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孔瑞麟 Kong Ruilin, 공서린

 

공자의 후예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조선에 세거하였으며, 공자의 후예 중에서 명성이 가장 높다. 서기 1759년에 이미 현명한 관리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 영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孫玉梅)

 

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따르면 1483(성종 14) 출생, 1541(중종 36)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교인명사전에는 조선 영종 때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고 하지만, 한국의 기록에 따르면 1558(중종 33)에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또한, 그가 1795년에 이름을 날렸다고 나오지만, 이는 1792(중조 16) 유교숭상책에 따라 조선에 사는 공자의 후손들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여러 후손들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고 절의를 지켰다 하여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통으로 삼게 한 것을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용인문화대전 참고


22. 孔昭 Kong Zhao, 공소

중국 원대 문인으로 생몰년 미상이다. 공자의 후예는 공자(孔子)53세손 연성공 공완(孔浣)의 차남으로 한림학사를 지냈다. 원나라 노국공주(魯國公主)가 고려 공민왕(恭愍王)에게 시집올 때 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정착하였다. 수원의 궐 안에 절을 짓고 공자상을 봉안하였다. 이후 고려에서는 사례(祀禮)가 성행하였고, 조선에서도 공자의 후예가 번성하였다. (孫玉梅)

23. 李敏道 Li Mindao 이민도

중국 원나라의 의사이다(ー 1395). 원말에 고려인 성준득(成準得)을 따라 고려에 와서 정착하였다. 의술과 점술(醫卜)에 재능이 있었다. 태조가 왕위(李朝)에 오른 후, 공신(功臣)의 대열(隊列)에 참여하여, 벼슬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이르렀다. (孫玉梅)

 

 일부내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참조




24. 李相 Li Xiang 이상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군인이다. 생몰년은 미상으로 13349, 탈륜위(脫輪衛) 야인에게 포로가 되어, 여러 번 팔려서 종이 되었다가 후에 조선에 정착하였다. 1441년에 조선에 붙잡혀 자유를 되찾았다. 그는 글을 대강 알고 한음(漢音)이 순수하며, 의술(醫術)도 대강 알아서 조선의 한두 대신들이 의거하여 거류가 허락되었다. 이문생도 문리에 정통한 자는 매일 이처에게 와서 <至正條格>, <大元通制> 등의 책을 배웠다. 또 승문원(承文院) 사람들이 왕래하여 경문(更文)을 묻기도 했으며, 6명의 학생들을 받아 교육하였다. 1442년 조선 승문원의 박사로 임명되어 옷과 집을 하사받고, 사역원(司譯院)의 주부(簿) 장준(張俊)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孫玉梅)

 

세종실록 94, 세종 231022乙酉 1번째 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포로로 잡힌 철령위의 군인 이상을 중국어 통역관으로 머물러 두기를 청하는 주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참조.

 

 

25. 李萱 Li Xuan 이훤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생몰년 미상은 미상이다.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되었던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의 손자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조선에 피신했다. 1760, 조선 영종이 단을 설치하고 이여송을 제향할 때 제례(祭禮)의 축관(大祝)을 담당했다. 왕종(王宗) 시기, 진해(鎮海) 현감을 지냈다. (孫玉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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