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학자

조회 수 137 추천 수 0 2023.12.21 15:58:55

41. 마헝 马衡 (1881-1955)

절강성 Yinxian 현 출신이다. 서령인감협회 제2대 회장이자 금석 고고학자, 서예가, 인장조각가, 고궁박물원 제2대 관장이었다.
그는 초기에 난양공립학교 (현재의 상하이 교통대학 및 시안교통대학 )에 입학하여 유교 고전, 역사, 금석학을 공부했다. 한나라와 위나라의 석경에 능통하며 문헌연구와 현장조사에 주력했다. 난양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북경대학교 중국학학원 고고학연구실 주임과 고궁박물원장을 역임했다. 1952년, 그는 베이징문화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연하도유적 발굴을 총괄하여 중국 고고학이 금석학 연구에서 현장 발굴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으며, 현대 중국 고고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출처 : https://baike.baidu.com/item/%E9%A9%AC%E8%A1%A1/1252716?fr=ge_ala

42. 마창수 马长寿 (1907-1971)

중국의 유명한 민족학자, 사회학자이자 역사가이다. 초기에 그는 서양 근현대 사회학, 인류학, 언어학, 고고학 및 기타 선진 과학 방법을 도입하고 남서부 소수 민족 지역에 대한 심층 민족 조사를 수행했으며 민족학 및 인류학의 기초가 된 여러 저서를 발표했다. 1950년대 이후 그는 중국 민족의 중분야에서 중국사학의 우수한 전통과 현대 서양사회과학의 본질을 융합하여 독특하고 자체적인 시스템을 갖춘 학파로 발전했다. 흉노학, 선비학, 돌궐학, 티베트학 등은 오늘날 세계의 '우수한' 분야가 되었으며,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당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는 모든 학자는 그가 출판한 일련의 논저를 참고해야 연구할 수 있다. <마창수의 민족학 수필>은 그의 학문적 사상을 체계적으로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민족학자로서 그의 학술 활동은 항상 국경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특히 국경 문제의 실천에 있어 민족학과 인류학의 이론과 방법의 위상과 역할을 강조하고 학문적 연구와 국경문제를 의식적으로 결합시켜 후세에 업적을 남겼다.
출처 : https://baike.baidu.com/link?url=LSGgOl2nSJQL3xrOTVHNOiC_v1jy3Ja35i1hB9qyU16XxEIFwAS-tb9gS05M-8zMX00IRBq7T8q1KfByDgRQF6QoaQNQzJW-rfHqyV13RD87_kFCYB7a8ck58GEqP7hK

43. 모자수 毛子水 (1893- 1988)

중국의 현대 학자. 그는 어려서부터 학구적이고 총명하여 독서에 중독되어 6세에 마을 학교에 입학하여 삼자경과 천자 경을 공부하고 사경을 낭송하였다. 1911년 겨울, 모자수는 취준 중학교를 졸업한 후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 집에서 공부했다. 1913년 21세 때 북경대학 이과예과 에 입학했고, 4년 뒤 학부에 입학해 수학을 공부했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조' 창설을 주도하고 '국가유산과 과학정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당시 사상계몽 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20년 그는 졸업 후 학교에 머물며 북경대학 역사학과 강사로 재직했다. 1922년 겨울, 모자수는 북경대학 사학과 시험에 합격한 후 야오충오 등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대학 에서 과학사를 공부했다. 
1930년 봄, 중국으로 돌아와 북경대학 역사학과에서 과학사, 문화사 등을 가르쳤다. 1932년에는 북경대학 도서관 장을 역임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북경대학교, 청화대학교 , 난카이대학교가 후난성 창사로 이전하여 '창사임시대학교'로 통합되었다. 이후 전쟁 상황이 악화되면서 학교를 윈난성 곤명으로 이전하고 ' 국립서남연합대학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북경대학교 도서관의 희귀도서를 분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는 직접 창사에서 구이린까지 여행하여 후먼, 홍콩, 안난 ( 현재 베트남 ) 하이퐁을 거쳐 운남-베트남 도로를 거쳐 쿤밍에 도착했다. 
1949년, 당시 국립대만대학 학장이었던 동급생 푸몽전(시녤)의 초청으로 모자수는 대만으로 가서 중국어, 논어, 번역문학, 중국사를 가르쳤다. 국립대만대학 중국문학과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중국어 수사학 토론, 맹자 주석 토론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37년 동안 국립대만대학에서 강의해 왔다. 동시에 그는 대만 '중국어학회' 전무이사, ' 국가장기발전과학위원회 ' 자문위원 겸 위원장, '신시대' 편집장을 맡고 있다. " Academia Sinica "의 평론가 및 기타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
1973년 은퇴한 후에도 8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립대만대학 중국연구소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푸젠가톨릭대학 강의 교수로 임명되어 강의를 했다. 1986년 94세의 나이로 국립대만대학 명예교수로 임명되었다. 1987년에는 대만 최고의 학술상인 ' 행정원 ' 문화상을 수상했다. 1988년 5월 11일 국립대만대학 병원에서 병으로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출처 : https://baike.baidu.com/item/%E6%AF%9B%E5%AD%90%E6%B0%B4/5158976?fr=ge_ala

