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劉志誠 Liu Zhicheng, 유지성

 

  중국 원나라 문인으로 생졸년은 미상이다. 그 후손도 고려에 정착하여 관직에 봉직하였다. 고려 인종은 그를 공부상서 우복사(右僕射)에 임명했다. (孫玉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동일 인물로 예상되는 유지성(劉志誠)은 송나라 양주(楊州) 출신 귀화인으로 972(광종 23)에 출생하여 1039(정종 5)에 사망하였다. 고려에서 관직을 지낸 유행(劉行)과 유현(劉炫)의 아버지로 1034(덕종 3) 7월 예부상서에 오르고, 12월 공부상서를 지낸 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유지성 [劉志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한국자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9655&cid=46621&categoryId=46621



32. 陸廷俊 Lu Tingjun, 육정준

  중국 송나라 문인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1101년 고려 숙종 때 고려에 건너갔다. 숙종의 예우를 받고 시험에 급제하여 8품 벼슬을 받고 정걸(廷傑)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孫玉梅)

 

한국자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0806&cid=62135&categoryId=62207


33. 陸詡 Lu Xu, 육허

  중국 남북조 시대의 양나라 문인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541년에 백제는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시박사(毛詩博士)를 초청하여 경학을 강의하도록 하였고, 이는 백제의 유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孫玉梅)

모시박사란 모시(毛詩)에 능통한 박사. 모시는 한()나라 사람 모형(毛亨)과 모장(毛萇)이 전한 중국 고대의 시()로서 지금의 시경(詩經)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시박사 [毛詩博士]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자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86120&cid=40942&categoryId=31448

 



34. 羅世 Luo Shi, 나세

 

  중국 원나라의 명장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후손들이 모두 고려에 정착하여 봉직하였다. 고려 우왕 초년에 고려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上元帥兼都安撫使)로 지냈다. 1376년 왜구가 전선을 타고 50척을 침범하여 행안산(幸安山)에 상륙하였을 때 변안렬(邊安烈) 및 고려 무장 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을 대파하였다. 그 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부임 당시 왜구가 다시 침탈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3808월에 왜구는 또 50척의 전선을 타고 와서 진포구를 침범하여 기슭에 상륙하여 약탈하였는데, 이때 고려 해도원수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백 척의 전선을 이끌고 진포에서 적에 맞서 격전 끝에 왜구를 대파하여 이 공으로 문하평리가 되었다. (孫玉梅)

 

한국자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2390&cid=46621&categoryId=46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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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馬玉聲 Ma Yusheng, 마옥성

 

  마옥성(馬玉聲, 1917-1976)은 조선화교사단의 지도자였다. 그는 중국 천진 탕구(塘沽)에서 태어나 1934년에 조선으로 이주하여 가게 직원으로 일했으며, 1950년대 말에는 조선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화교 사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마음을 다해 화교를 위해 봉사하고 일생 동안을 화교의 애국적인 진보사업과 중조 두 나라의 인민 우애에 바쳤다.

  1945년 일본제국의 항복 이후에는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지원하고, 화교 애국진보단체인 조선화교연합회를 창설하여 화교 복지 및 교육사업을 개척했다. 1946년 이후에는 조선 평안북도 신화주시 화련회(華聯會) 위원장, 조선 수도 평양 화련회 위원장, 중앙 화련회 부위원장, 위원장 등을 맡아 활약하면서, 중국인민해방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에는 여러 차례 화교들을 중국으로 초청하여 관광을 주선했으며, 1950년 미제국이 조선을 침공하는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계속해서 조선에서 화교 사무(僑務)에 종사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의 정의로운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했습니다. 동시에 화교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각급 단체를 조직하여 2만 명 이상의 화교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휴전 이후에는 화교들이 고향을 재건하고 생산을 회복하며 화교 중·소학교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1955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어 모택동 등 중국 지도자들에게 환대를 받았다. 1953년에는 조선 최고상임위원회로부터 국기 삼급장(國旗三級章)을 수여받았다. 19769월에는 중국 주재 조선 대사관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석을 애도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으나, 과도한 슬픔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장병으로 별세했고, 그의 유골은 중국 북경의 팔보산 혁명공원에 안장되었다. (盧振琪)

 

마옥성(馬玉聲)부터는 북한화교를 소개하고 있다. 위 번역본은 원문의 내용을 직역하였으며, 본문에서 조선은 북한을 의미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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