어떤 소식을 반드시 취재해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써야 독자의 환영을 받는가, 위로는 스승이 없고 아래로는 전례가 없어 일체 갈피를 잡지 못해 망막하다.

金雄白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顧執中의 신문기자 생활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이는 그가 유명한 기자가 될 기본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폭넓은 사회관계 뿐만 아니라 영어 작문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기자 생활에서 가장 야심찬 성과는 최초로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소식을 취재한 것이었다. 顧執中과 송미령은 학교 급우로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1927년 하반기, 顧는 영자신문인 North China Daily News를 읽던 중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공고를 접하게 되었다. 직업적인 육감으로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식이라고 확신한 顧執中은 곧바로 자동차를 몰고 송미령의 집으로 취재를 갔다. 순조롭게도 송미령과 그의 모친은 그를 환영하였으며 취재 후 顧執中은 송미령을 근접 촬영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顧執中은 신문사로 돌아온 후 곧바로 이 소식을 썼고 장개석과 송미령의 사전을 첨부해 「新聞報」에 실었다. 이 기사는 상해에서 발행되는 신문에만 독점적으로 수록되었으며 이날 「新聞報」의 판매부수는 평소보다 몇 만부 나 늘었다고 한다.

 

2. 전문분업의 세분화

저널리스트 직업화는 직업내부에서 분업이 세분화된다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신문사의 각 부서가 갈수록 구체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신문사의 내부 구조는 단순하여, 편집실, 경리실, 기계실 삼분화 되어 있었다. 편집실은 이후의 편집부가 되었고 경리실은 경영부, 기계실은 인쇄실이 되었다. 민국이후 신문사 부서는 더욱 조직화되어 「新聞」신문사를 예로 들면 1처3부를 설치하고 처와 부 아래 과를 두었으며 과 아래 계를 두었다. 편집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편집부 각과

하부기구

직책범위

전신과

수신과

무선전신과 장거리전화를 받거나 검.

발신과

전신부호 해석

외지과

 

외지소식을 편집

본지과

 

본지소식을 편집

경제과

 

경제소식을 편집

교육과

 

교육소식을 편집

문예과

기타계

유머란과 현지 소식지를 편집

도화(圖畵)계

화보를 편집하고 삽입

번역과

 

외국소식지와 신문잡지를 번역

교정교열과

신문계

신문초안을 교정교열

광고계

광고초안을 교정교열

대조과

 

외지통신기자의 근무태도를 평가, 지도

취재과

 

취재조사와 자료수집하는 외근업무

장서과

 

책을 장서하고 신문을 보관

 

또한 분업이 더욱 세분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편집과 기자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면, 초기 신문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여 편집은 본지편집과 외지편집으로만 나누어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후에는 칼럼 편집까지 생겼다. 1920~30년대 편집의 분업은 상당히 세분화되어있다. 통상 국제신문편집, 주요소식편집, 경제편집, 본지편집, 교육편집, 체육편집, 칼럼 편집, 별책 편집 등이 있었다. 기자의 분업은 일반적으로 편집의 구분과 대동소이하게 이루어져 통상 정치 기자, 경제기자, 외교 기자, 군사 기사, 사회 기자, 교육 기자 등으로 나뉘었다. 30년대 이후 신문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졌다. 특히 스포츠와 연예소식이 인기를 끌게 되어 스포츠 기자, 연예기자, 촬영기자 등이 등장했다. 이와 동시에 기자들의 특기와 전문 능력이 점점 더 요구되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스포츠 기자이다. 스포츠 기자는 일반 사회, 정치소식을 취재하는 기자와 달랐다. 스포츠에 관련한 지식과 취재, 집필의 기교와 촬영기술 등이 필요했다. 당시 스포츠 기자는 어떻게 되는가에 관한 논문에서는 스포츠 기자 갖추어야 할 소질과 취재기교, 취재방법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전업화와 전문화는 직업화 정도를 반영하는 척도이다. 전업화는 직종 간의 차이를 의미한다. 지식인이 그런 것처럼, 저널리스트와 자유기고가는 분명히 다르다. 작가가 창조적인 작업에 종사하며 주제선정, 내용, 작문방식에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것과 달리 기자는 시대와 사회에 주의해야 하기 때문에 직업적인 민감성이 요구된다. 전문화는 직종 내부의 분업을 의미한다. 어떤 직업이라도 횡적인 혹은 종적인 분업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횡적인 분업은 어떤 직무가 병렬적으로 몇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편집 작업의 세분화는 곧 횡적인 분업이다. 종적인 분업은 어떤 직무의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가리킨다. 전업화와 전문화라는 측면에서 보다면 20세기 3~40년대, 저널리스트는 상당이 높은 수준의 직업화를 이룩했다고 보인다.