44. 맹삼 孟森(1868-1937)

세상에는 맹신사 선생으로 알려졌다. 장쑤성 우진 출신.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근대 청나라 역사분야의 뛰어난 창시자이다. 그의 저서는 청 근대사 학문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며, 청 근대사 연구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다. 
그는 많은 시험에 낙방하다가 교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천성이 강직하고 재능에 얽매이지 않아서 ‘순수하고 미쳤다’는 평판을 갖고 있다. 광서 28년(1902년), 일본 도쿄 호세이대학에 파견되어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광서 31년(1905년)에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정샤오쑤, 장젠 등과 함께 상하이에 가서 예비 입헌 공회를 설립하고 전국 입헌을 주장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그는 청나라 정부의 붕괴가 기정사실이라 보고 입헌적 입장을 버리고 혁명에 호응했다. 청나라 말기 민초, 점차 정치 활동을 떠나 역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3년(1914년)에 그는 '심사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심사의 사료' 1권을 발표하였고, 청나라의 세관 진입 이전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민국 19년(1930년) 난징 중앙대학교에 부임하여 강의 '청나라 전기'를 집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국립 북경대학에 고용되어 《만주 건국사》를 강의하고 《명원청 종합기록》을 편찬했다. 청나라가 입관한 후, 관외 증신이 명나라에 있었던 역사를 언급하는 것을 꺼려, 입관 전 역사가 대부분 매몰된 것을 고려하여, 그는 만주 개국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청나라 입관 전후의 역사 자료를 발굴, 정리, 검토하는 데 주력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강의하고 '명나라 역사 강의'와 '청나라 역사 강의'를 저술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고증하고 서술했는데, 그의 논평은 예리하고 독창적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연구 방법을 흡수하여 명청 역사 연구를 개척하였다. 민국 27년(1938년) 1월, 북경에서 6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출처 : https://baike.baidu.com/link?url=GgU4BuBJV4VTszuaws7AwTaKWYHeIzvdjJyOR2w85svsNvG8erTJkicv_qSW5AyaDp7p1Juh8-Azz2Jd_evXaT1dxEyPn6AzlZm1zFs1Xe_

45. 치쓰허 齐思和(1907-1980)

영진오골목촌(현재의 산동성 닝진시)에서 태어났다. 중국민주동맹 회원,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애국학자.
그는 북경사범대 교수, 연칭대 역사학과 주임, 인과대학 학장, 북경대 역사학과 교수, 세계고대사교육연구실 주임,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학술위원, 중국세계중세사연구협회 명예주석을 역임했다. 학식이 깊고 국내외 고대와 현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중국 근대사, 중외관계사, 중서통신사, 세계중세사, 세계근대사, 세계현대사, 영국사, 미국사에 대한 연구를 해왔으며 특히 진나라 이전 역사와 세계 중세 역사에 대한 조예가 깊다. 평생 400만 자에 달하는 글을 썼는데, 진나라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황제의 기구 제작 이야기』, 『오행론의 유래』, 『오행론의 기원』, 『전국시대』, 『전국시대 작품연구』, 『전국시대 작가 고우의 행적연구』, 『서양지리연구』 『주나라』 『계곡명 고찰』, 『주나라 서씨의 의례 고찰』, 『서주나라의 정치사상』 등이 있으며 근대사 방면으로는 『위원』과 『만청학풍』이 있다. 그리고 1951년 판원란의 초청으로 '중국근대역사자료시리즈' 편집에 참여하여 『아편전쟁』, 『제2차 아편전쟁』, 『황작자허내제주협의합간』 등을 잇달아 완성하였으며, 세계사 방면으로는 『서양현대사의 개요와 문서』, 『세계세기사 강의』가 있고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61년 우한의 초청으로 『세계사 시리즈』의 부편집장이 되었다.
출처 : https://baike.baidu.com/link?url=f0GnomWBeWTwbY1hWIT5UKeZnQh2No3ypKMhk9k80EYS8FIpkBAipKUqI95QRBkw096uOeztYiYsr2odxTE78GImfeo9fZxrAsP_fFPGrEL23whVpIGTYfYvFhJVUm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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