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화인백과(인물편)」 朝鮮_4

조회 수 464 추천 수 0 2023.03.28 14:46:35


16. 黄忻 Huang Xin, 황흔

 

중국 송대 고려에 거류한 화교 상인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서기 1055년 고려 문종 때, 두 아들 포안(蒲安)과 세안(世安)을 데리고 고려에 와서 상업에 종사했다. 이후 고려에 정착하여 직무를 맡은 이후 다시 귀국하지 않았다. 후에 고국에 계신 82세 노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으므로 고려 국왕에게 장남인 포안을 돌려보내 조모를 섬길 것을 청하니, 문종이 허락하였다. (孫玉梅)

 

17. Ji Zi, 기자

중국 은()나라 말, ()나라 초기의 인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중국 사서 尚書大全·洪範(상서대전·홍범)』와 史記·宋微子世家(사기·송미자세가)에 따르면, 기자의 이름은 서여(敘餘)이며, 은나라 주왕 시기 태사의 직책을 맡았는데, 주왕에게 폭정을 중단할 것을 간언하다 수감 되었다. 기원전 1066, 주 무왕이 은을 멸하면서 석방되었다. 은나라가 멸망하는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기에, 5천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동쪽 조선으로 갔다. 주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조선의 제후(箕侯)로 봉하였다. 후에 기자가 나라를 세워 왕성(王城, 지금의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두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한다.


기자조선에 관한 명칭 유래

기자조선의 명칭이 기자(箕子)’라는 중국 역사상의 인물과 조선(朝鮮)’이라는 한국 역사상의 지역이 복합됨으로써 이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 ()나라 이전의 문헌인 죽서기년(竹書紀年)· 상서(尙書)· 논어(論語)등에는 기자가 은()나라 말기의 현인(賢人)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의 문헌인 상서대전(尙書大傳)은전(殷傳),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등에서 기자는 은나라의 충신으로서 은나라의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나라는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했다고 함으로써 비로소 기자와 조선이 연결되었다.


따라서 기자동래(箕子東來)의 사실은 부인되거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의 기록인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조선과 구분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후조선(後朝鮮)으로 표현해 기자에 대한 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 왕조기는 왕도정치의 구현과 사대관계의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명예스러운 일이었다고 이해해 기자동래설이 긍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축조한 기자릉(箕子陵)에 대한 제사도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8. 江朝東 Jiang Chaodong, 강조동

 

중국 송나라때 고려로 이주한 의사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서기 1058년 고려 문종 때 천주(泉州) 상인과 함께 고려에 왔다. 서기 1059년 귀국할 때 문종의 만류로 고려에서 의술을 계속하다가 고려에 정착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1059年 己亥十三年秋八月. 宋泉州商黃文景蕭宗明醫人江朝東等將還. 制許留宗明朝東等三人.”

 


19. 金童 Jin Tong, 금동

 

중국 원나라 시대 사람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원나라 위왕(魏王) 아목가(阿木歌)의 딸이다. 서기 1324년 고려 충숙왕(忠肅王)에게 시집을 갔다. 다음 해, 충숙왕을 따라 고려에 돌아온 뒤, 아들을 한 명 낳았으나 1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0. 康世爵 Kang Shijue, 강세작

 

고려에 체류한 중국 명나라의 무장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원래는 명나라 웅정필(熊廷弼)의 부하 무관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청나라 군대와 교전하다가 크게 패하여 10여 곳을 다쳤는데, 중원이 막다른 길이라고 여겨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조선인 회령(會寧)에 정착하였다. 후에 조선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았고, 80세에 사망하였다. 그 후손이 백여 명으로 번성하였으나 이들은 함께 모여 살았다.

 

김묘정, 명나라 유민 강세작(康世爵)을 기억하는 서사의 변이 양상 고찰-지식 전달 체계의 한 단면, 한국민족문화, 67, 2018에 따르면 강세작의 생졸년은 1599~168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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