 

 

 

Ⅲ. 마지막 문인에서 무관의 황제로: 저널리스트의 직업화와 근대중국사회의 변천

 

근대 저널리스트의 직업화 노정은 “마지막 문인에서 무관의 황제”라고 개괄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의 직업화 과정 연구를 통해 저널리스트가 새로운 지식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저널리스트는 전통적인 문인으로부터 전환된 것이다.

소위 ‘마지막 문인’은 尊聞閣 시대의 저널리스트를 가리킨다. 이들은 강남에서 온 중국의 전통적인 독서인이었다. 명청시대 이래로 강남에는 독서 인구층이 매우 많았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인은 홍콩과 상해 등 연안도시에 서점과 신문사 등 문화시설을 설립하였고 이로 인해 독서인들에게 새로운 직업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를 통한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직업에 대한 동질감과 귀속감을 느낄 수 없었다. 임시적으로 신문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으나 기회만 있다면 과거에 응시하고 싶어했다. 왕도(王韬)나 심육계(沈毓桂) 같은 사람들도 과거에 대한 미련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수재(秀才)나 거인(擧人)는 모두 문인으로 가계가 곤궁하더라도 사회의 상류층으로 분류되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서양인은 여전히 오랑캐였기 때문에 출신이 고귀한 사람이 외국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매우 체면이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주류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그 유일한 길이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것이었다.

근대 저널리스트의 기원은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유리(遊離)된 문인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전통사회구조에서 잉태되었으며 근본에 있어서 큰 변화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저널리스트가 된 것은 직업자체의 매력 때문이 아니었으며 중국 전통사회가 그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저널리스트 직업화의 초기 단계는 피동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독서인에서 저널리스트로: 직업화 과정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은 문인의 인생목표였다. 신문사에 들어가서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은 문인의 인생목표를 변화시켰다. 즉 문인은 새로운 직능(職能)을 학습해야만 했다. 尊聞閣시대와 息樓시대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문인은 저널리스트로 전환되게 된다. 大公報 시대에 이르러 저널리스트의 교육배경과 지식구조는 이전과 비교하여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尊聞閣 시대의 저널리스트는 대부분 수재 혹은 거인이었다. 이들이 신문업에 투신하였을 당시의 지식구조는 완전히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저널리스트 독서인과 전통적인 독서인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직업이 필요로 하는 직업 능력과 기술이 초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첫째 신문논설을 쓰기 위해, 혹은 기사 원고 초안의 주제를 정하기 위해 이들은 시사(時事)나 정치에 촉각을 세웠다. 둘째는 초기 저널리스트는 통상 연안도시에서 등장하였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租界)’에서 생활하였던 탓에 기초적인 서양학문지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조계에서의 선진적인 도시정부의 관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거나 심지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이들은 비교적 조기에 서양문화를 접한 부류였다. 그들을 연안도시지역의 문화인이라고 볼 수도 있고 혼합형문화인이라고도 칭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기본적인 지식구조와 가치관이 전통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서양학문의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息樓 시대에 저널리스트의 지식구조는 획기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도 저널리스트의 대부분은 역시 전통적인 독서인이었고, 그 중 일부분은 수재 혹은 거인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적초청(狄楚靑), 포천소(包天笑) 그리고 黃遠生은 청정부가 과거시험을 페지하기 전 마지막 시험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식구조는 그 이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이들은 서양학문을 접했을 뿐 아니라 서방의 근대민주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이 때문에 그들의 지식구조에서 전통문화가 그 저변에 깔려 있기는 하였지만 서양사상 역시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청말 민국초기 자유화된 일세대였다.

저널리스트 지식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大公報 새대였다. 이 시대에 저널리스트의 지식구조는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교육배경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그들의 기본적으로 신식교육을 받았고 신식학당을 졸업했으며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수료했고, 일부는 신문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대공보 인물집(大公報人物譜)에 수록된 60여명의 저널리스트 중 29명이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신문업계로 투신하기 전 신문학을 전공했다. 대공보 인물집에 실린 인물 중 4명이 연경대학(燕京大学) 신문과를 졸업했고 2 명이 상해민치신문학원(上海民治新闻学院)을 졸업했다.

