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부터 대만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서 걸출한 능력과 업적을 세운 10명의 청년을 선정하는 이벤트를 실시해 오면서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국제청년회의소의 대만 지부 '대만청년회의소'가 매년 선정하는 형식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정치사회경제 등의 관심사를 살펴볼 수 있다.  

  

국제청년회의소(Junior Chamber International, JCI)는 미국에서 설립된 국제 비정부 기구로서, 청년이 사회 참여와 발전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진흥하는 목적으로 한다. 20세부터 40(대한민국은 45)까지의 청년이 지도역량개발, 지역사회개발, 국제와의 우호증진이라는 3대 이념을 실천함을 목적으로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268, 검색일 2023. 06. 26)

 

대만에서는 국제청년상회國際年商會로 불리고 있다. 1963년부터 총회에서 중화민국의 10대 걸출한 청년 선발, 줄여서 10걸은 사회 각계각층, 각 분야의 걸출한 청년을 발굴하기 위하여 설득력 있는 성공스토리, 탁월한 성과와 사회적 공헌도가 높은 20~40세의 청년을 표창하여, 사회를 위한 차세대 청년 모델을 수립한다는 목적으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https://zh.wikipedia.org/zh-tw/中華民國十大傑出, 검색일 2023. 06. 26)

 

 

 

110대 우수 청년 수상자(1963년도)


1.

위루이장(瑞璋, 1925~2023), 본관은 저장浙江이며 대만 심장과의사이다. 여러 명의 대만 총통 주치의를 역임하기도 했다. 육군 1총병원(3 총병원 전신) 심장외과 초대 주임의사였으며, 롱민榮民총병원 심장혈관과를 개설하였고 주임을 거쳐 병원에서 퇴직했다. 대만에서 최초로 인공심폐기를 이용한 심장외과 수술을 의사로 알려졌다. 1963 1 10 걸출한 청년상을 수상했다.


2.

우야오팅(吳耀庭, 1926 6 20~2012 2 4)은 타이난시 베이먼구 출신으로 대만의 기업가이다. 2차대전이 종전된 이후 일본 백화점 사업을 배워, 대만에서 최초로 백화점 사업을 시작했다. 대통그룹大統集團의 창업주이다. 1954년 의류, 털실, 잡화 등을 파는 점포를 설립하였고, 1958년 세 점포를 합쳐 '대신백화점'을 개설했는데, 이는 대만인이 창업한 최초의 백화점이다. 1984년 개점한 다리大立백화점은 당시 대만 최대 규모였다. 현재의 대통그룹으로 발전했다.

우야오팅은 1926년 타이난에서 태어나 가족을 따라 건설 도급업을 하다가 가오슝의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고용됐다. 17세 때 요시이 백화점(가오슝 백화점으로 개명·폐업)에 가서 어머니를 대신해 거울을 샀다가 점원의 '눈치보기'에 찔려 장차 백화점을 차릴 생각을 갖게 됐다고 고백.

2차대전 이후, 우야오팅은 가오슝에 '신고新高백화점'이라는 가게를 열었다.1950년에는 가오슝 백화점에 노점을 열어 옷감 털실을 취급하였다. 1953년 우야오팅은 일본으로 건너가 현지 백화점을 반년간 견학하고 돌아와 대신백화점을 건설하고 1954년에 착공했다. 초기에는 의류, 털실, 잡화 등 세 개의 점포를 개설하다가 1958 3개 노점을 '대신백화점기업주식회사'로 합병했는데, 대만인이 설립한 최초의 백화점이다.1984년 다리(大立)백화점을 개점했는데, 당시 대만 최대 규모였다. 그 사업은 이제 대통그룹으로 발전했다.

 

3.

펑펑(馮馮, 1935 4 5 ~ 2007 4 18), 본명은 장즈슝(張志雄), 후에 펑더페이馮培德로 개명하고, 스스로 '펑펑'이라는 별칭을 즐겨 사용했다.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작가, 번역가, 화가, 종이예술가, 작곡가이다. 캐나다로 이민하여 미국과 중화민국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풍풍거사馮馮居士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장교, 어머니는 광시좡족으로 광저우에서 태어났다. 194915세에 나이를 속여 중화민국 해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부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왔다. 계엄령(백색공포) 기간 광둥성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로 5년간 감옥에 있었다. 1955년 고문 후유증으로 석방되었는데, 1957년 국방부 통역관으로 미군과의 소통을 담당하다가, 총통부에 들어가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통역관을 지내기도 했다. 독학으로 9개 국어를 공부해 프랑스 소설과 영어 소설로 오스트리아 상을 받았다. 1962년 소설을 발표하였고, 1963 '미희 4부작'을 펴낸 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1 10대 걸출한 청년을 수상했다. 1964년 제대 후에 동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1964년 국민당 정부가 다시 체포하려 하자, 1965 12월 미군의 협조를 얻어 미군 군함에 탑승해 캐나다로 망명했다. 계엄이 해제된 이후 2002년 대만 정부에게 간첩혐의에 대한 재심을 요구했지만, 관련 자료가 없다면서 기각했다. 2003년에는 자서전 '안개속의 항해霧航'을 출판하여,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Coming out of the closet)하고 백색공포白色恐怖 당시 구금 및 성적 학대 사건 등을 회상했다. 2004년 대만에 귀국하고 국적을 회복했다. 2007년 타이베이에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

첸푸(錢復, 1935 2 17 - )는 자는 쥔푸(君復)이며 저장성 항저우에서 출생한 중화민국의 정치인으로 전 중화민국 외교부 부장, 감찰원장이다. 첸푸는 현재 캐세이퍼시픽은행國泰世華銀行 이사이며 캐세이퍼시픽 자선재단 이사장이다.

 

5.

펑밍민(彭明敏, 1923 8 15~2022 4 8), 타이완 타이중 출신으로, 국제법 권위자로 타이완대학 퇴직교수이자 대표적인 대만독립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이다.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최연소로 대만대학 정치학과 주임교수가 되고, 유엔 주재 중화민국 대표단 고문으로 역임되기도 했다, 1963년 초대 10대 걸출한 청년으로 선출됐다. 1964년 국민당의 독재에 반대하면서, 학생들인 셰총민謝聰敏, 웨이팅차오魏廷朝와 공동으로 '대만자구운동선언台灣自救運動宣言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70년 스웨덴으로 이주하면서 20여 년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92년 대만이 민주화되면서 대만으로 돌아왔다.

1996년 펑밍민은 민주진보당을 대표하여 1996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 출마하였다. 펑밍민은 대만 독립 운동에서 대표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타이완 독립의 대부 臺獨' 로 불리기도 한다. 20229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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