 

3. 근대 중국 사회 변천에 의한 저널리스트의 직업화

저널리스트는 언론업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직업군이다. 이 때문에 저널리스트의 직업화 상황과 신문 출판업은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언론업의 발전이 고립된 현상이 될 수 없으며 이는 근대중국사회의 변천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사회경제구조가 변했다. 근대는 중국사회가 전통에서 현대로 전환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전환은 연안도시의 사회경제구조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가장 주요한 변화는 경제구조의 시장화라고 할 수 있다. 시장화는 명청 이래의 강남지역에서 이미 충분히 성장하였으나 근대 이후 상해 등의 연안도시에 서방의 신기술이 유입되면서 전에 없던 빠른 속도로 사회내부로까지 그 영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문화의 시장화도 포함하고 있다. 문화의 시장화는 서양인이 연안도시에 문화시설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중 상업적인 신문의 등장은 문화시장화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다음, 시대와 정치환경이 변했다. 중화민국 건국 이후, 근대 중국 신문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중화민국 임시헌법에 따라 인민은 언론, 출판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청말 시기 신문업 발전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정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민국 초 개혁시기 조정에 몸을 담고 있던 많은 인물들이 저널리스트출신이었다. 국민당의 원로인 왕정위(汪精衛), 호한민(胡漢民), 우우임(于右任), 대계도(戴季陶)는 모두 저널리스트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저널리스트는 과거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 당국 요인(要人)이 되거나 사회의 저명인사로 출세하기도 하였다.

저널리스트는 지식인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저널리스트의 직업화는 중국 지식인의 변화과정이다. 이러한 전환의 배경은 근대 이래 계속 되어 온 중국사회의 변천이었고 이 변천을 현대화라고 칭할 수 있다. 현대화는 공업화, 도시화, 시장화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진행난다. 이러한 현대화가 개인의 신분으로 표출되는 것을 직업화라고 할 수 있다. 전통 농업 사회의 분업은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띠었으며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근대이후, 연안도시에 서양의 영향으로 공업화, 도시화, 시장화가 시작되었고 사농공상의 사회구조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독서인 중심의 “사(士)” 계층도 분화하기 시작했다. 독서인은 사회 엘리트로 통치 계층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들은 사서오경에 능통했으며 높은 학식과 정치적 식견으로 치국의 도를 깨우치는데 고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이런 배경 하에서 전통 독서인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은 사회 전환기에 더 많은 선택공간을 부여받았다. 장원제(張元濟)처럼 출판업에 투신할 수도 있었고 왕소의(汪笑依)처럼 극작가가 될 수도 있었다. 즉 저널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소수의 독서인들의 선택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참조바랍니다.

 

从末路文人到无冕之王_王敏.pdf

 

11왕민.jpg 

 

 

 크기변환_왕민2.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6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3부 [7주제] : 普世文明,还是中国價値?近十年中国的历史主义思潮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28 17845
25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2부 [6주제] : 개혁개방 이후 주요 문학담론의 형성과 지식체계의 변화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28 17588
24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2부 [5주제] : Cosmopolitan Intellectuals and Modernist Writers in 1930s Shanghai: On Reassessing their Value and Relevance to China Today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28 19813
23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2부 [4주제] :中國大陸科技體制的發展:法律變遷的觀點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28 21082
22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2부 [3주제] :개혁기 중국 정치학의 회복과 발전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28 17040
21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1부 [2주제] :作为知识人與知识传播者的新式学校教师:以近代上海为考察中心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28 21582
»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1부 [1주제] :从“末路文人”到“无冕之王”:近代中国报人职业化研究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28 20177
19 [제1회 HK국제학술회의] 중국의 지식‧지식인의 형성과 패러다임의 변화 file HK연구사업단 2010-10-08 16090
18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Ⅱ-2세션 [제2주제] 포스트사회주의 시기의 ‘상하이 글쓰기’와 중국의 출로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611
17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Ⅱ-2세션 [제1주제] 중국의 교육경쟁과 사립학교의 성장에 관한 연구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194
16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I-2세션 [제4주제] G20에 임하는 중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전략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794
15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I-2세션 [제3주제] 현대 중국의 과학기술 역량과 한국의 대응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7249
14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I-2세션 [제2주제] 중국 IT 서비스산업의 기술추격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5832
13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I-2세션 [제1주제] 중국 제조업 분야 기술추격 양상과 한국의 대응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7569
12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Ⅱ-1세션 [제5주제] 중국 과학자 집단의 형성과 변천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357
11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Ⅱ-1세션 [제4주제] 근대 이후 중국의 서구 경제학 수용과정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003
10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Ⅱ-1세션 [제3주제] 20세기 전반 중국 정치학의 제도화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526
9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Ⅱ-1세션 [제2주제] 중국 근대 역사학의 계보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031
8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Ⅱ-1세션 [제1주제] 근대 중국 정기간행물의 지식편재와 문학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817
7 [제1회 HK국내학술회의] I-1세션 [제5주제] 중국대만관계의 변화와 한국의 대응 file HK연구사업단 2010-04-26 16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